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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 삼국사기를 편찬하다

<한성백제박물관(서울 송파구)>   

“학자들도 우리 역사를 잘 모르니 참으로 안타깝소. 우리 역사를 담은 제대로 된 역사책을 만들어 주시오.”

“신 김부식, 온 정성을 다해 우리 역사책을 쓰겠습니다.”

김부식이 쓴 역사책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이 책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까요?

과거에 급제하고 송에 사신으로 가다

김부식의 증조할아버지는 신라 왕실의 후손이에요. 증조할아버지는 고려가 세워진 이후 경주 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리가 되었죠. 김부식의 아버지 때에야 고려 중앙 관직에 진출해 개경(개성)에서 살게 되었지요.

김부식은 몸집은 크고, 검은 얼굴에 눈이 튀어나왔다고 전해요. 열네 살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셔 그와 형제들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지요. 그런데도 4형제 모두가 과거에 급제했어요. 그의 어머니는 훌륭한 어머니로 칭송 받았고, 왕은 매년마다 곡식을 내렸지요.

과거에 급제한 김부식은 점점 높은 벼슬을 하게 되었지요. 두루 공부해 학문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고요. 1116년에는 송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지요. 그는 여러 달 동안 송에 머물며 송 황제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기도 했어요.

묘청의 난을 진압하다

과거에 급제한 이후 주요 관직을 역임하고 있던 김부식이 더욱 두각을 나타나게 된 사건이 있었어요. 바로 묘청의 난 때였어요.

묘청의 난은 묘청, 조광 등을 중심으로 하는 서경(평양) 지역 출신들이 일으킨 난이에요. 이들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명당인 서경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주장했어요.

김부식은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면 금이 스스로 항복해 오고, 주변 서른여섯 나라가 머리를 조아릴 것’이라는 묘청의 주장이 현실성이 없다고 여겼지요. 김부식이 송에 사신으로 다녀온 경험이 당시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금이 동북아시아 강자로 성장하고 있던 상황이니 고려를 지키기 위해서는 금을 받들고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김부식의 출정>   

묘청 세력이 난을 일으켰을 때 이를 진압한 사람이 바로 김부식이에요. 묘청의 주장에 반대했던 대표적인 인물이지요. 그는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군대를 이끌고 가 묘청 등 서경 세력을 1년 여 만에 진압했어요.

묘청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서경으로 가기 전 김부식이 먼저 제거한 사람이 있어요. 바로 정지상이에요. 정지상은 김부식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묘청을 인종에게 소개해 주었고,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건의했지요.

정지상은 글재주도 뛰어났어요. 그가 지은 시는 아름답고 수준이 높았어요. 문장가로도 이름 높았던 김부식과 정지상은 라이벌 관계였어요.

묘청의 난까지 진압한 김부식은 공신으로 인정받았어요. 높은 벼슬에 오르며 승승장구 했지요. 그는 고려 최고의 실력자로서 권력을 누리게 되었어요.

벼슬을 내려놓다

묘청의 난 때 김부식을 도와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있어요. 바로 별무반을 조직해 여진을 정벌한 윤관의 아들 윤언이지요. 그런데 윤언이는 늘 김부식에 좋지 않은 마음을 품고 있었어요. 왜 그랬을까요? 바로 아버지와 김부식이 얽힌 일 때문이었지요.

의천이 세상을 떠난 후 세운 대각국사비의 비문을 윤관이 쓰게 되었지요. 그런데 윤관이 지은 글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지 못했어요. 그러자 왕은 김부식을 불러 다시 쓰라고 했지요. 그는 사양하지 않고, 단번에 비문을 쓰겠다고 했어요. 그러자 윤관은 무척 서운하고 언짢았어요. 이야기를 전해들은 윤언이도 김부식의 무례한 행동에 화가 났고요.

어느 날 김부식이 국자감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어요. 강의를 듣던 윤언이는 김부식에게 앙갚음 하고 싶었어요. 그는 김부식이 진땀을 흘릴 정도로 어려운 질문을 퍼부었지요. 윤언이의 행동은 김부식을 건드렸어요. 그런데다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부하인 윤언이가 총사령관인 김부식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이 생각한 방식대로 난을 진압했거든요.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진압한 후 윤언이마저 제거하려 했어요.

“윤언이는 정지상과 손잡고 서로 죽기를 맹세하고 뜻을 같이 한 사람입니다. 왕께서 서경에 가셨을 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황제라 칭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이는 금을 몹시 노하게 하는 일이며, 그 틈에 자기와 뜻이 같지 않은 사람들을 제거하고 반역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김부식은 이러한 행동이 신하로서 할 짓이 아니라며 윤언이를 몰아세웠지요.

윤언이가 연호를 사용하고 황제를 칭할 것을 주장한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가 정지상과 뜻을 같이하며 서경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주장하지는 않았어요. 김부식이 꼬투리를 잡아 복수한 셈이지요. 윤언이는 결국 지방관으로 쫓겨났어요. 이렇듯 권력자가 된 김부식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냉정히 제거해 버렸지요.

하지만 몇 년 뒤 윤언이는 자신의 억울함을 담아 왕에게 글을 올렸어요. 윤언이는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높은 관직을 얻었지요. 윤언이가 돌아오자 김부식은 벼슬을 내려놓았어요. 어쩌면 윤언이의 보복이 두려워서였는지도 모르죠. 사실 김부식은 이미 일흔에 가까운 노인이었어요. 이제는 조정에서 물러날 때가 되기도 했던 거지요.

『삼국사기』를 완성하다

인종은 관직에서 물러난 김부식에게 명령을 내렸어요.

“역사책을 만들어주시오. 그대를 도울 젊은 학자들을 보내 주겠소.”

인종은 고려의 학자들이 유교 경전과 중국 역사는 잘 알고 있으나,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어요.

“삼국의 역사가 중국 책에 기록되어 있지만 대강만 기록되어 있고, 자세하지도 않소. 우리 옛 기록들은 내용도 빈약하고 표현도 좋지 않소. 무엇보다 왕과 신하, 백성의 잘잘못을 가릴 수 있는 규범은 어디에도 없소. 규범을 기록해 후세에 교훈이 될 수 있도록 하시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역사책 편찬이라는 큰일을 맡게 된 김부식은 무척 기뻤어요. 3년여 동안 능력 있는 젊은 학자들과 함께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일에 열심이었지요. 드디어 1145년에 『삼국사기』 50권을 완성했어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쓴 이유는 당시 상황과 관련 있어요. 당시 고려는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다소 어수선한 상황이었지요. 이전 역사를 정리하며 자신들의 역사를 확인하고,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확립하여 고려 왕조의 안정을 꾀하려고 했던 거예요.

『삼국사기』는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랜 된 역사책으로 그 가치가 높아요. 이전에 쓰인 역사책들과 중국의 여러 책들을 참고해 쓴 책이에요. 삼국 시대의 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고요.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신라의 정통성을 고려가 이었다고 생각했어요. 충, 효를 중요시한 유교적인 생각도 짙어요.

무엇보다 『삼국사기』는 신비로운 측면을 강조하기 보다는 객관적인 내용을 합리적으로 서술하려고 했지요. 이러한 역사 서술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역사 서술 방식이었어요.

중국 역사책 서술 방식인 기전체를 따라 썼는데, 황제들의 역사를 다루는 ‘본기’에 삼국 왕들이 한 일을 기록했지요. 중국 문화가 넘쳐나는 속에서도 독자적인 자아의식을 표현하려고 한 것도 의의가 있고요. 하지만 가야와 발해의 역사를 다루지 않고 삼국의 역사만 다룬 점 등 아쉬운 점도 있어요.

『삼국사기』가 완성 된 후 130여 년 뒤 승려 일연이 『삼국유사』를 썼어요. 이 책에는 승려 이야기, 탑이나 절에 얽힌 이야기 등 불교 이야기가 많아요. ‘단군 이야기’ 등 전설이나 신화, 풍속, 노래 등 일반 백성들이 살았던 모습을 알 수 있는 이야기들도 담겨 있고요. 그래서 『삼국사기』와 함께 우리 역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지요.

<김부식과 일연의 차이>   

김부식은 송나라 사신 서긍으로부터 "널리 배워 아는 것이 많고, 기억력이 뛰어나 글을 잘 짓고 예와 지금의 일을 잘 알아 학사들이 믿고 따르기를 능히 그보다 앞 설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이에요. 유교를 중요시하고 중국을 지나치게 받들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현실적인 생각을 지닌 유학자로 우리 문화를 발전시킨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답니다.

[집필자] 황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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