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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 농민 봉기의 물꼬를 트다

<순무영진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정에서는 우리 평안도 백성들을 쓸모없는 썩은 흙 취급을 하오.”

“맞소! 오죽하면 세도가의 노비조차 우리들을 보면 천한 노비 대하듯 하겠소.”

“이는 간신배가 임금을 겁박하여 나라를 좌지우지하기 때문입니다. 군대를 일으켜 나라를 다시 바로 세웁시다.”

조선 후기 평안도에 살던 홍경래는 백성들을 모아 봉기를 했어요. 이들이 조선 조정에 맞서 봉기를 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홍경래는 봉기를 통해 어떤 조선을 만들고자 했을까요?

활개 치는 세도 정치, 흔들리는 조선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왕이 되었어요. 힘이 약한 순조를 대신해 왕비의 아버지 김조순이 나라의 중요한 결정을 하였어요. 김조순이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자 중요한 자리는 모두 안동 김씨 가문 사람들로 채워졌어요.

안동 김씨 가문이 권력을 잡자 조선은 위로부터 나라의 기틀이 흔들렸어요. 이들은 관리 임명권을 독차지하고 돈을 받고 관직을 팔았어요. 안동 김씨 가문의 권력자에게 1만 냥을 바치면 지방의 관리가 될 수 있었고, 10만 냥이면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조정의 관리가 될 수도 있었어요.

더 큰 문제는 돈을 바치고 관리가 된 탐관오리들이 그 돈의 몇 배, 몇 십 배를 백성들에게서 빼앗았다는 거예요. 이전에는 없었던 조항을 만들어 세금 걷기, 가짜 장부를 만들어 빼앗기, 적게 빌려주고 많이 돌려받기 등 탐관오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아 갔어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죄 없는 백성들을 잡아다 옥에 가두었어요. 그리고 매질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어요.

안동 김씨 가문의 권력자들과 그들에게 관직을 산 탐관오리가 활개를 치면서 백성들의 삶은 나날이 어려워져만 갔어요. 탐관오리의 횡포에 집과 땅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는 백성들이 늘어났어요. 심지어 산속에 숨어 도적이 되는 경우도 많았어요. 나라의 근본인 백성이 몰락하면서 조선의 질서도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조선에 넘쳐나는 탐관오리>   

차별받는 평안도 백성들

홍경래가 살았던 평안도 지역은 청과 국경을 서로 맞대고 있어 군사적, 외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에요. 이 지역은 국방비도 많이 들어가고, 조선을 찾은 청의 사신을 접대하는 데에도 많은 비용이 들었지요. 그래서 평안도는 한성으로 세금을 보내지 않고 예산을 독자적으로 쓸 수 있어 나름 재정도 넉넉했어요. 또한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광업과 수공업이 발달했고, 특히 청과의 무역을 통해 상업도 발달했어요.

그러나 평안도 지역은 고려시대부터 외적(거란, 몽골, 여진)의 침입이 잦았던 변방지역이었고, 벼농사를 비롯한 농업이 한반도 남쪽 지역에 비해 크게 발달하지 않았어요. 이 때문에 양반 가문이나 관리들이 평안도 지역으로 이주해 살려고 하지 않았어요. 당시 사람들은 평안도 지역을 귀양을 간 죄인과 그의 가족들이나 사는 곳으로 생각했지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은 이렇게 말했어요.

“평안도는 300년 이래 높은 벼슬을 지낸 이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 … 서울 사람은 평안도 사람과 혼인하거나 벗하려 하지 않는다. 평안도에는 이름난 양반 가문이 없고, 양반 가문은 또한 가서 살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평안도 출신이란 이유로 과거 시험에 합격해도 중요한 관직에 오르는 것은 매우 어려웠어요. 지리적 특성 때문에 평안도 사람들은 조선의 다른 지역 사람들에 비해 많은 차별을 받았던 거예요. 어려서부터 유학과 병서를 공부한 홍경래도 과거 시험에 여러 차례 떨어지면서 평안도 출신이 겪는 차별을 직접 느꼈어요.

평안도 사람들도 탐관오리의 횡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어요. 조정에서 임명되어 온 높은 지위의 탐관오리들은 특히 평안도의 부유한 상인들을 노렸어요. 상인들에게 많은 돈을 받고 관청의 하급 관직을 파는 방법을 이용했어요. 상인들이 원하지 않아도 강제로 팔았지요. 또한 관청의 창고가 비면 하급 관리가 된 상인들에게 책임을 떠넘겨 이를 채우게 했어요.

분노하는 백성, 이들을 이끈 홍경래

과거 시험에서 떨어진 후 홍경래는 10년 동안 집을 떠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당시 많은 백성들이 살아남기 위해 고향을 떠나 평안도에 있던 광산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광산으로 내몰린 농민들, 평안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던 사람들, 탐관오리의 횡포에 많은 재산을 빼앗긴 상인들. 이들 마음속에는 세도 정치를 이끌던 안동 김씨 가문과 탐관오리들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어요. 이들은 홍경래와 함께 무너져 가는 조선과 고통 받는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뜻을 함께할 것을 맹세했어요.

1809년, 100년 이래 최악의 가뭄이 전국을 덮쳤어요. 그리고 다음 해도 그다음 해도 가뭄은 계속 되었어요. 어느 고을은 대부분의 토지가 쓸 모 없게 되어 백성들 모두 굶어 죽을 걱정을 했어요. 한반도 서북쪽의 평안도는 상황이 더욱 좋지 않았죠. 흉년이라고 탐관오리의 횡포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러나 조정은 남의 집 불구경하듯이 평안도 백성들을 구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어요.

드디어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한 홍경래는 가족들을 데리고 다복동으로 이사를 하였어요. 그런 다음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던 동지들을 다복동으로 불러 모았죠. 또 주변 고을에 다복동에서 새로 금광을 개발한다고 알려 많은 농민을 모았어요. 다복동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홍경래와 함께 봉기에 참여하였어요.

1811년 12월, 10여 년간 거사를 준비한 홍경래는 마침내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봉기군을 향해 크게 외쳤어요.

<봉기하는 홍경래와 평안도민들>   

“무릇 평안도는 단군 시조의 옛 근거지로 훌륭한 인물이 넘치고 문화와 산업이 번창한 곳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천한 평안도 놈이라 말하며 무시하니 어찌 억울하지 않겠는가.”

“지금 나이 어린 임금이 위에 있어서 세도가의 간신배 무리가 국가의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니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

“이제 세상에 널리 알리니 각 고을의 수령들은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아라. 만약 어리석게도 대항하는 자가 있다면 무찔러 남기지 않으리라!”

거칠 것이 없는 봉기군

출정식을 마친 홍경래는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주변 고을의 관군을 공격했어요. 그리고 이웃 고을을 차례로 공격해 10일 만에 청천강 이북의 7개 고을을 점령했어요.

홍경래는 성을 차지할 때마다 감옥의 문을 열어 억울하게 갇힌 백성들을 풀어주고, 관아의 창고를 열어 가뭄에 지친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어요. 또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봉기군을 엄하게 이끌었어요.

<홍경래의 봉기군이 점령한 지역과 관군의 진격로>   

홍경래가 백성들과 봉기하여 청천강 이북 지역을 단숨에 차지하자 조정은 난리가 났어요. 순조는 신하들을 모아 긴급히 회의했어요.

“평안도의 난은 오랜 흉년과 배고픔에 지친 백성들을 내가 돌보지 않아 생긴 일이오. 하늘이 나를 벌주려 하는구려.”

“전하! 어찌 작은 도적의 무리에 마음을 쓰신단 말씀입니까? 대규모 군대를 보내 단숨에 진압하소서.”

“아니옵니다. 평안도에도 의로운 백성이 있을 것입니다. 소수의 정예병만 보내 의병을 만들어 맞서 싸우게 하소서”

“그대들의 말이 모두 옳다. 현상금을 내릴 터이니 여러분은 힘을 모아 역적의 무리를 모두 없애도록 하시오.”

봉기군의 최후

조정에서는 많은 수의 관군을 모아 평안도로 보냈어요. 여러 고을을 차지한 홍경래의 봉기군은 관군을 기다리며 송림 평야에서 머물고 있었어요. 이곳에서 관군과 피할 수 없는 전투가 벌어졌지요. 전투 초반에는 봉기군이 이기는 듯했어요. 그러나 관군이 봉기군의 후방을 공격하면서 상황이 역전되었어요. 수백의 봉기군이 목숨을 잃었어요. 관군에게 첫 패배를 당한 것이에요.

어쩔 수 없이 홍경래는 봉기군을 이끌고 미리 차지하고 있던 정주성으로 들어갔어요. 정주성을 포위한 관군은 봉기군에게 빼앗겼던 고을들을 하나씩 되찾아갔어요. 이 와중에 죄 없는 많은 백성이 봉기군으로 몰려 또 죽임을 당했어요.

관군에게 포위당한 정주성의 봉기군은 목숨을 바쳐 성을 지켜냈어요. 관군은 ‘윤제’라는 높은 사다리차를 이용하여 성을 공격하였어요. 조총수들은 사다리차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성 안을 보면서 총을 쏘았어요. 봉기군들은 이에 맞서 마른 풀과 화약을 던져 윤제를 불태우면서 방어를 했어요. 성을 방어하기 위해 활과 조총을 이용하기도 했어요. 때에 따라서는 몰래 성 밖으로 나와 관군을 기습 공격하고 다시 성안으로 되돌아가기도 했어요.

< 홍경래와 봉기군의 최후>   

정주성은 관군에 의해 포위된 지 100여 일이 지나도록 봉기군의 활약으로 함락되지 않았어요. 성 밖의 백성들도 봉기군에게 관군의 정보와 군량을 날라다 주며 도움을 주었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식량이 부족해지고, 겨울 추위 속에서 전염병마저 퍼지면서 상황은 점차 봉기군에게 불리해졌어요.

성 함락에 계속 실패한 관군은 마지막 방법을 생각해냈어요. 그것은 땅굴이었어요. 관군은 성 밑으로 봉기군이 모르게 땅굴을 팠어요. 그리고 그 속에 많은 양의 화약을 넣고 터트려 성벽을 무너트렸어요. 무너진 성벽 사이를 넘어 관군이 일제히 공격을 했어요.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홍경래는 다급하게 남문으로 빠져나갔지만, 결국 관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어요. 그리고 성안에 있던 봉기군은 대부분 관군의 포로가 되었지요. 포로가 된 3,000여 명의 봉기군은 안타깝게도 모두 처형되었어요. 이로써 홍경래와 평안도 백성들이 일으킨 4개월간의 봉기는 끝이 나고 말았어요.

홍경래와 평안도 백성들의 봉기는 결국 관군에 의해 끝이 났지만 그 후에도 백성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되었어요. 백성들 사이에는 ‘홍경래가 죽지 않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어요. 이것은 세도 정치 밑에서 고통 받던 백성들의 마음에 홍경래가 살아있다면, 홍경래와 같은 인물이 또 나온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반영된 것으로 보여요.

탐관오리의 횡포에 맞서 조선을 바로 세우려던 홍경래의 뜻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로 다시 불꽃을 피웠어요. 더 많은 농민이 잘못되어 가는 조선을 바로 잡고자 목숨을 걸고 일어났어요. 그리고 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었지요. 이들의 희생 속에 조선은 어떻게 변해갔을까요? 백성들이 원하던 조선은 만들어졌을까요?

[집필자] 신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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