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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홍산에서 왜구를 물리치다

<홍산대첩비(충남 부여군)>   

“폐하, 신이 비록 늙었으나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는 쇠하지 않았습니다!”

“장군의 뜻은 잘 아나 어찌 그 몸으로 험한 전쟁터를 견디겠소?”

“하루하루 왜구를 피해 목숨을 연명하는 백성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구하다 전쟁터에서 죽는다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보내주십시오.”

늙은 나이에도 군사를 이끌고 가 왜구를 물리치겠다고 거듭 요청하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어떤 활약을 펼칠까요?

고려, 왜구의 침입으로 골머리를 앓다

고려는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심각한 골머리를 앓고 있었어요. 고려 말에 접어들어 왜구의 노략질은 갈수록 심해졌지요. 왜구는 해안가에 불쑥 나타나 식량을 빼앗고, 사람들을 잡아가고, 물자를 약탈했어요. 나중에는 아예 해안에서 떨어진 마을의 집과 관아를 습격해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어요.

왜구의 노략질 때문에 해안가 마을을 내륙으로 옮기는 경우도 있었어요. 심지어 한반도의 남쪽뿐만 아니라 북쪽에 있는 평안도, 함경도 일대까지도 왜구의 침입을 피할 수 없었어요.

당시 왜구는 도적떼 수준을 넘어서 체계적으로 무장을 하고 조직된 일종의 군대였지요.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가 날로 커져 갔어요. 왜구로 인해 나라의 앞날이 위협받는 상황이 되자, 고려 조정은 군대를 움직여 왜구를 소탕하고자 했어요. 이때 왜구를 물리치는데 큰 활약을 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 최영이었어요.

1376년 왜구가 서해안에 상륙해 부여로 쳐들어왔어요. 왜구는 부여와 공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약탈을 했지요. 그리고는 다시 연산(지금의 논산 지역)의 개태사로 이동했어요.

당시 왜구는 배를 돌려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위장해 관군을 감쪽같이 속였어요. 그리고는 몰래 용맹하고 날랜 왜구 수백 명을 내륙 깊숙이 보내 계속 노략질을 하였어요. 그러나 왜구가 가는 곳마다 소문을 듣고 용감하게 이들을 막고 나서는 자가 없었어요.

특히 홍산(지금의 부여 지역)에 이르러 백성들을 마구 죽이고 사로잡으니 왜구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어요. 왜구를 막으러 보낸 관군마저 왜구에게 패했고, 심지어 왜구에 맞서다 지휘관이 말에서 떨어져 죽는 일도 있었어요. 고려군의 연이은 패배로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어요.

최영, 늙은 나이에도 군사를 이끌고 출병하다

이 소식을 들은 최영은 스스로 출정할 것을 요청하였어요. 하지만, 우왕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최영을 말렸어요. 그러나 최영은 의지를 굽히지 않고 왕에게 말하였어요.

“폐하, 저 보잘것없는 왜구들이 저리도 잔인하고 사납게 이 나라를 짓밟고 있으니 지금 나아가 제압하지 않으면 훗날 물리치기가 더 어렵습니다. 만약 다른 장수를 보내신다 해도 반드시 이길 수 없으며 군사도 평소에 훈련하지 않아 소용이 없습니다. 신이 비록 늙었으나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쇠퇴하지 않았으니, 원컨대 하루라도 빨리 휘하들을 거느리고 나아가 저 왜구들을 격퇴하게 해주십시오.”

거듭된 최영의 요청에 왕은 마침내 허락하였어요. 최영은 머뭇거림 없이 군사를 이끌고 왜구가 있는 홍산으로 갔어요.

홍산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다

최영이 도착한 곳은 험하고 좁은 지형이었어요. 게다가 삼면이 모두 절벽이고 오직 한길로만 지나갈 수 있었어요. 여러 장수들과 군사들은 두려워하여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어요. 지형으로 보아 혹시 왜구가 몰래 숨어 있을까봐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때 최영은 몸소 군사들 앞에 서서 용맹하게 나아갔어요. 최영의 칼에 쓰러지는 왜적이 마치 바람에 쓰러지는 풀과 같았다고 해요.

<고려시대의 갑옷(전쟁기념관)
쇄자갑은 철사를 고리 모양으로 만들어 엮은 갑옷이고, 경번갑은 철판과 철사를 결합하여 만든 갑옷이다.>   

바로 그때였어요. 숲 속에 숨어있던 왜적 한 명이 최영을 향해 화살을 쏘았어요. 하필 그 화살은 최영의 입술을 맞추었어요. 최영의 얼굴은 곧 피로 뒤범벅이 되었지요. 하지만 최영은 태연히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자기를 쏜 왜구를 쏘아 쓰러뜨리고, 자신의 입술에 맞은 화살을 뽑았지요.

이 광경을 지켜본 왜구들은 기겁하였어요. 왜구의 기세는 확 꺾였고, 우리 군사의 사기는 크게 높아졌어요. 최영은 더욱 앞서 나갔고, 뒤이어 고려군이 사나운 기세로 공격하였어요. 마침내 최영은 왜구를 크게 격파하여 거의 다 죽이거나 사로잡았어요. 1376년 최영이 충청남도 지방을 휘젓고 다니던 왜구를 홍산에서 격파하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여 이를 ‘홍산대첩’이라 불러요.

이때부터 왜구들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자는 백발의 최영뿐이다.”라고 할 정도로 최영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고 해요. 이후 왜구의 기세는 점점 약해지기 시작하였지요. 그리고 최영은 고려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고려를 지키는 버팀목으로 우뚝 서게 되었지요.

이성계에 의해 처형되다

전쟁터를 주름잡던 최영은 문하시중이라는 최고의 관직에 올랐어요. 이때 중국에서 새로 등장한 명이 공민왕 때 원에게서 되찾은 철령 이북의 땅을 문제 삼고 나왔어요. 원을 명이 차지했으니 원의 땅이었던 철령 이북의 땅도 명의 땅이라는 주장이었어요. 명의 어처구니없는 주장에 크게 화가난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장하였어요. 요동은 옛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죠. 최영은 이 기회에 요동을 다시 찾고자 했어요.

최영은 총사령관이 되어 이성계에게 5만 명의 군사를 주며 요동을 점령하라 지시하였어요. 그런데 요동을 공격하러 가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와 최영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어요. 안타깝게도 최영은 이성계에 의해 경기도 고양으로 귀양을 간 후 역모 죄로 처형되었지요.

최영은 다음과 같이 유언하며 최후를 맞이하였어요.

내가 탐욕스러운 마음이 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다.

이후 실제로 그의 무덤에는 풀이 자라지 않았고, 사람들은 최영의 무덤을 적분(붉은 무덤)이라 불렀지요. 혼란한 고려 말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했던 충신 최영 장군은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어요.

늙은 몸을 이끌고 외적을 물리친 최영! 그는 명이 아직 혼란스러운 때를 노려 요동을 다시 찾고자 했지요. 만약 그의 뜻대로 이성계가 요동을 정벌했다면 또 어떤 역사가 만들어졌을까요?

<최영 장군의 묘(경기 고양시)>   

[집필자] 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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