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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예술적 재능을 꽃피우다

<오죽헌(강원 강릉시)>   

“어머 닭이 그림 속 벌레를 콕콕 쪼고 있네.”

“얼마나 벌레를 잘 그렸기에 닭이 그림을 쪼을 수가 있지?”

“누가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거지?”

초충도라는 그림 속 벌레를 진짜로 착각한 닭이 부리로 쪼아대자 사람들은 모두 놀라워했어요. 과연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누구일까요?

여자도 교육을 받으며 꿈을 키워야 한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신사임당이에요. 1504년 신사임당은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어요. 사임당이란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을 스승으로 본받고자 이름 대신에 지은 호에요. 아쉽게 신사임당의 진짜 이름은 전해지지 않아요.

다른 아버지들과 달리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여자들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자식 교육에 힘을 쏟았어요. 사실 조선 시대에는 여자 아이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이 드물었어요. 여자 아이들은 글을 배우는 대신 바느질이나 집안 일 등을 배웠어요. 여자는 그저 시집가서 남편을 돕고 아이를 잘 키우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신사임당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자도 글을 익히고 책을 읽어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밝히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덕분에 신사임당은 남자 아이들과 똑같이 글을 배우고 다양한 교육을 받으면서 자신의 꿈을 키워갈 수 있었어요.

“이 그림을 우리 아이가 그리다니!”

“이런 재주를 그냥 묵혀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아암, 아이가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해 줍시다.”

신사임당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어요. 가족들과 친척들은 신사임당이 그린 그림과 글씨를 보면서 감탄했어요.

치마에 포도송이를 그려주며 예술을 나누다

신사임당은 열아홉 살 때, 서울에 사는 이원수라는 선비와 결혼을 했어요. 결혼 후 신사임당은 친정인 강릉과 서울을 오가며 두 집안의 살림을 도맡았어요. 결혼 후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자 강릉에서 삼년상을 치르고 또 홀로 계신 나이 많은 친정어머니를 돌보기 위해서였죠. 힘겹게 두 집안의 살림을 도맡느라 바쁜 중에도 신사임당은 꾸준히 그림을 그렸어요. 그런 신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이 빛을 발휘한 순간이 있었어요. 바로 마을 잔칫날이에요.

“아이고, 이를 어쩌나.”

“잔칫집에 온다고 치마를 빌려 입었는데 이렇게 더럽혔으니…”

“저런 정말 비싼 옷감인데, 잔치 한 번 보러 왔다가 큰 빚을 지게 되었네!”

잔치에 온 한 여인의 치마에 음식 국물이 튀어 여기저기 얼룩졌어요. 신사임당은 그 여인을 달래며 말했어요.

“치마를 벗어서 이리 건네주세요.”

사람들은 신사임당의 이야기를 들으며 당황했어요. 도대체 어쩌려고 치마를 벗어 달라고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에요.
신사임당은 붓과 먹을 준비해달라고 했어요. 이에 평소 신사임당이 뛰어난 그림 실력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여인에게 치마를 건네라고 했어요. 그리고 신사임당은 정성스럽게 먹을 갈아 치마폭에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치마에 그림을 그리는 신사임당>   

사람들은 그림을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와, 저것 봐!”

“더러운 자국이 어느새 멋진 포도송이로 바뀌었네!”

구정물로 엉망이었던 치마가 어느새 멋진 포도 치마로 바뀌었어요. 치마가 망가져 눈물을 흘리며 어쩔 줄 몰랐던 여인은 신사임당에게 거듭 인사를 하면서 너무 고마워했어요.

풀과 벌레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담아 그림을 그리다

신사임당은 주로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과 벌레들을 많이 그렸어요. 사실 그 까닭은 신사임당이 살던 당시 시대 상황 때문이었어요. 신사임당이 살던 조선 사회에서는 여자는 남자들처럼 자유롭게 다니거나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가 적었어요. 하지만 신사임당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어요.

“하찮아 보이는 풀과 벌레들도 자세히 보면 얼마나 예쁘고 아름다운데!”

신사임당은 이런 작은 생명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직접 그림으로 담아냈어요. 이런 노력들이 쌓여 치마폭에 아름다운 포도송이를 멋지게 그릴 수 있었던 것이에요. 실제로 신사임당이 그린 풀과 벌레들은 마치 살아 숨 쉬는 것 같았어요.

<신사임당이 그린 초충도>   
오죽헌시립박물관

어쩌면 너무 평범하고 흔해 눈길을 주지 않았던 풀과 곤충들이 그림의 주인공이 되었어요. 그림들을 한 번 살펴보세요. 바로 눈앞에 생생하게 나비와 가지 등이 있는 것만 같아요. 이는 신사임당의 따뜻한 마음과 예술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시대를 앞선 여성으로 자리한 신사임당

신사임당은 그림 활동 같은 예술 분야만 아니라 남편과 자식들에게도 정성을 다했어요. 신사임당은 율곡 이이를 비롯해서 일곱 명의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언제 어디서나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도록 격려했어요. 무엇보다 본인 스스로가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일을 꾸준히 하면서 자식들에게도 모범을 보였어요. 몸소 행한 가르침 덕분에 신사임당의 뜻에 맞게 자식들 모두 훌륭하게 성장하였어요.

“저도 어머니처럼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그래, 붓을 들고 네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림을 그려 보거라.”

신사임당의 첫째 딸 매창은 어머니를 보면서 자신의 꿈을 키웠어요. 신사임당 역시 부모님이 그러하였듯 남녀 차별 없이 자식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게 하였어요. 이에 신사임당의 자녀들은 저마다 소질을 키우며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었어요. 이 중에서 특히, 셋째 아들 율곡 이이는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로 성장했어요.

오늘날 우리들에게 신사임당은 현명한 어머니이자 어진 아내를 나타내는 ‘현모양처’의 상징처럼 되었어요. 전세계에서도 사실 어머니와 아들이 동시에 화폐에 주인공이 된 경우는 찾기 힘들어요. 이 정도로 신사임당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어요.

<이이와 오죽헌이 그려진 오천원권>   

우리는 흔히 ‘현모양처’하면 현명한 어머니에 착한 아내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신사임당이 살아 온 삶을 보면 그저 자식과 남편만을 위하는 것이 현모양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건네주는 자주적인 여성으로 살았기 때문이에요.

작고 하찮은 풀과 벌레들에도 애정을 갖고 예술 활동을 펼쳤던 신사임당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어떨까요?

[집필자] 배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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