역대 국사교과서Ⅷ. 주권 수호 운동의 전개2. 일제의 침략과 의병 전쟁[2] 군대 해산 이후 의병 전쟁의 확산 과정은?

의병 전쟁의 확산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후, 일본은 대한제국의 재정이 어렵다는 구실을 붙여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군대가 해산당하자, 군인들은 이에 저항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시위대 제1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자, 이를 계기로 시위대는 서울 시내에서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으며, 원주, 진주 등지의 진위대도 일본군과 싸웠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 부대에 합류하면서 의병 부대는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근대적인 무기를 갖추어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의병들의 항일 투쟁은 이제 범국민적인 대일 전쟁의 성격을 띠고 전개되어 갔다. 각지에서 의병 부대가 일본군과의 전투를 계속하는 과정에서 서울에서 일본군을 몰아 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나, 각지의 의병 부대가 연합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1만여 명의 의병들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관동 의병장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창의군을 편성하였다. 그 중 300명의 선발대는 서울 부근까지 진격했지만, 일본군의 선제 공격을 받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에도 각지에서 항일전이 계속되었으나, 무기와 전투 경험면에서 일본군에 비해 열세인데다 일본군이 대규모 작전을 벌여 의병 활동은 점차 약화되어 갔다. 일부 의병 부대는 국권을 빼앗긴 후에 만주나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의병의 무기

군대 해산 이전에는 의병의 다수가 재래식 화승총이나 창, 칼, 몽둥이 등으로 무장한 반면, 일본군은 최신형 소총이나 기관총까지 동원하였다.

의병의 피해

1907년 8월부터 1909년 말까지 일본군에 의해 학살된 의병의 수는 16,000여 명, 부상자는 36,000여 명에 달하였다.
읽기자료

의병장 민종식의병들에게 알린 글 ⋅

슬프도다. 이제 우리 나라는 일본에 강제로 삼켜졌으니, 나라 없이 자기 집과 자기 몸의 영예가 있을 수 없고, 망국의 설움 받으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없다. 애달프다. 우리 집 재산을 다 팔아서, 국난을 당하여 일어난 의병의 병기와 군량에 보충하리라.
의병 부대의 모습(1907)
여성 의병 윤회순 | 강원 춘천
의병 부대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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