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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꿈꾸다

<자운서원(경기 파주시)>   

“어제 밤 신기한 꿈을 꾸었어요.”

“도대체 무슨 꿈인데?”

“강릉 앞바다가 소용돌이를 치는데 그곳에서 검은 용 한 마리가 불쑥 솟아올라 제 방으로 들어왔어요.”

뱃속에 아이를 가진 엄마와 그 친정어머니는 이야기를 하면서 분명 이 꿈은 태몽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과연 이 아이는 누구일까요?

오죽헌의 신동으로 자라다

이 아이가 율곡 이이에요. 이이는 1536년 외가가 있던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어요. 이이의 어머니는 바로 신사임당으로 이이가 태어난 방을 현룡실이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검은 용(현룡)이 들어왔다는 꿈 이야기가 바탕이 된 것이지요.

용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이이는 어려서부터 아주 영특했어요. 하루는 이이의 외할머니가 석류를 보면서 외손자에게 이야기했어요.

“이것이 무엇 같으냐?”

“석류 껍질 속에서 붉은 구슬이 부서지는 것 같아요.”

이이에게 말과 글을 가르쳐주었던 외할머니는 깜짝 놀랐어요. 세 살 어린아이인 이이가 옛 시로 척척 답변을 했기 때문이에요.

아이는 과거시험의 첫 단계인 소과에 도전했어요.

“너무 어린 나이에 시험을 보는 것이 아닌가?”

“한 번 도전해보겠습니다.”

시험장에서 사람들은 어린 나이에 시험을 보러 온 이이를 보면서 수군거렸어요.

“아직 공부를 더 해야 할 나이인데, 과거부터 보다니?”

그런데 며칠 후 발표장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당시 이이가 열세 살이란 어린 나이에 소과 생원시에서 최고 성적을 거둬 장원을 차지한 거예요.

스스로 경계하여 평생 공부의 뜻을 세우다

이이는 소과에 합격한 후에도 겸손하게 꾸준히 공부를 이어갔어요. 특히, 몸소 바른 길을 삶으로 보여주는 어머니 신사임당을 잘 따르고 극진하게 모시며 효심을 다했지요.

그런데 이이에게 큰 시련이 생겼어요. 어머니 신사임당이 병을 얻어 그만 돌아가신 거예요. 16살의 이이는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았어요. 이이는 어머니 묘소에서 3년 동안 어머니를 기리면서 슬퍼했어요. 이 과정에서 이이는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다 1554년 금강산에 있는 절에 들어가 불교 공부를 했어요.

그렇게 금강산에 들어가 그동안 갈고 닦은 성리학과 불교를 함께 공부하면서 생각을 키우고 성장해 나갔어요. 금강산에서 1년 동안 깊이 생각하고 공부하다가 마침내 이이는 외할머니가 계신 오죽헌 외가로 내려가기로 결심했어요. 그리고 자기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글인 ‘자경문’을 썼어요.

뜻을 크게 품고 성인을 본받되, 조금이라도 부족한 점이 있다면 더욱 노력해야 한다.

자경문은 모두 11가지로 되어 있는데 그 동안 방황했던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다짐한 것이었지요.

이후 이이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며 꾸준히 공부에 힘쓰며 지냈어요. 1557년 이이는 결혼했어요. 결혼 후 이이는 성주 처가에서 그해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 강릉 외가로 가기 전, 나라에서 손꼽히는 큰 스승을 찾아뵈었어요. 바로 퇴계 이황 선생이에요.

<이황과 이이의 만남>   

퇴계 이황 선생은 당시 58세로, 조선의 대학자로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어요. 이황 선생은 23세의 젊은 이이와 만나면서 35살이라는 나이차에 상관없이 학문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두루 나누었어요. 사흘 동안 이이는 이황 선생의 집에서 머물며 큰 배움을 얻을 수 있었어요.

이 만남을 계기로 이황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12년 동안 두 사람은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았어요. 두 사람은 편지로 조선 시대 성리학을 크게 발전시켰어요. 편지에서는 학문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서로의 안부 등을 주고받으며 나이를 초월한 멋진 만남을 이어갔어요.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쳐가다

이이는 29세에 드디어 과거시험의의 꽃인 대과에까지 장원으로 합격했어요. 이이는 소과인 생원시와 진사시부터 대과에 이르기까지 각종 시험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했어요.

“평생 한 번도 합격하기 힘든 과거 시험에 아홉 번이나 장원으로 급제하다니, 과연 구도 장원공일세!”

사람들은 저마다 이이를 칭찬했어요. 구도 장원공은 아홉 번이나 장원한 분이라는 뜻이에요.

이후 관리 생활을 시작한 이이는 출세보다는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하겠다는 마음으로 지냈어요.

“자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나 오래된 문제점들을 지적하면 오히려 자네가 힘들어질 수 있네.”

“아닐세, 이런 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가 온전히 지탱될 수 있겠는가?”

<과거에 아홉 번 합격한 이이>   

이이는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서 임금님께 잘못된 일을 일삼는 신하를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렸어요. 이에 임금이었던 명종은 잘못을 일삼은 신하를 물러나게 하고 이이를 칭찬했어요.

이이는 이후 1568년 중국 명나라로 가는 사신으로 뽑혀 북경에 갔어요. 그곳에서 학문을 통해 나라의 명예를 크게 떨치며 명나라에 깊은 인상을 남기고 돌아왔어요.

“전하, 바른 정치를 펼쳐서 백성들을 두루 살피소서.”

이이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사회개혁을 이뤄가고자 했어요. 이이는 명종에 이어 임금에 오른 선조에게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바치며 백성들이 고통 받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어요.

백성이 도망가면 이웃이 대신 세금을 내야하고 친척이나 이웃이 내지 못하면 동네 사람들이 세금을 내야 한다. 그 피해가 동네로 퍼지다 보니 너도나도 도망을 가 버려 동네에 남아나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낼 수 있는 세금만 거두도록 하고 세금을 낼 수 없는 백성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이는 이후 선조에게 긴 상소문을 올렸어요. 상소문에는 당시 조선의 현실을 비판하고 조선이 새로운 나라로 거듭나기 위해 필요한 개혁 정책을 제시하였어요. 하지만 당시 이이가 올린 개혁 정책을 조정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오히려 이이를 모함하며 괴롭히는 관리들이 목소리를 높였어요, 이이의 개혁 정책이 자신들의 이익과 어긋났기 때문이에요.

그래도 이이는 포기하지 않고 『성학집요』라는 책을 임금에게 지어 바치며 임금이 유교적 정치 이상으로 나라를 바르게 이끌어가기를 바랐어요.

이이는 제자들을 키우는 교육활동에도 힘을 쏟으며 여러 책들을 펼쳐내고 또 생활 속에서 성리학을 실천하는 것에 힘을 다했어요. 벼슬에서 물러나 교육과 사회 활동에 힘쓰던 이이는 49세 되던 해 안타깝게도 과로로 숨을 거두었어요.

뛰어난 재능을 갖고 태어났지만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며 스스로를 경계하며 세웠던 약속을 지켜갔던 이이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많은 가르침을 건네줘요.

이이가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약속을 떠올려보면서 여러분이 지금 스스로에게 할 약속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이이 집안 묘역(경기 파주시)
신사임당과 이이의 묘가 함께 모셔져 있다. 사진 가장 앞이 이이의 부모(이원수와 신사임당) 묘이며, 가장 뒤쪽이 이이와 부인의 묘다.>   

[집필자] 배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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