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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조선의 천재 여류 시인으로 이름을 떨치다

<허난설헌 생가(강원 강릉시)>   

“유성룡 대감! 제 누님이 지은 시들을 시집으로 내려고 하는데, 읽어보시고 시집의 머리글을 지어 주시겠습니까?”

“허균! 진정 이 시들을 자네 누이가 지은 것인가? 정말 훌륭하네. 일반 여성이 지은 시가 아닌 것 같네.”

조선 시대 유명한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유성룡이 극찬한 이 시인은 누구였을까요? 그녀가 지은 시들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을까요?

글 한 편으로 여자 신동으로 불리다

허난설헌은 1563년 강원도 강릉에서 당대 유명한 학자였던 허엽의 3남 3녀 가운데 다섯 번째로 태어났어요. 첫째 오빠는 나중에 이조판서를 지낸 허성이었고, 둘째 오빠는 글을 잘 짓는 문장가로 유명한 허봉이었으며, 남동생은 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었어요. 이처럼 허엽과 그의 자식들은 뛰어난 글솜씨로 유명해서 ‘허씨 5문장’이라고 불렸어요.

허난설헌이 살았던 조선 시대는 남자들이 우대받는 사회였기 때문에 여자들은 자유롭게 공부하거나 사회 활동을 하지 못했어요. 또한 남편 뒷바라지와 자식들을 잘 키우는 것이 여자들이 해야 할 최고의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여자아이들도 마찬가지였지요. 친구도 마음대로 못 보고, 길거리에 나가서 뛰어놀지도 못했어요. 또, 먼 곳으로 자유롭게 여행도 가지 못하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도 쉽지 않았지요.

그러나 허난설헌은 어릴 때 오빠와 동생과 함께 글을 배웠어요. 그녀는 기억력이 좋고 어린 나이에도 글을 잘 써서 자주 가족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했어요. 특히, 8살 때 지었다고 하는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이라는 글을 본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어요.

상량문은 집을 지을 때 대들보(건물을 지을 때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지지대)를 올리며 건물이 잘 지어지기를 바라며 쓰는 글이에요. 허난설헌은 신선 세계에 있는 상상의 궁궐인 광한전 백옥루의 상량식에 자신이 초대받았다고 상상하면서 이 글을 지었어요.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은 당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며, 멀리 중국에까지 전해졌어요.

“정말 이 글을 여덟 살짜리 꼬마 아이가 지었단 말인가? 그것도 여자아이가?”

딸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허엽은 직접 글을 가르치고 서예와 그림도 가르쳤어요. 또한 여동생을 위해 허봉은 자신의 친구이자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유명한 이달을 허난설헌과 허균의 선생님으로 모셨어요. 이달의 가르침 덕분에 그녀의 글솜씨는 나날이 늘었어요. 이처럼 허난설헌은 그녀의 재능을 인정해주는 가족들 덕분에 마음껏 재주를 펼치면서 행복한 삶을 살았어요.

<강원도 강릉에 있는 허난설헌이 태어난 곳>   

남장하고 남편 될 사람을 직접보다

허난설헌이 열다섯 살 때였어요. 아버지가 딸의 결혼을 주선했어요. 물론 딸의 의견을 묻지 않았어요. 조선 시대에 여성들은 남편의 얼굴도 모른 채 부모님이 정해주시는 남자와 결혼해야 했어요. 그러나 허난설헌은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아버님! 저는 제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습니다.”

“아니,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남편 될 사람을 우리 집에 초대해 주시면, 제가 몰래 훔쳐본 다음에 마음에 들면 결혼을 하겠습니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아버지 허엽은 양반 명문가끼리의 결혼이므로 상대방 집안에 예의 없는 행동을 할 수 없다고 했어요. 결국 딸의 간청을 뿌리친 허엽은 혼자서 30리 떨어진 마을까지 가서 예비 사돈집을 찾아갔어요. 그리고 예비 사위인 김성립을 보았어요.

그의 나이는 허난설헌보다 한 살 위였지요.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웬 남자 노비가 들어왔어요. 김성립의 집안사람들은 모두 허엽이 데리고 온 노비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허엽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 남자 노비는 바로 그녀의 딸 허난설헌이었거든요.

당시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집안의 여성이 예비 시댁을 사전 답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크게 망신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결혼도 없던 일이 될 수 있을 만큼 문제가 커질 수 있었거든요.

<남장을 한 허난설헌>   

허엽은 그날 만난 예비 사위 김성립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러나 허난설헌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어요. 그러나 허엽은 딸의 뜻을 무시하고 결혼을 강하게 추진했고, 결국 허난설헌은 김성립과 결혼하게 되었어요.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다

열다섯 살에 결혼하여 오빠와 동생 곁을 떠난 허난설헌은 남편 김성립에게서 사랑 대신 질투와 미움을 받았어요. 시를 잘 짓고 아는 것이 많은 아내가 부담스러웠던 거지요. 또한 그녀의 시어머니도 아들이 며느리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며느리를 구박했어요.

김성립은 집 안에 있기 보다는 술집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했어요. 하루는 김성립이 친구들과 서당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김성립의 친구가 허난설헌을 찾아 왔어요. 또 술집에서 김성립이 놀고 있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허난설헌은 친구 편으로 술과 안주를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시 한 구절을 써서 보냈어요.

“낭군님께서는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찌 된 사람이길래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는가.”

허난설헌은 딸과 아들을 각각 한 명씩 두었는데, 남편과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자식들에게 사랑과 정성을 쏟으며 이겨냈어요. 또한 시를 짓는 일에 몰두하며 슬픈 마음을 달랬어요.

뿐만 아니라 허난설헌은 세상의 힘들고 외롭게 고통받는 다른 여성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시로 나타냈는데, ‘빈녀음(貧女吟, 가난한 여자의 노래)’이라는 작품이 대표적이에요.

가난한 여자의 노래
얼굴 맵씨는 남들만 못하지 않고
바느질에 길쌈 솜씨 모두 좋건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자란 탓으로
중매할미 발을 끊고 몰라라 하네.
춥고 굶주려도 얼굴에 내식치 않고
하루 종일 창가에서 베를 짜나니,
부모님이야 안쓰럽다 여기시지만,
이웃이야 그런 사정 어이 알리요.
밤 깊어도 짜는 손 멈추지 않고
짤깍 짤깍 바디 소리 차가운 울림,
베틀에 짜여 가는 이 비단 한 필 필경
어느 색시의 옷이 되려나?
가위로 싹둑싹둑 못 마를 제면
추운 밤에 손끝이 호호 불리네,
시집갈 옷 삯바느질 쉴 새 없건만
해마다 독수공방 면할 길 없네.

이 시는 추운 겨울에 손을 곱아가며 옷을 짓는 여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어요. 허난설헌은 이 시를 통해 가난해서 외롭게 살 수 밖에 없는 여성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고 있지요. 이처럼 허난설헌은 서정적인 시풍으로 외로운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세상의 다른 여성들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어요.

그러던 중 불행이 연이어 그녀에게 찾아왔어요. 1580년 그녀의 나이 18세 때, 아버지 허엽이 경상도관찰사로 일하던 중에 병을 얻어 상주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녀의 불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그렇게 애지중지 기르던 그녀의 딸과 아들이 전염병으로 죽고 말았어요. 사랑스런 자식을 하늘나라로 보낸 허난설헌은 다음의 시를 지었어요.

아들딸을 여의고서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잃고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소.
슬프디 슬픈 광릉 땅에 두 무덤이
나란히 마주보고 서 있구나.
백양나무 가지에는 쓸쓸히 바람 불고
솔숲에선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지전을 날리며 너의 혼을 부르고
네 무덤 앞에다 술잔을 붓는다.
너희들 남매의 가여운 혼은
밤마다 서로 어울려 놀고 있을 테지.
비록 뱃속에 아이가 있다지만
어찌 제대로 자라나기를 바라랴.
하염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며
피눈물 슬픈 울음을 속으로 삼킨다.

허난설헌은 딸과 아들의 무덤을 자신이 사는 광릉 땅 양지바른 언덕에 나란히 만들고 나서 낮은 봉분에 잔디를 심고 어루만졌어요. 훗날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두 아이의 무덤 뒷자리에 묘를 써달라고 했어요.

그녀의 불행은 연이어 찾아왔어요. 임신 중이던 배 속의 아이까지 유산하고 말았어요. 그런데도 남편 김성립은 아내 허난설헌에게 정을 주지 않고 밖으로만 돌아다녔어요. 허난설헌의 마음의 병은 깊어만 갔어요.

불행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달아 터지면서 그녀를 아프게 했고 힘들게 했어요. 그녀의 어머니가 전라도를 여행하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리고 얼마 후 자신의 재능을 끔찍이 아꼈던 오빠 허봉이 율곡 이이를 비판하다가 멀리 귀양을 가는 처지가 되었어요.

허봉은 2년 뒤 풀려나 백운산, 금강산 등지로 방랑 생활을 하며 술로 세월을 보냈어요. 그러다 병이 들어 서울로 돌아오다가 도중에 죽고 말았어요. 친정 집안의 연이은 불행을 바라보는 허난설헌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여성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인 억압과 불행했던 남편과의 결혼 생활, 시어머니의 학대와 두 자녀를 잃은 슬픔, 몰락하는 친정에 대한 안타까움 등으로 허난설헌의 상심이 얼마나 컸을지는 그 시대를 살지 않았어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는 삶의 의욕을 잃었어요. 그리하여 더욱 감상과 한에 빠졌어요. 한번은 그녀 자신의 세 가지 한탄을 노래했다고 해요.

“첫째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요, 셋째는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불행한 것이다.”

1589년 초 그녀의 나이 27세 때였어요.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갑자기 몸을 씻고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사람들에게 유언과 같은 시를 남겼다고 해요.

금년이 바로 3·9수에 해당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것 같은 시를 남긴 허난설헌은 얼마 후 방 안에 가득했던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불태우게 했어요. 그리고 친정에 있던 자신의 작품도 모두 불태우라는 유언과 함께 1589년 3월 19일 한양 자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어요. 이렇게 시대를 잘못 만난 조선의 천재 여류 시인은 미처 자신의 재능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어요.

중국과 일본에까지 천재 여류 시인으로 이름을 떨치다

누나의 죽음을 듣게 된 허균은 강릉 집에 있던 허난설헌의 시를 찾았어요. 다시 한번 누나의 시를 읽은 허균은 유언대로 불태우기에는 너무나 아깝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강릉 집에 있던 허난설헌의 시와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허난설헌의 시까지 정리하였어요. 이후 허균은 허난설헌의 시를 모은 『난설헌집』을 펴냈고, 이때 당대 유명한 학자였던 유성룡에게 시집의 머리글을 부탁했어요.

임진왜란 중에 명나라 사신이 왔다가 허균을 만나게 되었고, 허균을 통해 허난설헌의 시를 알게 되었어요. 이 사신이 중국에 돌아가서 조선의 시를 소개한 『조선시선』을 펴냈어요. 『조선시선』에 있던 조선의 시들 중에서 특히 허난설헌의 시가 큰 인기를 끌었어요. 이후 1606년 조선을 방문한 명 사신은 허균부터 찾았어요.

“당신의 누나인 허난설헌의 시를 좀 더 볼 수 있습니까?”

“여기 누나의 시를 모은 시집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시를 보신 후에 마음에 드시면 제 누나의 시집을 중국에서 펴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아니! 이렇게 인간의 감정을 솔직하면서도 애틋하게 표현한 시는 난생처음 봤습니다.”

<난설헌집(허균허난설헌기념관)>   

당시 명 사신에 의해 중국에 알려진 『난설헌집』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어요. 이후 조선에 온 명 사신들은 앞다투어 허난설헌의 시집을 구해달라고 아우성이었어요. 명을 이어 중국을 차지한 청 때도 허난설헌의 시는 여전히 큰 인기를 끌었어요. 그녀의 시를 암송하는 것이 유행할 정도였어요.

그뿐만 아니라 청 황제까지 허난설헌의 시집을 조선에서 구해달라는 요청을 했어요. 허난설헌의 시는 중국뿐만 아니라 1711년 일본에서도 『난설헌집』이 출판되어서 큰 인기를 끌었어요. 이후 일본의 여성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지요

허난설헌은 조선 시대에 태어난 뛰어난 여류 시인이었어요. 비록 남성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여러 불행을 겪으며 자신의 재능을 꽃피워보진 못했지만, 끊임없이 시를 쓰며 이를 극복하고자 했어요. 비록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는 못했지만, 결국 죽은 뒤에 그의 작품들은 한국, 중국,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지요.

여러분들도 지금의 괴로움에 너무 슬퍼하지 말고, 훗날을 기약하며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길 바라요. 언젠가는 그 노력이 좋은 평가를 받을 날이 올 거예요.

[집필자] 방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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