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면자(覆面子, 마스크맨)
저녁을 먹고 동무 C와 같이 산보를 나왔다. K동 K학교 문 앞에 도달하니 오른편에 어떤 큰 집 줄행랑 같은 곳에서 어떤 신식여자 두 분이 손목을 마주잡고 나왔다. 눈치 빠른 C는 언제 보았는지 내 옆구리를 뚫어지게 꾹 찌르며 ‘이크 단발미인!’하고 걸음을 멈추면서 나더러 보라는 듯 은근히 청(請)을 한다. 누가 방귀 한방만 뀌어도 잠자코 있지를 못하는 성미에 더구나 신식 여성에다 최신식의 단발 미인을 보게 됨이랴. 호기심이 바로 지금 폭발하여 ‘이크 단발미인!’하고 그들이 들을만큼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였다. 그들은 한번 슬쩍 쳐다보더니 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자기네끼리 뭐라고 속삭이며 딱 붙어서 줄기차게 계속 뛰어간다. “여보게 저들이 어디로 가는지 우리 따라가 보세. 멀찍이 따라가며 그들의 언어와 행동을 좀 살펴보세. 어쨌든 별종들이야.” “그러세. 그거 참 좋은 장난일세. 떠들지 마세. 가만히 살짝 뒤만 따라가세.” 이와 같이 약속을 하고 슬금슬금 미행을 하였다. 우리 뒤에 오던 사람들도 언제 보았는지 벌써 “단발여성(斷髮孃)! 단발미인!”하고 서로 주고받고 떠든다. 앞으로 오던 사람들도 “꽁지 빠진 병아리 같다”느니 “송락 쓴 여승(女僧)같다”느니 별별 해괴한 이야기가 다 들렸다. 길거리에서 “오리야 이리야” 장난치던 아동들도 “야! 단발미인 간다. 이것 봐라!”하고 떠들어대고, 가게 머리에서 물건을 팔던 사람들도 무슨 큰 구경거리가 생긴 듯 멍하니 서서 그들이 가는 모습을 유심히 본다. 어쨌든 만인(萬人)의 이목을 끄는 존재들이었다. 보는 사람마다 수군수군 시비와 논란이 많았다. 우리 뒤에서 오던 어떤 청년 두 명은 이런 말까지 한다.
“저들의 안중(眼中)에야 예의염치가 어디 있는 줄 아나? 예부터 내려오는 풍속이니 도덕이니 모두 부정한다네.”
“여자의 유일한 아름다움인 머리까지 잘라 버렸으니 말해 뭐하겠는가. 어떤 단발 여성(斷髮孃) 한 분은 선술집 출입도 거리낌이 없이 한다데. 설렁탕집이나 중국요리집 같은 곳은 말도 말고...”
“나도 들었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왔다던가 니콜니스크에서 왔다던가. 어쨌든 조선의 풍속과 관습을 모르는 여자라네. 선술집이고 설렁탕집이고 마찬가지로 음식점인데 그야 창피할 것은 없지.”
“하기야 우리 남자들이 머리를 깎고 술집에 다니고 외도(外入)를 하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라고 그런 곳에 못 다닐 법이 있나. 마찬가지야. 편견으로 보니 그렇지.”
이런 소리를 듣고 생각하니 아닌 게 아니라 나도 언제가 그들에게서 들은 소리이다. 러시아에서 처음 온 여자가 어떤 선술집에 들어가 술 한잔에 안주를 열 개나 먹고 나서 가격이 싸니 비싸니 한참 말다툼을 하고 나왔다는 소리를 들은 일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무슨 창피랴. 사람으로 의례히 할 짓이다 하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말았다. C는 나의 귀에다 입을 대고 굉장한 발견인 듯이 이렇게 속삭인다.
“여보게 저게 누군지 아나. 하나는 OOOO회의 C이고 하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K라는 여자라네. 자네 아나?”하고 “응. 그런가”하고 뒷모습을 자세히 보니 언젠가 한 번 인사를 했던 생각도 난다. 흰 저고리 무명 치마에 손주머니를 든 여자는 분명히 C 같고 양장(洋裝)에다가 손짓을 번갈아 하며 노상연설을 하는 여자는 K인 듯 싶다. 우리는 여자의 단발이 된다 안된다 현상(懸賞) 토론을 하는 것처럼 뒤에서 멀찍이 따라가며 공들여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였다. T교회 앞을 지나가려니까 H병원 앞에서 그들은 어떤 남성 2~3명과 악수를 한다. 어디를 가냐 어디를 갔다 오냐 깔깔 웃어가며 크게 법석을 떤다. 지나가던 어떤 부인네는 곁눈으로 힐끗 보더니 “에구! 망측도 해라. 세상이 망하려니까 별 꼬락서니를 다 보겠네. 남의 사내들 손을 막 잡아 흔드네. 대로상에서...... 에구! 저 꼴 좀 봐요. 꽁지 빠진 수탉같구료 하하......”하며 웃겨 못 견디겠다는 듯 자지러지게 웃고 지나간다. 우리는 미행인 티를 내지 않으려고 갑자기 T교회 정문 안으로 들어섰다. 한참 만에 “이제는 그들이 갔겠지. 얼른 따라가야지”하고 문밖으로 나서니 웬걸 무슨 이야기인지 아직도 깔깔 웃어가며 뭐라고 주고받고 야단들이다. 가만히 보니까 그 청년들은 사회운동자(社會運動者)들이다. 다는 모르지만 한 사람은 분명히 OO회의 R군이었다. 사쿠라 몽둥이를 든 친구는 OO회의 K군인 듯하다.
…(후략)…
「京城名物女 斷髮娘 尾行記 아모리 숨기랴도 나터나는 裏面」, 『별건곤』, 1926년 2호, 69~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