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미있는 초등역사
  • 조선
  • 박지원
  • 연암 박지원, 열하까지 다녀오다

연암 박지원, 열하까지 다녀오다

<연암물레방아공원(경남 함양군)>   

“자네, 요즘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열하일기』라는 책을 읽어 보았는가?”

“물론이네. 한양에 모르는 사람이 있겠는가? 놀랍더군. 난 이 책을 읽고 청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네.”

“그나저나, 이 책을 쓴 박지원은 대단하지 않은가? 그 먼 열하까지 직접 다녀와 책을 썼다니 말일세.”

박지원은 왜 당시 청의 수도인 연경(북경)까지 가서, 또 열하까지의 먼 길을 갔을까요? 또 『열하일기』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요?

연암, 우여곡절 끝에 압록강을 건너다

박지원은 한양의 백탑 부근에 살면서 박제가, 홍대용 등과 교류하였어요. 사람들은 이들을 ‘백탑파’라 불렀어요. 연암은 이들과 함께 과거를 통한 출세보다 백성들의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하였어요.

그러던 중 뜻밖의 좋은 소식이 전해졌어요. 친척 중 한 명이 청의 황제 칠순 잔치 축하 사신단 대표로 임명된 것이에요.

“그동안 고생했으니 넓은 세상을 보며 잠시 머리나 식히게.”

“고맙습니다, 형님. 그렇지 않아도 청에 꼭 가고 싶었는데”

연암에게 일생에 한번 올까 말까 한 중국 여행의 기회가 찾아 왔어요. 연암은 왜 청에 가고자 하였을까요? 이제 연암 박지원과 함께 청으로 가는 길을 떠나 볼까요?

<박지원의 연행길>   

연암 박지원은 여행 준비에 가슴이 설레었어요.

“말안장에 주머니 한 쌍을 달아서 왼쪽은 벼루, 오른쪽은 거울, 붓 두 자루, 먹, 작은 공책 네 권, 여행 지도를 넣자.”

초여름 무더위 속에 여행은 시작되었어요. 출발부터 만만치 않았지요. 처음으로 길 들판에서 잠도 자고, 비와 맹수 소리에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 일쑤였어요. 의주에 도착하였지만, 아직 압록강도 건너지 못하고 있었지요.

“장마로 강물은 불고 물살은 거세어 강을 건너지 못합니다.”

오늘은 강을 건널 수 있을까? 걱정은 되었지만 이제 어쩔 수 없이 무리를 해서라도 강을 건너야 할 형편이었어요. 일행은 우여곡절 고생 끝에 청으로 떠나는 배에 올라 거센 물살을 뚫고 강을 건넜어요. 마침내 한양을 떠난지 한 달 만에 압록강을 건넌 것이지요.

지금이야 단 2시간이면 갈 수 있는 중국이지만, 박지원이 살았던 시대에는 목숨을 걸어야 가능한 일이었어요. 갈 길은 멀고, 날은 덥고, 갑자기 후회가 연암에게 밀려왔어요.

“왜 나는 굳이 이런 힘든 여행길을 나선 것일까?”

사실 연암은 이미 청을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와 글들을 통해 더 큰 세상이 있고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박지원은 청을 잘 배우고 이용하면 조선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였지요.

“그래! 조선보다 수십 년 앞선다는 청의 발전된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빠짐없이 보고 오리라.”

연암은 다시한번 마음을 다지고 여행길에 힘을 내었어요.

벽돌로 지어진 세상을 만나다.

1780년 6월 27일(음력) 압록강을 건너 여행한지 4일째 되는 날이었어요. 연암은 크고 작은 강을 계속 건넌 끝에 청의 국경 관문인 책문(말뚝으로 만든 울타리 문)에 도착했어요.

<벽돌로 지은 집에 감탄하는 박지원>   

국경을 넘자 연암은 충격을 받았어요. 바로 조선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벽돌 때문이었어요. 담장은 벽돌로 쌓았고, 사람 타는 수레와 짐 싣는 수레가 길을 마구 지나고 있었어요. 이곳에서 집을 지을 때 모두 벽돌을 사용하였어요. 네모 반듯한 벽돌은 기계를 이용해 편리하게 만들었어요.

“연경도 여기 시골 변두리보다 더 나을까?”

일행은 구경하다 벽돌을 쌓아 만든 우물을 발견하였어요.

“물 좀 마시고 봅시다. 잉, 우물에 뚜껑이 달려 있네.”

“그러게. 뚜껑이 있으면 사람이 빠지거나 비나 먼지가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겠군. 햇볕도 막아 물도 시원하겠어.”

뚜껑에 도르래도 달아 놓아 온종일 물을 길어도 힘이 들지 않도록 하였어요. 작은 부분이지만 연암은 감동했어요.

“이런 우물 하나에도 이렇게 정성을 쏟으니 백성들이 얼마나 편할까? 우리도 어려운 학문만 할 게 아니라 백성들이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실용적인 학문을 해야 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말아야 할지, 연암은 혼란스러웠어요. 이미 오랑캐로만 여겼던 청은 조선보다 훨씬 앞서 있었어요.

여행 15일째 7월 8일, 연암은 요양에 도착하였어요.

“눈 앞이 탁 트이더니 드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어.”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누비던 바로 요동 벌판이었어요. 이곳에 서니 연암은 이제야 중국 땅을 밟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난생 처음 본 지평선은 매우 큰 충격이었어요. 너무 감격한 나머지 그는 여기야말로 울기 좋은 곳이라 말했어요.

여행 17일째 되는 7월 10일에 연암은 심양에 도착하였어요. 심양은 청의 첫 번째 수도였지요. 소현 세자가 떠올랐어요. 소현 세자가 머물던 때로부터 100여년 뒤 이곳을 찾은 연암. 연암은 세자가 먼 이국에서 조선 신하들과 만나고 헤어졌을 상황들을 떠올리니 마음이 다시 울컥해졌어요.

“어떤 마음으로 머물렀고 어떻게 참았을까?”

<요동 벌판을 바라보는 박지원>   

이번 여행에서 제일 볼만한 것은 무엇인가

여행 30일째 되는 7월 23일, 연암은 산해관에 도착했어요. 산해관은 북경으로 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거대한 성문이었어요.

조선에서는 볼 수 없는 압도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어요. 하지만 연암은 더 이상 단지 눈앞에 보이는 구경거리에 마음을 두지 않았어요. 중국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조선의 선비들은 항상 이렇게 물었어요.

“이번 여행에서 제일 볼만한 것이 무엇인가?”

사람들은 요동의 들판, 산해관, 길거리 상점들 등을 뽑았어요.

하지만 연암의 생각은 달랐어요.

“기와 조각과 똥 부스러기가 가장 볼만 했소.”

<연행도(산해관의 모습)>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깨어진 기와 조각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이에요. 하지만 청의 사람들은 기와 조각 하나라도 그냥 버리지 않고 사용하였어요. 똥 역시 더러운 물건이지만 황금처럼 여기며 사용하였지요. 수레 또한 쓸모가 많은 물건이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왜 수레를 사용하지 않을까? 길이 좁고 험하기 때문이라고? 수레가 다니면 길은 저절로 닦이는 법!”

조선의 선비들은 아직 명을 섬기는 생각에만 빠져 있어 청을 오랑캐라 여기고 낮게만 보았어요. 연암은 이 모든 것이 조선 선비들의 허물이라고 생각하였어요. 선비들이 수레를 만드는 기술이나 움직이는 방법 따위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었지요. 연암은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었어요.

“백성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것이 오랑캐에서 나온 것이라도 본받아야 한다. 무엇이 진정 이로운 것인지 봐야 한다.”

마침내 열하에 도착하다

여행 39일째 8월 1일 연암은 목적지인 북경에 도착하였어요.

“황성 안에는 자금성이 있으며, 주홍색 두길 높이의 담벼락이 17리나 둘러쳐 있고, 지붕에는 금색 유리기와를 덮었다.”

압록강에서부터 수차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온 2000리길.

<연행도(자금성 태화전)>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큰일났습니다! 황제가 북경에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요? 그 먼길을 고생하며 겨우 왔는데 황제가 북경에 없다니요. 사신단에게 다시 만리장성 넘어 북쪽의 열하로 오라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연암은 고민에 빠졌어요. 한 달이 넘는 여행에 이미 지칠대로 지친 상황. 하지만 만리장성 넘어 낯선 세계 열하에 대한 호기심을 거두기 어려웠어요. 다시 힘을 내자.

여행 47일째 되는 1780년 8월 9일, 드디어 열하에 도착했어요. 연암은 북경에서 북동쪽으로 무려 420리(약 164km)나 더 여행을 해야 했어요.

연암이 나흘간 잠도 자지 못한 채 달려온 이곳은 청 황제의 여름 궁전이라는 ‘피서산장’이에요. 입구부터 5개 국어로 적힌 편액이 있고 자금성의 8배인 중국 최대 규모의 황실 정원이었어요.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지요.

청 황제의 칠순 잔치는 조선 사신단 만이 아닌 티벳, 몽골, 러시아 등 동서양의 사신들이 한 자리에 모인 국제적인 잔치였어요. 난생 처음 보는 생소한 외모의 외국인과 기이한 동물들까지, 연암의 눈은 휘둥그레졌어요.

조선 사신단이 하례식 절차를 밟는 동안 연암은 조선에서 본 적이 없는 청의 새로운 문물을 구경하기 바빴어요.

“내 평생 기이하고 괴상한 볼거리를 열하에서 다 보았다. 안타깝다! 대부분 이름도 모르고, 글로 다 기록하지 못하니.”

연암은 청이 이미 문화적으로 과학적으로 굉장히 발달한 제국이라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어요.

연암, 『열하일기』에 자신의 생각을 담다

18세기 이웃 나라 청은 조선에 비해 서양과 교류가 많았어요. 과학 기술 등의 문화도 조선에 비하면 훨씬 앞서 있었지요. 때문에 조선의 선비 박지원은 청을 여행하며 깜짝 놀랄 경험들을 많이 했어요. 우물 안 개구리 같았던 박지원의 시야가 세계를 향해 넓어지는 계기가 되었지요.

박지원은 청을 여행하며 보고 듣고 느낀 점을 글로 남겨 놓았어요. 이 기록이 바로 조선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오랜 세월이 흘러서까지 최고의 여행기로 꼽히는 『열하일기』에요.

“벽돌로 쌓은 담장, 잘 닦여진 도로, 수레를 끌고 가는 청의 사람들처럼 우리 조선도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게 『열하일기』를 써서 알려야겠어.”

<열하일기>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청에 다녀 온 후 박지원은 발달된 청의 문물을 들여와야 한다는 북학 사상을 주장하였어요. 청에서 활발하게 장사를 하는 모습, 또 다양한 규모의 공장에서 물건을 만드는 모습을 보았어요. 그리고 상업과 공업이 농업보다 훨씬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조선도 상공업을 발달시켜 경제가 더욱 활발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지요. 특히 그중에서도 수레의 이용을 강조하였지요.

박지원이 본 새로운 세상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조선 사회는 박지원의 생각대로 변화하였을까요?

[집필자] 조윤호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