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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삼국 통일을 완성하다

<감은사지(경북 경주시)>   

“내가 왕이 된 후 지금까지 돌이켜보면 대부분의 나날이 전쟁의 연속이었던 같소.”

“덕분에 우리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또 당을 몰아내고 통일을 이룬 것 같습니다.”

“경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오. 이제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동해에 장사를 지내주시오.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소.”

681년 신라의 한 왕이 바다의 용이 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어요. 이와 같은 유언을 남긴 신라의 왕은 누구일까요?

아버지 태종무열왕과 함께 삼국 통일에 나서다

신라와 당은 군사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함께 공격하였어요. 두 나라는 전쟁 이후에 백제 땅과 대동강 남쪽의 고구려 땅은 신라가 차지하고, 대동강 북쪽의 고구려 땅은 당이 차지하기로 약속했어요. 그러나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은 약속과 달리 백제 땅에 자신들의 관청을 설치하고 직접 통치하려 했어요.

661년 문무왕은 아버지 태종 무열왕에 이어 신라의 왕이 되었어요. 이 무렵 당은 한걸음 더 나아가, 문무왕을 계림주 대도독에 임명하였어요. 이는 신라를 독립된 나라의 왕이 아닌 당이 임명한 관리가 다스리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속셈이었어요. 즉 당나라의 영토로 삼겠다는 것이었어요.

신라는 당의 속셈을 알아채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지요. 그래서 고구려와의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피할 수 없는 당과의 전쟁을 차근차근 준비하였어요.

고구려가 패망한 뒤 곧바로 고구려의 각지에서 부흥군이 크게 일어났어요. 치밀하게 전쟁 준비를 마친 신라가 670년 고구려 부흥군과 연합해 총 2만의 병력으로 요동 지역의 당군을 공격하면서 신라와 당의 전쟁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어요.

신라, 당과 맞서 싸우다

672년 평양에서 황해도 배천까지 남쪽으로 내려온 당군은 신라군의 공격으로 다시 석문으로 올라갔어요. 석문은 황해도에 있는 넓은 들판으로 임진강을 건너 평양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어요.

<신라 장창 보병의 모습>   

신라군은 석문 들판의 남쪽에서 북쪽의 당군을 바라보며 진을 쳤어요. 신라군은 이곳에서 당의 기병을 방어하기 위해 장창 보병을 이용하였어요. 당 기병들이 신라군 진영으로 돌격해오자 신라 장창 보병들 앞에 서있던 궁수들이 화살을 한꺼번에 쏘았어요. 쓰러진 기병들을 넘어 다른 기병들이 가까이 접근하자 궁수들이 뒤로 빠지고 장창 보병들이 이들을 대적했어요.

장창 보병들은 병사를 노리지 않았어요. 대신 이들은 긴 창을 땅에 지지해 세우고 달려오는 말을 겨냥했어요. 맨 앞의 말과 병사가 우루루 쓰러지자 뒤따르던 기병들의 움직임이 둔해지기 시작했어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도끼를 든 부월수와 칼을 든 검수들이 주춤하고 있던 기병을 포위하여 하나씩 제거해 갔어요. 이 전투에서 장창을 활용한 신라군은 당군 3천명을 사로잡았어요.

장창 보병들은 병사를 노리지 않았어요. 이들은 긴 창을 땅에 지지해 세우고 달려오는 말을 겨냥했어요. 맨 앞의 말과 병사가 쓰러지자 뒤따르던 기병들의 움직임이 둔해지기 시작했어요. 도끼를 든 부월수와 칼을 든 검수들이 주춤하고 있던 기병을 포위하여 하나씩 제거해 갔어요. 이 전투에서 장창을 활용한 신라군은 당군 3천명을 사로잡았어요.

기분 좋은 승리였어요. 승리에 취한 신라군은 도망가는 당군을 계속 쫓아가며 공격을 했어요. 그러나 너무 정신없이 쫓다 적진 깊숙이 들어가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어요. 이번에는 상황이 역전되어 거꾸로 당군의 공격을 받은 신라군은 대부분의 병사를 잃는 큰 피해를 입었어요.

김유신의 아들 원술도 화랑으로 이 전투에 참가하고 있었어요. 원술은 신라군이 밀리고 있을 때 남은 군사를 이끌고 적진으로 뛰어들려 했어요. 이때 부하가 말의 고삐를 붙잡고 원술을 말렸어요.

“대장부가 죽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죽을 곳을 택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룬 것 없이 죽기보다 살아서 나중에 공을 세우는 것이 참다운 무사의 용기일 것입니다.”

“남아는 구차하게 살지 않거늘, 장차 무슨 면목으로 아버지를 뵙겠는가?”

원술이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 나가려고 하였지만, 부하가 고삐를 놓아 주지 않았어요. 이 때 총사령관의 후퇴 명령이 떨어졌고, 원술도 눈물을 삼키며 다른 군사와 함께 후퇴를 하였어요. 석문 전투에서 신라군이 크게 졌다는 소식은 문무왕에게 전해졌지요. 왕은 신하들을 모아 대책 회의를 했어요.

“석문 전투의 패배를 어찌 하면 좋겠소?”

석문 전투의 패배로 크게 걱정을 하는 문무왕 앞에 김유신이 나서서 말했어요.

“당군의 세력이 크니 요충지에 성을 쌓고 장수와 군사들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옵소서. 비록 신이 늙었으나 직접 적 앞에 나아가 방비할 터이니 너무 심려 마십시오. 다만 원술은 왕명과 가문을 욕되게 하였으니 본보기로 목을 베어 주옵소서.”

“원술에게 무슨 죄가 있겠소. 혼자에게만 무거운 형벌을 내릴 수는 없소.”

왕은 원술의 죄가 없다고 했으나 김유신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며 원술을 보려 하지 않았어요. 원술은 부끄럽고 두려워 감히 아버지를 보지 못하고 시골에 숨어 살았다고 해요.

매소성과 기벌포에서 당에 크게 이기다

석문 전투 이후 신라와 당은 서로 눈치를 보며 임진강을 중심으로 서로 대치하고 있었어요. 당군은 칠중성과 매소성을 점령한 후 지금의 의정부 방면으로 남하하는 전진 기지로 삼았어요. 신라군은 3차례에 걸쳐 매소성을 공격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어요. 신라군이 매소성을 정면으로 공격한다는 것은 승산이 없는 일로 보였어요.

그러나 신라군에게 당군을 꺾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남았어요. 이때 당군은 멀리 당으로부터 식량과 무기를 보급 받고 있었는데, 이 보급을 효과적으로 차단한다면 매소성의 당군을 고립시킬 수 있었어요. 신라는 임진강 하구에 위치한 천성에 함대 1백 여척을 집결시키고 당 보급 함대를 기다렸어요.

<쇠뇌와 청동방아쇠뭉치
쇠뇌는 방아쇠 장치를 이용해 화살을 발사하는 무기로 기원전부터 여러 전쟁에서 사용되었다. 신라에서 제작된 천보노는 쇠뇌를 개량한 것으로 1천 보나 화살을 날릴 수 있을 만큼 성능이 뛰어나 당의 황제도 탐을 냈다고 한다. 쇠뇌는 방아쇠 장치를 이용해 화살을 발사하는 무기로 기원전부터 여러 전쟁에서 사용되었다. 신라에서 제작된 천보노는 쇠뇌를 개량한 것으로 1천 보나 화살을 날릴 수 있을 만큼 성능이 뛰어나 당의 황제도 탐을 냈다고 한다.>   
국립경주박물관

675년, 당의 산둥 반도에서 군량미를 실은 당의 보급 함대가 출발했어요. 보급 함대는 칠중성에 주둔하던 당군과 서로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지요. 그러나 당 보급 함대가 만난 것은 뜻밖에도 신라군이었어요. 천성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신라군은 당의 보급 함대를 공격했어요. 신라군의 공격에 당의 함선은 모두 불타고 말았어요.

이 전투에서 신라는 당군 1천 4백 명을 죽이고, 병선 40척을 빼앗았어요. 말 1천 마리도 얻었지요. 당군 총사령관 설인귀도 신라군의 포위를 뚫고 간신히 도망갈 정도였어요.

당시 매소성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은 겨울에 접어든 시기에 보급의 어려워지자 매우 불안해했어요. 당군의 사기가 떨어진 것을 알아챈 신라군은 매소성을 기습 공격해 순식간에 빼앗았어요.

매소성을 빼앗긴 당군은 20만의 군사를 동원해 다시 공격해 왔어요. 그러나 이에 맞선 3만 명의 신라군은 죽을힘을 다해 싸워 물리쳤어요. 원술도 이 전투에 참가해 힘껏 싸워 지난날의 치욕을 씻고 큰 공을 세웠지요.

<매소성 전투>   

신라군의 공격에 당군은 말 3만 여 필과 많은 무기를 버리고 허겁지겁 북쪽으로 군대를 돌렸어요. 매소성 전투로 당군은 큰 피해를 입었어요. 신라군도 여러 차례 큰 희생을 치르기는 했으나 매소성 전투를 고비로 전세는 신라에게 유리해졌지요.

당군은 매소성에서 패한 뒤로는 육로로 신라의 임진강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였어요. 그래서 육로 대신 금강의 입구인 기벌포를 통해 신라의 측면을 공격하려 하였어요. 기벌포를 장악하면 서해 지역을 모두 장악할 수 있었기에 기벌포는 아주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어요. 당군은 백제를 공격할 당시 13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켰던 경험도 있어 전투에 자신만만해 했어요. 신라도 이에 맞서 함선 1백 여척을 이곳에 배치시켜 준비하고 있었지요.

676년, 드디어 설인귀의 당 수군이 기벌포로 내려오자, 신라군도 함선을 이끌고 기벌포 앞바다로 나아가 맞서 싸웠어요. 그리고 크고 작은 전투 수 십 차례를 치렀지요. 전투 결과 신라군은 당의 수군 4천여 명의 목을 베고 크게 승리하였어요. 이렇게 해서 문무왕 10년부터 16년까지 7년간에 걸친 참으로 길고도 험난한 당과의 전쟁은 신라의 승리로 끝이 났어요.

죽어서도 신라를 지키기를 바라다

문무왕은 당의 군대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삼국 통일을 완성했어요. 삼국 통일 후 문무왕은 바다를 통해 침입해 올 왜구를 걱정했어요. 그래서 부처님의 힘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동해 바다 가까운 곳에 절을 세우고자 했어요.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은 신문왕은 절을 모두 지은 후에 문무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감은사라 지었어요.

문무왕은 죽은 후에도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했어요. 그래서 화장을 하여 동해 바다에 장사를 지내달라고 유언을 남겼어요.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서 장사를 지낸 곳이 바로 감은사와 가까이에 있는 대왕암이에요.

삼국을 통일하고 죽어서도 나라를 걱정했던 문무왕! 문무왕이 꿈꾼 신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문무대왕릉(경북 경주시)>   

[집필자] 신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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