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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쌍성총관부를 되찾다

<공민왕과 노국공주>   
국립고궁박물관

“왕후! 짐이 원을 멀리한다면 왕후는 어찌하시겠소?”

“저는 원의 공주가 아니라 전하의 아내입니다. 전하의 뜻에 따를 것입니다.”

“저는 원의 공주가 아니라 전하의 아내입니다. 전하의 뜻에 따를 것입니다.”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이 왕은 누구일까요? 그는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일들을 했을까요?

고려, 원의 간섭을 받게 되다

1231년 고려는 또다시 외적의 침입을 받아요. 이번에 쳐들어 온 외적은 몽골이죠. 고려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면서까지 몽골군에 맞서 저항했지만 계속되는 몽골군의 공격에 고려는 그만 강화를 맺고 말았어요(1259년). 이때부터 고려는 몽골이 중국 땅에 세운 ‘원’의 간섭을 받게 되요. 원 간섭기에 고려의 왕조는 유지되고 있었지만, 고려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지요.

원은 고려의 동북쪽에 관청(쌍성총관부)을 설치해 직접 다스렸어요. 고려 영토 일부를 원에게 빼앗긴 것이죠. 또 고려 국왕도 원에 의해 결정되었어요. 죽은 후 짓는 왕의 이름도 원에 충성한다는 뜻으로 ‘충’자를 붙여 직접 지어서 주었지요(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등).

더 큰 문제는 원이 고려에 수시로 각종 공물을 보내라는 요구였어요. 그때마다 힘없는 고려는 어쩔 수 없이 원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고, 고려의 살림살이는 매우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어요.

공물보다 더 슬픈 것은 공녀였어요. 당시 부모들은 자신들의 딸이 공녀로 몽골에 끌려가지 않게 하려고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딸을 혼인시키기도 하였지요.

한편 고려 안에는 이러한 원의 막강한 힘을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는 지배층들이 생겨났어요. 이들을 ‘권문세족’이라 불러요. 권문세족은 대농장을 중심으로 부와 세력을 키웠어요. 그들의 횡포로 나라의 곳간은 비어갔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어요.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하다

고려의 국운이 쇠하고 있던 1352년, 원에 볼모로 끌려간 지 10년 만에 공민왕이 왕이 되어 고려로 돌아왔어요. 공민왕은 약해진 고려를 다시 일으키고자 개혁의 칼을 빼들었어요.

그러기 위해 우선 고려는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야만 했지요. 그래야 왕의 권위도 되찾고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어요. 마침 공민왕이 왕위에 오를 즈음 원은 그 세력이 점차 약해지고 있었어요. 이때가 원의 간섭을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공민왕은 판단했지요.

<몽골풍으로 옷을 입은 고려 관리들>   
국사편찬위원회

공민왕은 우선 고려 본래의 풍속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하였어요. 당시 고려의 귀족들은 몽골식 머리 모양과 복장을 앞 다투어 따라했지요. 관리들도 원의 전통 모자인 ‘발립’을 쓰고 다녔어요. 결혼할 때 여자들이 얼굴에 찍는 연지, 곤지, 그리고 머리에 쓰는 족두리도 몽골 풍습이었어요.

몽골의 풍습을 따라 해서 힘 있는 몽골 사람처럼 보이고자 했던 거예요. 공민왕은 당시 고려에 유행하였던 몽골식 변발과 호복을 벗어버리는 것을 시작으로 원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개혁을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어요.

친원 세력을 제거하고 개혁을 이어가다

물론 공민왕의 이러한 개혁에 원을 따르던 세력들은 불안해했어요. 하지만 그들이 의지했던 원은 국내 사정으로 고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요. 이에 기철 등 원을 따르는 무리는 공민왕을 먼저 없애고자 하였어요.

자신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미리 알아챈 공민왕은 이를 빌미로 원을 따르는 무리들을 모두 제거해 버렸어요. 방해를 일삼던 무리가 없어지자 공민왕의 개혁에는 거침이 없었어요.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는데 중심 역할을 했던 정동행성이란 기관을 폐지하였어요. 정동행성은 원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이에요.

하지만 일본 정벌에 실패한 이후에는 고려의 정치를 간섭하는 기관으로 계속 남아 있었어요. 공민왕은 이러한 정동행성을 폐지함으로서 원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것이에요.

이어 원의 연호 사용을 폐지하였고, 원의 간섭으로 바뀌었던 각종 왕실의 제도를 원래대로 되돌렸어요.

쌍성총관부를 공격하다

국내 문제를 해결한 공민왕은 원에게 빼앗긴 고려의 영토를 다시 찾고자 하였어요. 대표적으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원에게 빼앗겼던 철령 이북의 땅을 되찾았지요.

쌍성총관부는 고려가 원에 맞서 한창 싸우던 1258년에 설치되었어요. 몽골군이 동여진을 공격하다가 지금의 함흥 지방에 이르렀을 때, 그 지역 주민이 고려 정부에 반란을 일으켜 원에 투항하였어요. 이에 원은 이 지역에 쌍성총관부를 두고 직접 통치하였어요. 그렇게 하여 고려를 견제함은 물론 동북면의 여진족까지 통제하는 효과까지 노렸지요.

고려는 그동안 여러 차례 이 지역을 다시 찾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어요. 그러다 원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이용해 공민왕은 쌍성총관부를 공격하도록 했어요. 쌍성총관이었던 조소생 등이 강하게 저항하였지만, 그들 내부에 있던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무너뜨릴 수 있었지요. 이어 고려는 여세를 몰아 함경도 내륙 지방까지 진출하였어요.

마침내 1356년 고려는 쌍성총관부를 완전히 차지할 수 있었어요. 원에게 빼앗긴지 무려 100년 만에 영토를 되찾았던 것이죠.

<공민왕 시기 고려의 영토>   

공민왕과 함께 고려 개혁이 멈추다

힘차게 고려를 개혁해 가던 공민왕의 앞길을 가로막는 일이 벌어졌어요. 북쪽으로는 홍건적이, 남쪽으로는 왜구가 고려를 침략해 온 것이에요. 홍건적은 원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일어난 한족의 농민 반란군이었어요. 원의 군대에 쫓겨 홍건족이 고려의 국경을 넘어 개경까지 침입해 오자, 공민왕은 멀리 안동까지 피란을 가기도 하였어요.

왜구는 일본의 해적으로, 일찍부터 물자가 풍부한 해안 지방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였어요. 공민왕 때에는 왜구에게 강화도까지 약탈당했고, 개경까지 위협을 받을 정도였어요. 두 외적의 침입으로 고려는 큰 혼란을 겪었어요.

외적의 침입보다 공민왕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은 황후 노국공주의 죽음이었어요. 노국공주는 공민왕이 볼모로 원에 끌려갔을 때 만나 결혼을 했어요. 결혼 후 함께 고려에 온 노국공주는 공민왕이 외롭고 힘들 때 늘 곁을 지켜주던 사람이었어요. 공민왕이 매우 사랑한 노국공주가 아기를 낳다 죽고 말았어요.

노국공주가 죽고 의욕을 잃은 공민왕은 승려 출신의 신돈에게 개혁을 이어가도록 하였어요. 신돈은 공민왕의 기대에 부흥해 새로운 관청을 만들어 지배층이 부당한 방법으로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었어요. 처음엔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았고, 개혁도 성공하는 듯 했어요. 하지만 신돈도 점차 권력층을 닮아 부패해 갔고, 공민왕의 믿음도 잃어 결국 처형되고 말았어요.

신돈의 죽음과 함께 공민왕의 개혁도 끝이 났어요. 하지만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 다시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려던 공민왕의 노력은 길이 남을 업적이라 할 수 있지요.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무덤 옆에 자신의 무덤을 만들었어요. 죽어서도 노국 공주와 함께 있고 싶었던 거예요. 혼란한 시대 속에서 함께 의지하며 어려움을 헤쳐 나갔던 두 사람은 무덤 속에서 무든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요?

<공민왕릉(개성 개풍군)>   
국사편찬위원회

[집필자] 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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