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미있는 초등역사
  • 고려
  • 최승로
  • 최승로, 28개조의 개혁안을 올리다

최승로, 28개조의 개혁안을 올리다

<성균관(국사편찬위원회)>   

“12살밖에 안됐는데 『논어』를 줄줄 읽다니, 참으로 총명한 아이로다.”

“어려서부터 책 읽는 것을 즐긴 덕분이옵니다.”

“여봐라, 이 아이에게 안장을 갖춘 말과 곡식 20석을 상으로 내리고, 영재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라.”

태조 왕건은 흐뭇한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았어요. 태조 왕건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소년은 누구일까요?

유학을 열심히 공부하다

이 소년이 바로 고려 성종 때 이름난 재상인 최승로예요. 최승로는 원래 신라 6두품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자 최승로의 집안도 고려의 수도인 개경(개성)으로 오게 되었지요.

최승로는 부모님께서 부처에게 열심히 기도 드려 얻은 귀한 아이였어요. 어려서부터 똑똑하고 영특했으며 책 읽기를 좋아했어요. 그는 개경 지방에서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어요. 마침 그 소문이 태조 왕건에게까지 전해졌지요.

왕건을 깜짝 놀라게 한 최승로는 원봉성에 들어가 유학자들에게 교육을 받았어요. 원봉성은 임금의 명령이나 알릴 내용 등을 적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이자, 당시 개경의 교육기관이었지요.

최승로는 그곳에서 열심히 공부했어요. 촛불로 어둠을 밝히며 유학 관련 책을 두루 읽었지요. 그는 태조를 비롯한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무럭무럭 성장했어요.

“열심히 학문을 공부해 꼭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해야겠어.”

최승로는 주위에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어려움을 참아가며 공부했지요. 태조의 눈에 띄어 혜종, 정종, 광종을 모시며 나랏일을 했지요. 하지만 그는 한참 일해야 할 청년 시절과 40대까지는 두드러지는 활약을 한 기록은 없어요. 고려 초의 기록은 안타깝게도 거란과의 전쟁 때 대부분 불타버렸거든요. 광종 때는 쌍기를 비롯한 중국에서 온 사람들의 활약이 활발했었지요.

성종의 눈에 띈 최승로

나랏일을 열심히 했던 최승로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어요. 981년 고려 제6대 왕 성종이 왕위에 오르면서죠. 그때 최승로 나이가 쉰 여섯으로 적지 않은 나이였어요. 하지만 학문도 깊을 대로 깊어졌고, 다양한 경험을 해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나이였지요.

고려는 광종 때 과거제 등 여러 가지 제도가 마련되면서 고려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안정된 듯 보였어요. 하지만 진정한 안정은 아니었지요. 강력한 왕의 힘으로 호족 세력을 억눌렀으니 말이에요. 광종이 죽은 뒤 다시 혼란이 찾아왔어요. 성종은 나라 질서를 바로 잡을 방법에 대해 고민했어요. 그리고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렸지요.

“5품 이상 관리들은 누구든 나랏일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적어 나에게 올리시오.”

최승로는 오랫동안 고민해온 개혁안을 담아 글을 올리기로 마음먹었어요.

“훌륭한 왕이 되려면 앞선 왕들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해야 하지. 옳지, 다섯 분의 왕들에 대한 글을 올려야겠군.”

  

최승로는 앞선 다섯 왕들의 본받을 점과 고쳐야할 점을 적은 글을 올렸어요. 사실 이런 글을 쓰려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어요. 자칫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거든요. 하지만 진심을 다하면 뜻이 통하는 법, 성종은 최승로의 글을 읽고 뿌듯해했어요.

“이 글은 좋은 왕이 되려면 어떠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있는 글이오. 그대는 충성스런 신하라 할 만하오”

“전하, 저는 태조부터 경종까지 다섯 왕을 모셨습니다. 앞선 왕들이 행한 정치를 거울삼아 겸손하고 덕을 베푸는 어진 임금이 되시옵소서.”

성종은 최승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를 믿음직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말이에요.

28개조의 개혁안을 올리다

최승로는 또 새로운 국가를 만들 수 있도록 28개조의 개혁안도 올렸어요. 이를 시무 28조라고 해요. 시무란 지금 당장 해결해야할 일이란 뜻이에요. 오늘날에는 28개조 개혁안 중 22개조만 전하고 있어요.

  

시무 28조는 유교를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이 강조된 개혁안이었지요. 성종은 최승로가 올린 시무 28조를 보고 무척 기뻐하며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하나하나 시행해 나갔지요.

최승로는 왕이 광종처럼 너무 강한 힘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왕과 신하가 조화로워야 나라가 안정된다고 했어요. 무엇보다 연등회, 팔관회 등 큰 불교 행사를 줄여야 한다고 했고요. 이러한 행사를 치르느라 백성들은 동원되어 갖가지 일을 해야 했고, 이는 엄청난 부담이었지요. 또 승려들이 함부로 궁궐에 드나들지 못하게 하고 절도 허락 없이 짓지 못하게 했어요.

왕은 지방 세력들이 마음대로 세력을 휘두르지 못하고 협조하도록 관리를 보내 다스리게 했어요. 왕을 대신해 관리들이 백성들을 잘 보살피도록 하였죠. 또 유교를 강조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도록 했어요.

<개혁안을 올리는 최승로>   

성종은 최승로의 도움을 받으며, 유교 정치의 기틀을 다잡았어요. 덕분에 나라 질서가 잡히고,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안정되어 갔지요. 성종은 최승로를 가까이 두고 무척 아꼈어요. 높은 관직도 내렸어요. 그때 최승로는 예순이 넘은 나이였지요.

“전하, 신 이제 나이가 많아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합니다.”

“무슨 소리요? 내 곁에서 나를 더 도와주시오. 관직을 내놓다니 안될 일이오.”

성종은 그의 뜻을 받아들여주지 않았어요. 하지만 몇 년 뒤 최승로는 세상을 떠났어요. 아끼던 신하를 잃은 성종은 무척 슬퍼했다고 해요.

최승로가 성종과 함께 한 기간은 채 10년도 안 돼요. 하지만 둘이서 만들고 싶어 했던 고려의 모습이 비슷했기에 서로를 의지하며 여러 가지 개혁 정치를 펼칠 수 있었던 거예요. 많은 업적을 남기며 나라의 기틀을 다진 성종 옆에 명재상으로 불리는 최승로가 함께 있었던 거지요.

최승로가 죽은 뒤에도 성종은 고려의 정치 질서를 굳건히 하며, 유교 사회의 기틀을 마련했지요. 이후 고려에서는 유교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는 전통이 계속되었고, 이 전통은 조선으로도 이어졌어요.

[집필자] 황은희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