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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추사체를 완성하다

<봉은사(서울 강남구)>   

“이 현판의 글씨는 명필로 이름난 추사 선생이 써 주셨습니다.”

“병 중에 우리 봉은사의 현판을 써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이군요. 마치 어린아이가 쓴 것같이 어떤 기교도 없는 글씨체군요.”

“안타깝게도 추사 선생은 이 글씨를 쓴 후 3일 뒤 죽음을 맞이했답니다.”

죽기 3일 전 봉은사라는 절의 현판을 써준 추사는 누구일까요? 이처럼 평생을 거쳐 추사체라는 뛰어난 글씨체를 완성한 그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어릴 때부터 글씨로 이름을 날리다

이 사람이 바로 김정희이에요. 그는 1786년에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집안은 이름난 양반 집안이었어요. 김정희는 어렸을 때부터 글씨를 잘 썼어요.

1791년 어느 여름날, 유명한 실학자였던 박제가는 김정희의 집 앞을 지나고 있었어요. 그는 봄을 맞이하여 집안에 좋은 일이 많이 생기길 바라는 의미로 쓴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는 대문의 글자를 보고는 글씨체가 아주 뛰어나다고 생각했어요. 박제가는 그 글씨를 쓴 인물이 궁금해져서 집 대문을 두드렸어요. 김정희의 아버지는 뜻밖에 찾아온 손님이 유명한 실학자 박제가임을 알아보고는 반갑게 맞이했어요.

“박제가 선생께서 무슨 일로 저희 집까지 오셨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대문에 글씨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여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예. 실은 제 큰아들 녀석이 쓴 글씨입니다만...”

박제가는 글씨의 주인공이 겨우 여섯 살 난 어린 김정희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어요.

“아니 이 어린 나이에 이런 글씨를 썼다니! 이 아이는 앞으로 학문과 예술에서 크게 이름을 떨칠 수 있는 소질을 갖고 있습니다.”

박제가는 김정희의 아버지에게 나중에 김정희가 자라면 자신이 가르쳐 보겠노라고 하였어요.

청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생각하다

김정희는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실학자 박제가로부터 본격적으로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배움의 길은 끝이 없느니라. 장차 어떤 길을 가야할지 뚜렷한 목표를 세워놓고 학문을 익혀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스승님.”

“북학은 실제 삶에 활용되는 실학의 하나로, 청의 발달한 문물을 받아들여 우리나라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학문이다. 앞으로 너는 이를 널리 공부해야 할 것이야.”

당시 청나라는 학문과 문화가 크게 발달했는데, 청에 다녀온 경험이 있던 박제가는 조선도 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더욱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러한 그의 생각은 제자 김정희에게 전해졌고, 김정희의 학문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어요.

학문에 열중하던 김정희에게 시련이 다가왔어요. 열여섯 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스무 살에 아내마저 세상을 떠났어요. 그뿐만 아니라 박제가마저 귀양을 떠나는 바람에 스승과 이별을 하게 되었어요. 연이은 불행에도 불구하고 김정희는 계속 학문 연구에 힘썼고, 그 결과 1809년 스물네 살에 과거 시험에 합격했어요.

얼마 후 김정희는 청으로 가는 사신 일행인 아버지를 따라 청의 수도 연경(지금의 베이징)으로 가게 되었어요. 김정희의 아버지가 말했어요.

“청은 현재 우리 조선보다 훨씬 발달한 나라이다. 이번 기회에 많은 것을 배우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아버님! 스승님의 뜻을 받들어 청의 발달한 문화를 받아들여 조선을 더 잘사는 나라로 만드는 데 힘을 보태겠습니다.”

<글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김정희와 청의 대학자 옹방강>   

김정희는 4개월 정도 청에 머물면서 당시 청의 최고 학자들과 친분을 쌓고, 학문과 예술에 대해 활발하게 토론했어요. 특히 당시 77세의 대학자 옹방강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진귀한 책과 그림을 모두 보여주고 그 속에 담긴 내용을 친절히 설명해줄 정도로 김정희를 귀히 여겼어요. 조선으로 돌아온 뒤에도 김정희는 옹방강이 죽기 전까지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적인 교류를 이어나갔어요.

이처럼 청의 학자들과 책과 그림, 편지로 연락하면서 김정희는 조선의 뛰어난 학자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어요.

한편 김정희는 청에 머물 때 뛰어난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고 있던 고증학을 배웠어요. 고증학은 과거의 여러 자료를 꼼꼼히 살펴 유교 경전의 뜻을 더욱 정밀하게 해석한다거나 역사적 사실을 좀 더 확실하게 밝히는 학문을 뜻해요. 이러한 고증학을 배운 김정희는 학문의 깊이가 더욱 깊어졌지요. 김정희는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비석, 도자기, 철기 등에 새겨진 글자를 연구하는 학문도 관심을 두게 되었어요.

조선으로 돌아온 김정희는 이론만 내세우는 학문보다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 연구에 뜻을 두고 청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북학 연구에 더욱 힘을 쏟았어요. 또한 청에서 배운 고증학을 바탕으로 옛 비석에 새겨진 글자들을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잘못 알려진 비석의 실제 주인공을 알아내다

1816년 무더위가 한창이던 7월 한여름, 서른한 살의 젊은 선비 김정희와 그의 친구는 북한산에 올라갔어요. 그들이 도착한 북한산 비봉 정상에는 비석 하나가 서 있었어요. 그때까지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 때 큰 역할을 한 승려 무학대사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던 비석이었지요. 김정희가 비석에 덮여 있는 이끼를 걷어내자 희미하게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보게. 친구! 이것은 무학대사가 세운 비석이 아닌 것 같아.”

“그럼 누구의 비석이라는 말인가?”

“신라의 진흥왕이 세운 비석이라네.”

<서울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와 탁본>   
국사편찬위원회

놀랍게도 그것은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그 일대를 둘러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었어요. 1,250여 년 만에 신라의 진흥왕 북한산 순수비가 그 실체를 드러낸 순간이었지요.

그리고는 북한산 순수비의 옆면에 “이것은 신라 진흥왕이 세운 비이다. 병자년(1816년) 7월 김정희가 와서 비문을 읽었다.”는 기록을 남겼어요. 또한 그 옆에 “정축년(1817년) 6월 8일 김정희, 조인영이 함께 남아있는 글자 68자를 조사하여 정하였다.”라고 기록했어요.

북한산 순수비의 발견을 계기로 김정희는 옛 비석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그리고 오래된 비석의 글씨를 탁본해서 그 속에 담긴 이야기와 역사를 알아냈어요. 이를 통해 책으로는 알 수 없었던 옛날 역사의 빈 부분을 알 수 있게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 조상의 삶을 더욱 다양하게 알 수 있게 되었어요. 또한 김정희는 비석에 새겨진 다양한 글씨체도 연구했어요.

유배지에서 추사체를 완성하다

김정희는 병조참판, 이조참판을 지내는 등 비교적 큰 어려움 없이 관직 생활을 했어요. 하지만 1840년에 윤상도라는 관리가 고위 관료의 비리를 상소문을 올렸어요. 그러나 임금과 신하 사이를 이간질한다고 반대로 공격을 받아 죽임을 당한 사건이 있었어요. 윤상도가 상소문을 쓰는 데 김정희가 도움을 줬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어요.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게 된 김정희는 약 9년 동안 학문 연구와 글씨 연습에 몰두했어요.

‘그동안 나는 중국의 글씨를 흉내만 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나만의 독창적인 글씨체를 만들어야지.’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며 글씨 연습을 반복하던 김정희는 드디어 자신만의 독창적인 글씨체를 만들어 냈어요. 조선은 물론 중국 어느 시대에도 없었던 오직 김정희만의 글씨체인 추사체였지요. 당시 이름난 학자이자 관리였던 박규수는 추사체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어요.

<잔서완석루
‘다 떨어진 책과 무뚝뚝한 돌이 있는 서재’라는 뜻으로 추사체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유산채널

“여러 훌륭한 서예가들의 장점을 모아, 마치 신이 쓴 듯 기가 느껴진다. 바다의 파도가 밀려오는 듯하다.”

한편 김정희는 제주도 귀양살이의 외로움과 슬픔을 가족과 친구에게 편지를 쓰면서 달랬어요. 그의 친한 벗은 직접 제주도를 찾아와 김정희의 마음을 위로해 주기도 했어요. 또한 그의 제자였던 이상적은 통역관으로 청의 연경에 갔다가 김정희가 좋아할 만한 귀한 서적들을 구해서 제주도로 보내주었어요. 이에 김정희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세한도’라는 그림을 그려서 이상적에게 보내주었어요.

<김정희가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한 ‘세한도’>   
문화재청

‘세한도’를 보면 한 채의 집을 사이에 두고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잣나무와 소나무를 그려 이상적과의 변치 않는 의리를 표현했어요.

‘세한도(歲寒圖)’라는 그림에서 ‘세한(歲寒)’은 ‘설 전후의 추위’라는 뜻으로 매우 심한 한겨울의 추위를 말해요. 또한 그림에는 소나무와 잣나무도 그려져 있으며, 그림 왼편으로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제일 늦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드는 것을 안다.”라는 이치에 빗대어, “권세와 이익으로 합친 자들은 그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이 시들해진다.”라는 글이 있어요. 즉, 김정희가 잘 나갈 때는 문전성시를 이루던 사람들이 죄인의 몸으로 유배를 가니 아무도 찾지 않았는데, 이상적만이 그를 찾아와 준 데 대하여 그의 성품을 항상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는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며 고마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1848년에 김정희는 제주도 귀양살이를 끝내고 한양으로 돌아왔어요. 그러나 다시 당쟁에 휘말려 1851년 관직에서 쫓겨난 후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어요. 이때 그의 나이 66세였어요.

김정희는 귀양살이했지만 결코 외롭지 않았어요.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예술가였던 김정희를 존경하는 선비들이 여기저기서 찾아왔기 때문이었어요. 또한 농민들까지 여러 가지 유물과 미술품을 감정받기 위해 김정희를 찾아왔어요. 다양한 문화재를 감정하면서 예술품에 대한 김정희의 학문적 깊이는 더욱 깊어졌어요.

김정희는 귀양살이를 했지만 결코 외롭지 않았어요.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예술가였던 김정희를 존경하는 선비들이 여기저기서 찾아왔기 때문이었어요. 또한 농민들까지 여러 가지 유물과 미술품을 감정받기 위해 김정희를 찾아왔어요. 다양한 문화재를 감정하면서 예술품에 대한 그의 학문은 더욱 깊어졌어요.

다행히 1년여 만에 귀양이 풀린 김정희는 이후부터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어요. 대신 김정희는 이곳저곳 다니면서 글과 그림을 그리며 지냈어요. 그러다가 1854년 10월 71세에 세상을 떠났어요.

김정희는 18세기 말에 태어나 19세기 세도 정치라는 정치적 혼란기에 활동한 인물로, 서예, 비석 글씨 해석 등의 분야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운 학자이자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어요.

[집필자] 방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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