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Ⅱ. 근대 사회의 발전4. 근대 문화의 발달

(3) 문예와 종교의 새 경향

문학의 새 경향

근대 사회로 이행되면서 문학계에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즉, 고전 문학에서 신문학으로 옮겨가는 새로운 풍조가 일어나, 순 한글로 쓰인 신소설이 등장하였다.

신소설   

신소설은, 그 주제들이 아직 구소설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였으나, 언문 일치의 문장을 사용하였으며, 봉건적인 윤리 도덕의 배격과 미신 타파를 주장하고, 자주 독립 의식을 고취하여 계몽 문학의 구실을 하였다. 당시, 신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이인직의 혈의 누, 이해조의 자유종 등이 있다. 또, 최남선은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신체시(新體詩)를 발표하여 근대시의 형식을 새로이 개척하였다.

신문학의 발달과 더불어 외국 문학의 번역물도 나타났다. 성경, 천로역정과 같은 크리스트 교 계통의 책과, 이솝 이야기, 로빈슨 표류기 등의 문학 작품이 널리 읽혀졌다. 문학 활동은, 대한 제국 말기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일부 외국 문화에 대한 분별 없는 수입과 소개로 인하여 식민지 문화의 터전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지만, 일반적으로는 민족 의식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예술계의 변화

서양의 근대 문화가 도입되면서 특히 예술계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먼저, 음악 부문에 있어서는 크리스트 교가 수용되어 찬송가가 불려지면서 서양의 근대 음악이 소개되었다. 또, 서양식 악곡에 맞추어 부르는 신식 노래인 창가가 유행하였는데, 독립가, 권학가, 애국가 등이 유명하였다. 그 중에서도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되는 애국가는, 국민 사이에 널리 애창되어 민족 의식을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애국가

一. 승자신손 천만 년은   三. 이천만인 오죽 한맘

    우리 황실이오            나라 사랑하야

    산고슈려 한반도난        사롱공상 귀천 업시

    우리 본국일세.           직분만 다하세.

二. 애국하난 열심의긔    四. 우리 나라 우리 님군

    북악갓치 놉고            황천이 도으사

    충군하난 일편단심        국민동락 만만세에

    동해갓치 깁허.           태평 독립하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히 보전하세.

한말 애국가의 한 종류(윤치호 작)

연극 부문에서는, 양반 사회에서 천시되었던 민속 가면극이 민중들 사이에 성행하였다. 그리고 신극 운동도 일어나,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원각사가 세워졌고, 은세계, 치악산 등의 작품을 공연하였다.

한편, 미술 부문에서는 미술가들이 직업인으로서의 위치를 굳혀 갔으며, 서양의 화풍이 소개되어, 서양식 유화도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예술은 각 분야에 걸쳐 근대적 양상을 띠고 발달하여 갔다.

종교 운동의 변화

개항 이후, 종교면에 있어서도 새로운 국면이 열렸다. 오랫동안 박해를 받아 오던 천주교가 1880년대에 선교의 자유를 얻은 뒤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치, 운영하였고, 교육과 언론을 통하여 애국 계몽 운동의 대열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종교 운동은 개신교의 수용과 발전으로 크게 활기를 띠어 갔다. 개신교의 선교사들은 서양 의술을 보급시켰고, 학교를 설립하여 우리 나라 근대 교육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 개신교는 그 선교 과정에서 한글의 보급, 미신의 타파, 근대 문명의 소개 등 문화면에서도 적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개항 이후, 농민을 기반으로 하여 민중 종교로 성장한 동학은, 1890년대에 동학 농민군을 조직하여 반봉건, 반침략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전통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동학은 동학 농민 운동의 실패로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그 후, 이용구 등 친일파가 일진회를 조직하고 동학 조직을 흡수하려 하자,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고, 동학의 정통을 계승하여 민족 종교로 발전시켰다.

한편, 위정 척사 운동의 중심체였던 유교는 외세에 저항하는 반침략적 성격은 강하였으나, 시대의 흐름에 역행한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에, 개명한 유학자들은 유교의 개혁을 주장하였는데, 박은식의 유교 구신론(儒敎求新論)1)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개화기의 불교는 조선 왕조의 억불 정책에서 벗어났으나, 그 후 통감부의 간섭으로 일본 불교에 심하게 예속 당하게 되었다. 이에, 한용운 등은 조선 불교 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내세워 불교의 자주성 회복과 근대화를 위한 운동을 추진하였다.2)

한편, 나철, 오기호 등은 단군 신앙을 발전시켜 대종교(大宗敎)를 창시하였다. 대종교는 보수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민족적 입장을 강조하는 종교 활동을 벌였고, 특히 간도, 연해주 등지에서의 해외 항일 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성장하였다.

나철   
1) 박은식은 유교 구신론에서 국민의 지식과 권리를 계발하는 새로운 유교 정신을 강조하고, 진취적인 교화 활동의 전개와 간결하고 실천적인 유교 정신의 회복을 주장하였다.
2) 통감부의 종교 간섭이 심해지면서 일본 종교가 침투해 왔는데, 이에 한용운은 조선 불교 유신론에서 미신적 요소의 배격을 통해 불교의 쇄신을 주장하였다.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