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Ⅳ. 서양 근대 사회의 발전1. 근대 의식의 성장(2) 종교 개혁

루터의 종교 개혁

독일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종교 제후의 세력이 강하여 로마 교황의 좋은 착취의 대상이 되어 왔다. 르네상스의 보호자였던 교황 레오 10세는 성 페드로 대성당의 수축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고자 독일에서 면죄부를 판매하게 하였다. 이 때,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로 있던 루터는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였다(1517). 루터는 처음 교회와 정면으로 싸울 생각은 없었으나, 교황의 공격을 받게 되자 자기의 입장을 명백히 하고 교황과 정면으로 맞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교회의 의식이나 개인의 선행이 아니라 오직 신앙으로써만 인간은 구제되는 것이며, 신앙의 근거는 성서라고 주장하였다.

루터   

황제 카알 5세는 보름스에 국회를 소집한(1521) 뒤 루터에게 그의 주장을 취소힐 것을 강요하였으나, 루터는 끝내 굴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법의 보호를 박탈당하고 피신을 하게 되었다. 그는 피신 중에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는데, 루터의 성서 번역은 성서의 보급에 공헌하였을 뿐만 아니라, 근대 독일어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이 무렵 루터의 종교 개혁은 독일 전국에 파급되고. 1524년에는 남부 독일 일대에 대규모의 반봉건적인 대농민 반란이 일어났다(농민 전쟁). 이 반란은 다음해에 진압되었으나, 루터가 이 반란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농민층의 지지마저 상실하게 되어, 종교 개혁은 주로 그를 지지하는 제후와 자유 도시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이후, 루터 파와 카톨릭을 지지하는 카알 5세와의 사이에 장기간에 걸친 내전이 벌어진 끝에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회의로 타협이 성립되었다(1555). 그 내용은 독일의 제후와 자유 도시에 루터 파 교회를 선택할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개인에게 신앙의 자유를 준 것은 아니지만, 카톨릭 교회 이외에 교황의 지배를 받지 않는 새로운 교파를 인정한 것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뒤, 루터 파 교회는 북부 독일을 중심으로 덴마아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에 널리 퍼졌다.

카알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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