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교(下敎)에서 “왜설(倭說)이 낭자하다.”라고 하셨는데, 시끄럽게 와전되는 것들은 반드시 이와 같을 뿐이니 염려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서계(書契)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실로 관계됨이 매우 중대하니, 소생이 어찌 제 소견만 고집하여 제 주장만 세우려 하겠습니까.
대저 처음부터 지금까지 각하께서 깊이 우려하신 점은 오로지 일본과 서양이 한편이 되는 것과 오로지 이 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저들에게 약함을 보이는 것이라는 데 있었습니다. 소생이 깊이 우려하는 것도 일본과 서양이 한편이 되는 것에 있으니, 우리가 그 빌미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려하는 것이 저들에게 약함을 보이는 데 있으니, 서계를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가 하니, 저들은 이미 서양과 한편이 되었으므로 쌓인 분노가 폭발하면 반드시 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우리나라를 엿보던 서양이 어찌 합세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서계를 거절한 것은 실로 들어주기 어려운 요구가 계속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니, 저들이 이러한 생각을 엿보고서 우리가 겁을 먹었다고 어찌 속으로 웃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와 같다면 서계를 받지 않은 것이 과연 저들에게 강함을 보이는 것이겠습니까, 약함을 보이는 것이겠습니까. 강함과 약함은 서계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지만, 저들이 꼬투리를 잡아 군대를 일으킬 명분으로 삼기에는 충분합니다.
대개 강함과 약함의 형세는 사리(事理)의 옳고 그름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일을 처리하고 사람을 접할 때 예(禮)가 있고 도리가 바르다면, 비록 약하다고 해도 반드시 강해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일을 처리하고 사람을 접할 때 예가 없고 도리가 바르지 않으면 비록 강하다고 해도 반드시 약해 보일 것입니다.
지금 만약 서계를 수정해서 왔는데 다시 거절하고 받지 않는다면 저들은 분명 “우리는 성의를 다했는데 어찌 이렇게도 모욕을 준단 말인가.”라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우리가 변란을 자아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들이 몇 년 동안 거절당한 것을 담당 역관에게 그 책임을 돌렸기 때문에 저들은 반드시 동래 부사(東萊府使)를 만나 직접 전달하려는 것입니다. 종전에 동래 부사가 주연을 열어 그들을 접견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왜 서로 만나지 않는단 말입니까. 한 번 동래 부사를 만나고 나면 점차 감영(監營)에 가기를 요구하고 조정에 가기를 요구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모두 지레짐작입니다. 일본인이 서울에 와서 알현한 것은 선조(宣祖) 때에도 있었지만, 임진년(1592)의 난리가 어찌 이로 인해 일어난 것이겠습니까. 저들이 만약 군사를 동원하여 우리 국경을 한 발짝이라도 넘어온다면, 오늘날 천하의 대세를 믿고서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에게 무슨 좋은 계책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혹자는 “예로부터 나라를 그르친 것은 ‘화친’이다.”라고 하는데, 소생은 이 말이 어느 글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옛 시대를 두루 살펴보더라도 화친으로 나라를 그르친 경우는 오직 진회(秦檜)가 송(宋)나라를 그르친 경우뿐이니, 이것은 인용하여 증거로 삼을 만한 일이 아닙니다. 송나라가 원수를 잊고 금(金)나라와 화친한 것은 만고에 없었던 일인데, 이것을 어찌 이웃 나라와 화친하는 일에 끌어다 비유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소생이 국가의 대계(大計)에 대해 감히 함부로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구구한 근심을 실로 풀 수가 없기에 이처럼 장황하게 말씀드린 것입니다.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고 깊이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소생이 어찌 감히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도모하지 않는다’라는 등의 말을 핑계로 편안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말이 여기에 이르니 답답함을 참으로 금할 수 없습니다.
박규수, 『환재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