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미있는 초등역사
  • 근대
  • 박규수
  • 박규수, 개화사상의 씨를 뿌리다

박규수, 개화사상의 씨를 뿌리다

<헌법재판소(서울 종로구)>   

“자네, 일본에 가서 근대 문물을 공부해보는 것이 어떻겠나?”

“일본에 갈 수만 있다면 좋겠지요. 그런데 방법이 있나요?”

“이번에 일본의 근대 문물을 보러 가는 시찰단이 있네. 그들을 따라가면 된다네.”

1881년 일본에 가는 시찰단을 따라간 사람은 유길준이에요.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지요. 유길준에게 일본에 가서 공부하라고 권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늦은 나이 과거시험에 합격하다

유길준에게 일본 유학을 가라고 조언한 사람은 박규수예요. 유명한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지요. 박지원은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의 상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북학파 실학자였어요. 김정희, 박제가와 같은 많은 제자도 길러냈지요.

그런데 박규수는 할아버지에게 직접 실학사상을 배울 수는 없었어요. 그가 태어나기 2년 전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에요. 그래도 학문을 이어받고자 노력했던 아버지 덕분에 할아버지의 실학사상에 대해 배울 수 있었어요.

“자네의 학문 수준이 매우 높은 것 같네. 내가 비록 자네보다 훨씬 나이가 많지만, 학문을 나누고 친구로 지내고 싶네.”

박규수가 15살이 될 무렵이었어요. 조종영이란 사람이 자신보다 36살이나 어린 박규수와 친구가 되기를 원했어요. 조종영은 예조와 이조의 판서를 지냈어요. 그런 사람이 박규수와 학문을 나누는 친구가 되자고 했으니 박규수의 학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겠죠?

효명세자도 이런 박규수를 높이 평가하고 무척이나 아꼈어요. 효명세자는 아버지인 순조가 건강이 악화되자 18세의 젊은 나이에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렸어요. 당시 조선은 안동김씨가 정치를 좌지우지해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웠고, 왕권도 약화된 상태였어요. 효명세자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요. 20살의 박규수도 효명세자의 개혁정치에 희망을 걸고 새로운 조선을 꿈꾸었어요.

<효명세자와 박규수의 만남>   

그러던 어느 날, 효명세자가 21세의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게다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와 아버지마저도 돌아가셨어요. 이 일을 겪으면서 박규수는 큰 상처를 받아 약 20년 동안 과거 시험도 보지 않고 꼭꼭 숨어서 살았어요.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세도 정치는 끝날 줄 몰랐어요. 박규수는 다시 마음을 잡고 과거를 봐 관리가 되었어요.

“나의 아버지인 효명세자께서 그대를 아꼈던 것에 대해 잘 알고 있었소. 앞으로 큰 벼슬을 내려 나랏일을 돕도록 할 것이니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바라오.”

헌종은 과거 시험에 합격한 박규수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얼마 후 헌종이 세상을 떠났어요. 헌종이 돌아가신 후 강화도에 살아 강화도령이라 불리던 왕족 이원범이 왕이 되었어요. 바로 철종이지요.

진주 농민 봉기의 원인을 밝혀내다

1850년에 왕이 된 철종은 약 13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지만 실제로 나랏일은 세도 가문인 안동김씨의 뜻대로 이루어졌어요. 이 틈을 타 탐관오리들은 여러 가지 옳지 못한 방법으로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어요. 그래서 백성들의 생활은 무척이나 어려웠어요.

백성들은 관아 벽에 글을 써 붙이거나 밤에 횃불을 들고 자신들의 어려움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생활이 나아지지 않았어요.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백성들은 마침내 1862년에 전국적으로 봉기를 일으켰어요.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진주 농민 봉기랍니다.

“경상도 지방에 암행어사로 다녀온 경험이 있는 박규수를 내려보내 봉기가 일어난 이유와 해결방법을 찾도록 하시오.”

“예, 전하 분부 받들겠습니다”

박규수는 진주 농민 봉기가 일어난 까닭을 조사하여 왕에게 상소를 올렸어요. 상소에는 탐관오리였던 백낙신이 백성들에게 정해진 액수보다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기 때문에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어요.

그는 적극적으로 사건의 해결책을 제시했어요. 봉기를 일으킨 백성들에게 무조건 벌을 주어서는 안 되고, 봉기가 일어나게 만든 백낙신에게 큰 벌을 내리라고 했지요. 또 세금 제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관청을 만들 것도 건의했어요.

<진주 농민 봉기의 진상을 조사하여 보고하는 박규수>   

미국 배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우다

1866년, 평양의 대동강에서 미국 배 제너럴셔먼호가 불에 탔어요.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도 대부분 죽임을 당했지요. 이와 같은 일을 앞장서서 지휘한 사람이 박규수에요. 박규수가 평안도 관찰사였거든요.

그런데 박규수는 왜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웠던 것일까요? 제너럴셔먼호는 중국에서 자명종과 비단 등을 싣고 우리나라의 쌀, 인삼 등과 교역을 하러 온 상선이었어요. 제너럴셔먼호는 중국 배의 안내를 받으며 대동강을 따라 평양까지 갈 수 있었어요.

당시 조선은 고종을 대신하여 흥선 대원군이 나랏일을 도맡아 하고 있던 때에요. 흥선 대원군은 서양세력과 무역을 하거나 외교 관계를 맺는 것을 거부하는 정책을 펼쳤어요.

박규수는 흥선 대원군의 이러한 정책에 완전히 찬성하진 않았지만, 나라의 기본적인 정책을 거스를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배에 필요한 물과 식량은 줄 수 있소. 그러나 교역은 할 수 없으니 돌아가시오.”

제너럴셔먼호 선원들은 박규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심지어 상륙하여 조선군을 잡아가기까지 했어요. 이 소식을 들은 평양의 백성들이 대동강가로 몰려나가자 대포와 총까지 마구 쏘아대기도 했고요.

이에 박규수는 제너럴셔먼호 선원들을 체포하기 위해 지원자를 모집했어요. 여기에 지원한 한 군인이 꾀를 내었어요.

“작은 배를 여러 척 모아 기름칠을 하고 제너럴셔먼호 옆에 붙이고 불화살을 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오! 좋은 의견이군. 그대로 시행하시오.”

제너럴셔먼호에 대한 평양성 국민들의 공격이 시작될 무렵 조선군인 중 일부가 배를 타고 제너럴셔먼호에 가서 잡혀간 사람들을 구출해 왔어요. 그 후 대포를 쏘고 대동강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배를 통째로 불태워 버렸어요. 제너럴셔먼호에 타고 있던 사람과 배를 탈출하여 대동강 변으로 온 사람들은 대부분 죽임을 당했어요. 이 일은 훗날 미군이 강화도를 공격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어요.

청에 사신으로 다녀오다

박규수는 할아버지인 박지원처럼 중국에 다녀왔어요. 다른 점이 있다면 박규수는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의 자격으로 청을 다녀온 것이지요. 그것도 1861년과 1872년 두 차례에 걸쳐서 말이에요.

“할아버지가 다녀오신 청에 가게 되다니...”

1861년 청에 간 것은 아편 전쟁으로 피난을 간 청 황제의 안부를 살피기 위해서였어요. 청은 영국과 프랑스 군대의 공격을 받아 수도인 베이징을 빼앗겼어요. 이때 청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여름별궁이 있던 열하로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어요. 박규수는 중국에 가서 80여 명의 중국인과 만나며 교류하며 자신의 생각을 키워나갔어요.

1872년에는 청 황제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중국에 갔어요. 그때 중국은 양무운동이 실시되고 있었어요. 양무운동은 서양의 기술과 군사제도를 받아들여 중국을 근대적 국가로 만들자는 것이었어요. 중국의 모습을 살필 수 있었던 박규수는 우리나라도 근대 문물을 하루빨리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실학을 바탕으로 삼아 개화 사상가를 키워내다

두 번째 중국 방문에서 돌아온 박규수는 흥선 대원군에게 나라의 문을 열고 외국과 교류해야 된다고 건의했어요. 그러나 그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얼마 후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어요.

그 후 박규수는 한양 북촌에 있는 자기 집 사랑방에서 양반 자제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일에 더욱 힘을 기울였어요. 그 내용은 주로 할아버지의 북학파 실학사상과 자신이 중국에 가서 보고 배운 것이었지요. 이때 모여서 그에게 근대 문물을 배운 사람들은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김윤식 등이에요.

<박규수와 개화당 사람들>   

그들은 훗날 개화파가 되어 조선이 근대적 국가가 되는데 나름의 역할을 해요.

그러던 중 1875년에 일본은 운요호(운양호)라는 배를 앞장세워 강화도에서 무력을 동원하여 개항을 요구했어요. 이때 흥선 대원군과 최익현 같은 유학자들은 외국과 조약을 맺는 것에 적극으로 반대했어요. 이와 달리 박규수와 개화파들은 항구를 열어 외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1876년 고종은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을 맺었어요.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는 장면>   
국사편찬위원회

강화도 조약은 우리가 외세와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에요. 그러나 조약의 내용은 우리에게 불리했어요. 예를 들면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죄를 지어도 우리 법으로 벌을 줄 수 없고, 일본 배가 우리나라 해안을 마음대로 조사할 수 있게 하는 것 등이에요.

강화도 조약의 내용은 박규수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조약의 내용이 전해지자 조약 체결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박규수를 비난했어요. 박규수는 나라의 앞일을 걱정하다 그만 병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강화도 조약이 맺어진 후 1년 만인 1877년 세상을 떠났어요.

박규수가 죽은 후 그의 사랑방에 모여 학문을 배웠던 사람들은 개화파가 되어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서 큰 발자취를 남겼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박규수를 북학파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어요.

[집필자] 김현숙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