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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훈민정음을 창제하다

<집현전(서울 종로구)>   

“전하! 어찌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오랑캐가 되려 하십니까?”

“오랑캐라니요?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는 것은 국왕이 할 일! 내 앞 길을 막지 마세요!”

많은 신하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글자를 만든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왜 새로운 글자를 만들었을까요?

조선의 네 번째 왕이 되다

태조 이성계가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들과 함께 조선을 건국하였어요. 그런데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일어났어요. 조선 건국에 공이 많았던 이방원은 공신 명단에 오르지 못했어요. 게다가 막내였던 이복 동생(방석)이 세자가 된 것에 이방원은 불만이 무척 컸어요.

이방원은 결국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들을 동원해 정변을 일으켰어요. 그리고 정도전과 세자 방석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했지요. 이를 ‘왕자의 난’이라 해요. 이후 이방원은 결국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태종이에요. 태종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자 하였어요.

태종의 뒤를 이어 세종이 왕이 되었어요. 태종의 셋째 아들인 세종은 아버지의 경우와 달리 정변 없이 평화롭게 왕위를 이어받았지요. 덕분에 세종은 훨씬 더 평화롭고 안정된 방식으로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었어요.

1420년, 세종은 왕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학문과 나라의 정책을 연구하는 집현전을 설치하였어요. 집현전 학사는 과거에 합격한지 얼마 되지 않은 젊고 유능한 사람들 가운데 선발했어요.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이 일정기간 동안 집현전에서만 근무하도록 하여 전문성을 쌓을 수 있게 했어요. 집현전을 통한 인재 양성과 더불어 세종은 농업을 장려하고 다양한 천문 과학 기기를 개발하여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했어요.

삼강행실도를 편찬하다

세종이 왕이 되고 10년이 되던 해에 진주에서 김화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어요.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세종은 이런 사건을 막기 위해서는 유교 덕목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어요. 그리고 충효사상이 담겨 있는 책들을 간행하여 백성들에게 전파하고자 했어요.

세종은 『효행록』과 같은 책을 펴내 백성들이 이를 읽고 깨우치기를 원했어요. 그러나 한자로 쓰인 책을 백성들이 읽고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쉽게 내용을 알 수 있게 충신, 효자, 열녀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고 간단한 설명을 써 넣은 『삼강행실도』라는 책을 편찬했어요. 그리고 전국에 보급하였지요.

<삼강행실도>   
국립중앙박물관

새로운 글자를 연구하다

백성을 사랑하는 세종의 마음은 마침내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데까지 이르렀어요. 세종은 백성들이 한자라는 배우기 어려운 글자에 막혀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까웠어요. 급기야 모든 백성이 읽고 쓸 수 있는 글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새로운 글자를 만든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우선은 글자를 만드는데 필요한 음운학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확보해야 했어요. 그리고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것이 당시의 중국을 따르는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신하들의 반대도 극복해야했어요.

세종은 먼저 집현전 학사였던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음운학을 연구하게 했어요. 그리고 중국에 사신으로 간 집현전 학사들에게는 언어 연구에 필요한 책들을 구해오게 하였지요. 또한 명의 학자로부터 음운학과 관련된 학문을 배워오게 하였어요. 마침내 세종은 학사들이 구해 온 책에 담겨 있는 지식을 토대로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훈민정음을 만들다

왕이 된지 26년이 되던 해인 1443년에 세종은 오랜 연구와 실험을 거쳐 드디어 조선의 글자를 만들었어요. 세종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란 뜻으로 그 글자의 이름을 ‘훈민정음’이라고 불렀지요.

“백성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말과 어우러지는 글자가 없고, 중국의 한자는 어려워 백성들이 자신의 뜻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새로이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다.”

<훈민정음 해례본>   
국사편찬위원회

훈민정음을 백성들에게 보급하려 하자 우려했던 대로 조정 신료들의 반발이 빗발쳤어요. 그 중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라는 사람이 학사들을 대표로 한글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어요.

최만리의 주장은 새로운 글자를 제작하고 사용하게 되면 결국 중국을 멀리하게 된다는 것이었어요. 예로부터 글자를 만들어 사용하는 나라는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진 등으로 이들은 중국 중심의 가치를 신봉하지 않는 나라였다는 것이에요.

조선은 새롭게 나라를 건설하고 모든 제도를 유교적 가치에 따라 정비하고 있는데, 글자를 만들어 사용하게 되면 결국 유교적 가치를 포기하게 된다는 것이었어요. 유학자들 또한 쉬운 언문만을 습득하고 학문에 필요한 어려운 한자를 배우려 하지 않아서, 결국 조선이 목표로 하는 유교 국가를 만들 수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세종은 최만리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어요. 새로운 글자를 만든 목적은 백성들이 쉽게 글자를 익히도록 하기 위해서인데, 결과적으로 백성들이 유교적 가치를 쉽게 이해하여 유교 국가를 더 빨리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이었어요.

언문은 모든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해 만든 글자인데, 백성을 편안케 하는 일은 성군이 해야 할 마땅한 일이오.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백성이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 효자, 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인데 이를 어찌 오랑캐의 짓이라 할 수 있겠소?

결국 세종은 신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하여 전국에 널리 알렸어요. 그리고 훈민정음으로 된 책들을 편찬하여 새로운 글자가 보다 완벽한 문자가 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어요.

훈민정음 창제는 단순히 중국의 문자인 한자를 조선의 문자인 훈민정음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었어요. 보다 중요한 사실은 훈민정음의 보급으로 아녀자와 노비들까지 글을 깨우치기 시작했다는 것이에요. 이제 새로운 글자로 소통하기 시작한 조선의 백성들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게 되었어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 민족의 새로운 글자를 만들었던 세종대왕! 지금도 한글은 배우기 쉽고 활용성이 높은 과학적인 글자로 세계 사람들이 감탄하고 있어요. 만약 한글이 없었다면 우리 민족의 생활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은 우리가 사랑하고 아낄 수밖에 없는 우리의 문화유산이 아닐까요?

[집필자] 신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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