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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조선의 바다를 지켜내다

<한산도(경남 통영시)>   

“장군! 일본군이 조총이란 화약무기를 앞세워 우리나라를 쳐들어왔다 하옵니다.”

“군선도 많지만 해적질로 단련된 일본군을 막기에는 우리 수군의 힘이 부족합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 오자 이순신의 고민은 커져 갔어요. 이순신은 강한 일본 수군에 맞서 적은 수의 수군으로 어떻게 싸웠을까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다

1592년 4월 일본군 20만이 바다를 건너 조선을 침입해 왔어요. 조선이 건국된 지 200여 년 이래 가장 큰 외침이었지요.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에게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이틀 만에 함락되었어요. 오랜 평화에 방심하고 있던 조선군이 조총으로 무장한 수많은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지요.

선조는 급히 신립에게 정예 기병 8,000명을 주며 일본군을 막을 것을 지시했지만 충주 탄금대에서 그만 전멸하고 말았어요.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한 달이 되지 않아 한양을, 두 달 만에 평양성을 점령하였어요. 일본군의 빠른 진격에 놀란 선조는 명과 가까운 압록강변의 의주로 피신하였어요.

일본군은 오랜 전쟁으로 단련되어 있었고, 이런 일본군을 막을 조선군군은 찾기 힘들었어요. 그때 멀리 남해에서 조선군의 첫 승전보가 전해졌어요.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는 기쁜 소식이었죠.

임진왜란이 있기 1년 전 이순신은 전라좌수사가 되었어요. 이순신은 싸움을 좋아하는 섬나라 일본의 수군이 강할 것을 예상하여 좌수사가 되자마자 착실하게 전쟁을 대비하였어요. 그는 준비된 자만이 승리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무기와 군량미를 모으고, 판옥선과 거북선을 건조하였어요. 이순신의 노력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좌수영의 수군은 20여 척의 판옥선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어요.

<거북선 건조>   

옥포 바다에서 첫 승리를 거두다

부산진과 동래성을 점령한 왜적이 계속 북상하고 있을 때, 경상우수사 원균은 남해현 앞바다에 피신해 있었어요. 원균은 옥포가 전라도와 충청도에까지 이르는 해로의 목줄임을 깨닫고 부하 장수를 이순신에게 보내어 적의 상황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였어요.

이순신은 대형 전선인 판옥선 24척, 중형 전선인 협선 15척, 소형 어선인 포작선 46척, 모두 85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여수의 전라좌수영을 출발하여 당포 앞바다에서 원균의 경상우수영의 함대(판옥선 4척, 협선 2척)와 합류하였어요. 포작선이란 당시 어선인데 수적으로 불리한 조선 수군이 마치 큰 함대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사용했어요. 일종의 위장전술이었지요.

<조선 수군의 활약>   
경남 고성 당항포 해전관

낙동강 하구의 가덕도로 이동하던 연합 함대는 음력 5월 7일 정오 무렵에 옥포에 정박 중인 일본 수군의 배들을 발견하였어요. 왜선 50여 척은 홍백기를 달고 해안에 흩어져 있었고, 왜적들은 포구로 들어가 노략질을 하고 있었어요. 조선 수군을 발견한 왜적들은 우왕좌왕 어쩔 줄을 모르면서 바삐 배를 타고 노를 저어 바다 한가운데로 나왔죠.

이순신은 왜군들이 배에 모두 탑승할 때까지 기다렸어요. 왜선이 바다 가운데로 나오자 그때 함대에 공격 명령을 내렸어요. 조선 수군은 일자진을 펴 일본 수군의 퇴로를 봉쇄하고 총통과 화살로 공격을 했어요. 판옥선에서 쏘아댄 총통에 의해 왜선이 하나둘씩 침몰하기 시작하였어요.

조선 수군의 기습 공격에 전열을 갖추지 못한 일본 수군은 모두 26척이 격침되었고, 몇 척은 조선 수군의 포위망을 뚫고 부산 쪽으로 도망을 쳤어요. 그리고 나머지는 배를 버리고 해안에 상륙하여 산 속으로 도주하였지요. 일본 수군은 4,000여 명이 전사한 반면 조선 수군은 한 명만 부상당한 완벽한 승리였어요.

<이순신 함대의 격전지>   

옥포 해전을 시작으로 이순신과 연합 함대는 경상도의 앞바다를 휘젓고 다니면서 일본 수군을 차례로 격파해 나갔어요. 조선 수군은 한 번도 일본 수군에 지지 않았어요. 사천, 당포, 부산포 등 경상도의 앞 바다에서는 일본 수군의 배를 찾아보기가 어려웠지요.

한산도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치다

조선 수군의 승리 중 가장 큰 전투는 한산도 앞바다에서 일어났어요. 일본 수군은 해전에서의 계속된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병력의 수를 늘렸고, 함선 70여 척을 견내량에 정박케 하였어요. 견내량은 통영과 거제도 사이의 좁고 긴 수로로 폭이 넓은 곳도 600m를 넘지 않았어요. 게다가 암초가 많아 판옥선이 움직이면서 전투를 벌이기에는 알맞지 않았지요.

이순신은 먼저 판옥선 5~6척을 견내량으로 보냈어요. 일본 수군을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내기 위한 미끼였어요. 일본군은 조총을 쏘며 판옥선을 공격하였어요. 조선 수군은 패한 척을 하며 일본 수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조끔씩 유인해 나갔어요.

넓은 바다로 나온 일본 수군은 50여 척의 조선 수군 본진을 보고 함정에 빠졌음을 알아챘어요. 일본군이 당황해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조선 수군은 판옥선을 빠르게 돌려 학익진을 폈어요. 순식간에 일본 수군의 배들을 포위한 거지요. 그리고 총통을 동시에 쏘아댔어요. 거북선은 일본 수군의 배들 사이를 돌진하여 진영을 흩뜨려 놓았고요.

<한산도 대첩과 학익진>   

일본군 함선은 판옥선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어요. 그래서 판옥선에 배를 붙이고 올라타 공격을 하는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어요. 그러나 먼 거리에서 쏘아대는 조선군의 총통에 판옥선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일본군 함선은 하나둘 파괴되어 침몰되었어요. 급기야 목숨을 건진 몇몇 일본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 버렸지요.

한산도 앞바다는 부셔진 일본 수군의 배 파편들과 시체들로 가득 찼어요. 일본 수군은 59척의 배를 잃었으나, 조선 수군은 판옥선과 거북선을 한 척도 잃지 않은 대승이었어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찔러 승리하였다고 하여 이를 ‘한산도 대첩’이라고 불러요(1592년).

한산도 대첩 이후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조선 수군 전체를 지휘하였어요. 한산도에서 패배한 일본 수군은 바다에서의 전투를 포기하였어요. 결국 남해를 돌아 서해로 나아가 일본 육군과 합류하려던 계획도 물거품이 되었지요. 평양성까지 점령했던 일본군도 바다로의 보급이 끊겨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어요. 한산도 대첩으로 조선을 차지하고 명으로 가려던 일본의 계획이 실패하게 된 것이지요.

강한 일본군에 맞서 이순신은 철저한 준비와 전략으로 해전에서 연전연승했어요. 한산도에서 크게 승리한 이순신은 또 어떤 전투를 치뤘을까요?

[집필자] 신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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