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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신라 개혁을 꿈꾸다

<최치원기념관(중국 양저우)>   

“당에서 배운 것을 신라 땅에서 펼칠 수 없으니, 이리 저리 떠돌며 허전한 마음을 달랠 수밖에……”

“동백섬 소나무 숲 사이로 비추는 저 달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구나.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이 바위는 내 이름을 따 해운대라 해야지.”

해운은 누구일까요? 그는 왜 벼슬을 버리고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을까요?

어린 나이에 당으로 유학을 떠나다

해운은 최치원의 다른 이름이에요. 고운이라는 또 다른 이름도 있었지요. 그는 신라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겨했는데,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로 똑똑했어요.

그런 최치원을 볼 때마다 아버지 견일의 마음은 편치 않았어요. 신라에서는 제 능력을 발휘하기 힘들 테니 말이죠. 왜냐구요? 바로 골품제 때문이지요.

골품제는 신라의 신분제로 맨 위의 진골부터 6두품, 5두품, 4두품 등으로 신분이 나뉘어 있었어요. 그리고 골품에 따라 오를 수 있는 관직이 정해져 있었어요. 뿐만 아니라 사는 집의 크기, 입을 수 있는 옷, 사용할 수 있는 그릇, 수레의 재료나 소와 말의 장식까지 모두 정해져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진골 귀족들이 높은 관직을 다 차지하고 나랏일을 좌지우지했지요.

최치원의 집안은 진골 아래인 6두품 신분이었어요. 최치원의 아버지 견일은 아들이 신라에서는 제대로 성공할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았어요. 최치원을 당으로 유학 보내기로 마음먹었지요. 당의 빈공과에 합격하면 훗날 신라에서 좀 더 빠르게 출세할 수 있을 테니까요. 빈공과는 당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시험이에요. 신라 유학생들을 비롯해 많은 외국인들이 빈공과에 급제해 당에서 벼슬을 하기도 했지요.

<신라의 골품제>   

“열심히 공부해 10년 안에 빈공과에 급제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나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거라. 나도 아들이 있다 생각지 않을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 꼭 급제하겠습니다.”

최치원은 아버지 앞에서 굳은 다짐을 했어요. 그리고 12살 어린 나이에 장삿배에 몸을 싣고 멀고 먼 당으로 유학을 떠났어요.

문장가로 당에서 이름을 떨치다

“반드시 당에서 과거에 합격하고 훗날 신라로 돌아와 내 꿈을 펼쳐야지.”

어린 나이에 홀로 배에 몸을 실은 최치원은 멀어져 가는 고국 땅을 바라보며 다짐했어요. 당의 수도 장안은 2000리가 넘는 먼 곳이었어요. 신라를 떠난 지 몇 달 만에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지요.

장안은 신라, 발해 등 동아시아 각국 유학생들로 넘쳤어요. 여러 나라 상인들로 거리는 활기찼고요. 당시 신라 사람들은 당에서 신라방이라는 마을을 이루고 살기도 했지요. 각국의 젊은이들에게 당은 기회의 땅이었어요. 외국인에게도 벼슬 할 기회를 주었으니 말이에요.

최치원은 열심히 공부했어요. 어려울 때는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어요. 그는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 도교도 두루 공부했어요. 그리고 유학 온 지 6년째 되던 해 빈공과에 급제했고, 2년 만에 벼슬도 얻었지요. 높은 벼슬은 아니었지만 최치원은 맡은 일을 열심히 했어요. 여러 벼슬을 하다,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총사령관인 고변의 종사관이 되었어요.

당시 중국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지요. 875년 황소가 농민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가 도성을 버리고 피란을 가야했거든요. 당의 토벌군은 쉽사리 황소를 진압하지 못했어요. 그 상황을 지켜보던 최치원은 황소를 꾸짖는 글인 〈토황소격문〉을 지어 보냈어요.

<황소를 꾸짖는 최치원>   

온 세상 사람들이 너를 죽이려고 하고,
땅속의 귀신들도 너를 죽이려고 의논했을 것이다.
네가 비록 숨은 붙어 있다고 하나 넋은 이미 빠졌을 것이다.

황소는 글을 읽다 깜짝 놀라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전해요. 황소의 마음을 꿰뚫어 본 최치원의 글이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거예요. 사기가 떨어진 그는 결국 굴복하고 말았지요.

“황소를 진압한 것은 칼이 아닌 붓일세. 글의 힘이 칼보다 더 강하다니까.”

사람들은 황소를 진압한 것은 군대가 아닌 최치원이라고 했어요. 그의 글 솜씨와 이름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지요. 최치원은 당의 황제로부터 큰 상을 받고, 문장가로 이름을 크게 떨치게 되었어요.

신라로 돌아와 개혁안을 올리다

“내 아무리 당에서 성공해도 부모님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떨칠 수 없구나. 신라로 돌아가 뜻을 펼쳐야겠다.”

최치원은 고국을 떠난 지 16년 만에 신라 땅으로 돌아왔어요. 다른 유학생들도 신라로 돌아와 활약을 하기도 했지요. 헌강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최치원을 곁에 두려 했어요. 그는 당에 있을 때 썼던 글들을 정리한 『계원필경』이라는 책을 써 왕에게 바치기도 했지요.

하지만 헌강왕이 죽고, 뒤이어 정강왕과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르며 상황이 바뀌었어요. 왕권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고, 진골 귀족들은 권력 다툼을 벌이며 자신들의 배만 채우느라 바빴어요. 왕과 귀족들의 사치스런 생활로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고요.

백성들은 세금 독촉에 시달리며 나무껍질과 풀로 겨우 끼니를 때우며 살아갔지요. 세금을 못내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결국 참다못한 농민들이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났지요. 그런 틈에 지방에서는 호족세력들이 성장하고 있었지요. 진골 귀족들의 눈 밖에 난 최치원도 지방으로 쫓겨나고 말았지요.

<함양 상림숲(전남 함양군)
최치원은 경남 함양 군수를 지내며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상림이라는 숲을 만들었다. >   

그는 지방 관리로 쫓겨났지만, 무너져 가는 신라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어요. 894년에 10여 가지의 개혁안이 담긴 글을 진성여왕에게 올렸어요.

신 최치원, 충심을 담아 개혁안을 올립니다.
부디 백성들의 삶을 돌보시고 신라를 다시 세우소서.

최치원의 개혁안은 진성여왕에게 받아들여졌어요. 진성여왕은 그에게 6두품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벼슬인 아찬을 내렸고요.

그렇다면 최치원이 올린 개혁안은 제대로 추진되었을까요? 그럴 리가 없지요. 6두품 출신이 올린 개혁안을 진골 귀족들이 받아들일 리 없으니 말이에요. 개혁을 하려면 자신들의 이익을 포기해야 하니까요.

6두품의 한계를 느끼고, 여기 저기 떠돌다

“아무리 좋은 뜻을 품어도 신라에서 6두품 출신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구나!”

최치원은 진골 귀족들의 반대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게 되자 벼슬을 내려놓았어요. 음모와 질투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 이곳저곳을 떠돌았어요. 자연의 경치를 즐기며 시를 읊고, 글을 지었지요. 부산 해운대도 그가 들렀던 곳 중 하나에요. 나중에는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지냈다고 해요.

그러던 어느 날 최치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산속 깊은 곳에 숨었는지, 아니면 저 세상으로 갔는지 알 수 없어요. 다만 어느 계곡에 ‘최치원이 이곳에서 지내다 갓과 신발만 남겨둔 채 홀연히 신선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와요.한 시대의 천재로 무너져가는 신라를 살리려고 큰 뜻을 품었던 최치원, 하지만 그는 골품제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꿈을 접어야만 했지요.

신라에 골품제가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최치원 같은 인재들이 자신의 뜻을 펼치며 살 수 있었을 거예요. 신라는 멸망하지 않고 더 오랫동안 역사 속에 남아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한편 중국 양저우에는 최치원 기념관이 세워져 있어요. 중국 당송 시대의 100대 시인으로까지 꼽히는 최치원의 명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하지요.

[집필자] 황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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