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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조선의 부흥을 이끌다

<청계천(서울 종로구)>   

“헐레벌떡~ 자네들, 뭐하고 있나. 임금님이 수원까지 행차하신다네. 벌써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가고 있네. 빨리들 가세.”

“그래 이번에는 혜경궁 마마를 모시고 간다는구먼. 예전과는 전혀 다른 행차가 될 것 같네. 기대되는구먼.”

1795년 한양에서 수원으로 이르는 길이 난리가 났어요. 많은 백성들이 임금님 행차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지요.

행차에 나선 임금님은 어떤 분일까요? 한양에서 수원까지 행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할바마마! 제발 아바마마를 살려 주세요.”

행차의 주인공 정조는 어린 시절 생긴 슬픈 상처가 있어요. 11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인 영조의 명령으로 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 때문이에요. 그만 아버지의 그 비참한 죽음을 눈앞에서 보았던 것이지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장면이 아닐 수 없어요. 아버지가 한없이 불쌍했고, 그만큼 할아버지가 원망스럽고 무서웠지요.

정조는 이 끔찍한 과거를 가슴 깊이 간직한 채 학문에 관심을 갖고 열심히 공부하였어요. 할아버지 영조의 남다른 사랑을 듬뿍 받는 한편, 혹독한 가르침 역시 묵묵히 견뎌 냈지요.

1776년 정조는 24세 나이에 조선의 22번째 임금이 되었어요. 왕위에 오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 눈물이 앞을 가렸어요.

정조는 다시 마음을 굳게 잡고 다짐했어요. 그리고 신하들에게 선포하였어요.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앞장서겠다는 뜻이었어요.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되었던 신하들은 충격에 빠졌어요. 긴장되고 두려웠지요. 하지만 신하들의 걱정과 달리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 특정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겠다는 뜻도 함께 밝혔어요.

규장각을 통해 새로운 인재를 뽑다

나라가 발전시키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총명한 인재를 뽑는 일이었어요. 정조는 어떻게 하면 훌륭한 인재를 찾아내어 나라 운영에 도움이 되게 할까 고민하였어요.

“그래! 예전 세종대왕이 궁궐 안에 집현전을 만들어 학자들을 키워내셨지. 집현전에서 공부한 학자들이 다양한 책도 펴내고 백성들을 위해 훈민정음도 만들었어.”

정조는 새로운 기구를 만들어 학문을 발전시키고 자신을 힘것 도와줄 신하들을 육성하고자 하였어요. 정조는 창덕궁 후원에 커다란 건물을 지었어요. 1층이 ‘규장각’이고, 2층 누각이 주합루에요. 본래 규장각은 왕실도서관의 기능을 하는 곳이었어요.

<창덕궁의 규장각(서울 종로구)>   

“이곳을 새로운 정치의 중심 역할을 하는 곳으로 만들겠다.”

정조는 차츰 규장각을 학문을 연구하고 나랏일을 의논하는 기관으로 변화시켜 나갔어요.

정조는 당파나 신분에 상관없이 재주 있는 젊은 인재들을 선발하여 규장각에서 양성하였어요. 이들 중에는 훗날 대학자로 성장한 정약용 같은 사람도 있었고,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같은 중인 출신도 있었어요.

정조는 젊은 관리들이 규장각에서 재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어요. 이를 초계문신 제도라고 해요. 여기에 뽑힌 사람들은 본래의 일을 면제 받고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었어요. 정조는 이들을 상대로 수시로 직접 강의를 하거나, 심지어 시험을 주관하여 채점하기도 하였어요.

실제 정조는 학식이 뛰어나 이름난 신하라 해도 주눅이 들 정도였다고 해요.

정조의 지극한 관심 속에 성장한 규장각 출신의 관리들은 정조를 도와 새로운 개혁 정치에 앞장섰어요. 또한 정조는 자신을 지지해 주는 이들과 함께 조선의 문예 부흥을 이끌 수 있었어요.

친위 부대 장용영을 만들다

정조는 늘 자신을 지켜 줄 부대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였어요. 정조를 위협하는 무리들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에요. 당시 정조에 반대하는 세력이 각 군영의 부대를 장악하고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정조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무려 7번이나 있었어요. 조선의 임금 중에서 유난히 많았지요.

이런 일이 계속 되자 정조는 강력한 호위 부대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였어요. 이참에 군대도 다시 정비하고자 했어요.

“중앙과 지방의 군영을 축소하고 무예에 출중한 군인들만 모아 하나의 새로운 군대를 만들도록 하여라.”

<정조와 장용영>   

1793년 정조는 ‘장용영’이라는 강력한 친위 부대를 만들었어요. 장용영 덕분에 정조는 안심하고 나랏일을 살필 수 있었지요.

장용영의 군인들은 조총과 검술, 활쏘기를 매일같이 연습했어요. 정조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직접 훈련을 지휘하기도 하였지요. 실제 정조도 활솜씨가 뛰어난 무예의 고수였어요.

“오늘도 과녁에 백발백중이구나. 검술 실력도 많이 늘었어!”

정조는 장용영 군사들과 함께 훈련하며 그들의 뛰어난 능력을 보고 매우 기뻐했어요.

정조는 장용영을 통해 군권을 잡고 안정된 왕권으로 개혁에 더욱 힘을 낼 수 있었지요.

백성들이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게 하다

한양의 중심부인 종로 한복판에서 장사를 하려는 백성들과 이를 막으려는 관리 사이에 작은 소동이 벌어졌어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런 걸까요? 왜 여기에서 장사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요? 조선에는 나라에 물품을 대는 상인들인 시전 상인이 있었어요. 시전 상인 중 비단, 명주, 무명, 모시, 종이, 어물 등 여섯 종류의 중요한 물품을 파는 상인을 특별히 육의전이라 하였어요.

당시 나라에서는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 상인 외에는 서울 도성 안에서 아무나 장사를 하지 못하게 하였어요. 그리고 시전 상인들에게 허가를 받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서울 도성 안에서 장사를 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지요. 이러한 권한을 금난전권이라고 해요.

“나리! 한 번만 봐 주세요. 여기서 장사를 하지 못하면 오늘 우리 가족은 굶어 죽습니다.”

“글쎄, 안된다니까! 이곳에는 나라에서 허가 받은 사람만 장사할 수 있다니까. 썩 꺼지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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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난전권 때문에 시전 상인들은 특정 상품을 독점 판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남겼어요. 그들끼리 담합해서 물건을 팔지 않을 때면, 백성들은 높은 물가와 부족한 생필품으로 큰 고통을 받았지요.

“아무리 법으로 난전을 금한다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법이다. 백성들 모두가 자유롭게 장사를 해야지 몇몇 사람만 장사를 해서 되겠는가? 자세한 사정을 알아봐야겠다.”

정조는 신하들을 몰래 시장으로 보냈어요. 시장 곳곳에서 백성들은 시전 상인들의 횡포에 불만을 터뜨리고 있었지요.

“아니 한 냥짜리 물건을 닷 냥에 팔고, 가짜 물건을 진짜라 속이고, 나쁜 시전 상인들 같으니.”

시전 상인들의 횡포를 보고 받은 정조는 결단을 내렸어요.

“백성들이 장사를 하지 못한다면 이들은 더욱 가난해질 것이다.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없애고.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장사할 수 있도록 하라.”

이러한 정책이 발표되자 시전 상인들은 더 이상 장사하는 백성들을 괴롭힐 수 없었어요. 장사하는 사람들은 많아졌고 시장은 더욱 활성화되었지요. 백성들은 보다 싼 가격으로 물건을 살 수 있었고, 상업은 더욱 발달하게 되었어요.

백성을 위한 새로운 도시 화성을 건설하다

정조가 즉위한지 13년이 되는 해였어요. 그동안 백성을 위해 펼친 여러 개혁 정치로 나라 안팎은 점차 안정되었어요. 백성들도 정조를 성군이라 부를 정도였지요.

그러나 정작 정조는 늘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웠어요. 바로 아버지 사도세자 때문이었어요. 정조는 효심이 매우 깊었어요.

“과인이 처음으로 아버지 묘소를 보았을 때 가슴이 막히고 눈물이 쏟아져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였소. 어찌 그리 작고 형편없이 만들었단 말이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풍수 명당인 수원으로 옮기기로 하였어요. 그러려면 그곳 백성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어요.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어요.

“나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지금 당장 수원부 관아 뒤편 화산으로 옮기도록 하라. 대신 수원부를 팔달산 동쪽 넓은 들판으로 옮겨 백성들의 불편함이 없도록 하라.”

마침내 1789년 사도세자의 묘소가 옮겨졌고, 정조는 새로운 묘소의 이름을 ‘현륭원’이라 하였어요.

“아바마마! 드디어 편안한 곳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정조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비참하게 잃은 후 평생 가슴에 품어야 했던 슬픔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어요.

<수원화성 팔달문(경기 수원시)>   

정조는 수원을 한양 다음으로 큰 도시로 만들고 싶어 했어요. 수원으로 이주하는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고, 수원의 도시 이름도 지위를 높여 화성으로 바꾸었어요.

신도시 수원 화성은 정확한 설계도와 거중기 같은 편리한 기구 덕분에 빠른 속도로 건설되었어요. 일하는 사람들도 일한 만큼 돈을 받았기 때문에 열심히 일했지요. 그 결과 10년 걸릴 것을 예상했던 화성 건설은 1796년, 2년 6개월 만에 끝나게 되었지요. 공사를 하던 1795년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회갑을 맞아 화성으로 대대적인 행차를 하기도 했어요.

정조는 완성된 화성을 보며 다시 한번 자신의 꿈을 다져보았어요.

화성에서 새로운 개혁 정치를 하리라.
내 꿈을 펼치리라.

정조는 효심이 깊고 학식이 뛰어나고 다재다능한 임금이었어요. 무엇보다 백성을 제 몸처럼 아끼고 백성을 위한 개혁 정치를 펼쳤지요. 이러한 정조가 있었기에 조선은 다시 한번 중흥기를 누릴 수 있었어요. 만약 정조가 갑자기 죽지 않았다면 이후 조선은 어떻게 변하였을까요?

<환어행렬도
정조가 화성으로 행차하는 능행은 조상들에게 예를 갖추는 동시에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하나의 국가적 큰 행사였다.>   
국립고궁박물관

[집필자] 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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