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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헌수와 어재연, 강화도를 지켜내다

<초지진(인천 강화군)>   

“양이가 강화도를 침략했다며?”

“양이라면 서양 오랑캐를 말하지 않나?”

“그렇지! 양이들이 신식 무기를 앞세워 강화도를 점령했다는군. 큰일일세.”

“나라님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프랑스와 미국이 군함과 신식 무기를 앞세워 강화도를 공격해 왔어요. 이들이 조선의 강화도를 침략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조선은 이들의 침략에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이양선, 조선의 바다에 나타나다

조선 후기에 서양의 여러 나라는 이양선을 타고 와 조선의 앞바다에 자주 나타났어요. 이양선은 우리의 배와 모양이 다르게 생긴 배라는 뜻이에요.

이양선은 일본이나 중국과 무역을 하려고 유럽에서 먼 항해를 해서 왔어요. 이중 일부가 항해 중에 풍랑을 만나 표류해 오거나, 일본이나 중국으로 가려다 실수로 조선에 오는 경우가 있었어요. 나중에는 조선의 바닷길을 탐사하고 무역을 하려는 이양선이 더 많이 조선으로 왔어요.

<이양선>   

이양선이 조선의 바다에 자주 나타날 무렵, 흥선 대원군은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조선의 개혁을 이끌고 있었어요. 흥선 대원군은 서양 여러 나라가 청을 무력으로 개항시키고 자기들 맘대로 나랏일에 간섭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어요. 이를 보면서 흥선 대원군은 나라의 문을 굳게 닫고 서양 여러 나라의 통상 요구를 매번 거절하였어요.

조선은 나라의 문을 막았지만 서양인들은 대포로 무장한 이양선을 몰고 와 계속 교류를 요구하였어요. 그러다 그들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대포를 쏘며 상륙하여 마을을 약탈하고, 죄 없는 백성들을 죽이기도 하였어요.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점령하다

1866년 정부는 천주교 금지 교서를 발표하고 프랑스 신부들과 수많은 천주교인을 처형했어요. 프랑스는 이를 구실삼아 군함을 몰고 와 조선에 조약 체결을 요구했어요. 조선은 대표를 보내 국내 사정을 이유로 조약 체결을 끝내 거부하였어요. 조선이 협상을 거부하자 프랑스군은 군함과 많은 병사를 앞세워 강화도를 침범하였어요.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스군은 신식 대포와 총을 앞세워 조선군을 공격하였어요. 프랑스군의 강력한 화력에 당황한 조선군은 강화성을 빼앗기고 말았지요. 강화성을 점령한 프랑스군은 조선 정부에 사과와 협상을 요구하였어요. 그리고 강화도 건너편 문수산성을 공격하였지요.

문수산성은 강화도와 한강의 입구를 방어하던 군사적 요충지였어요. 이곳을 빼앗기면 한양도 크게 위험해질 수 있었어요. 조선군은 강을 건너 산성으로 접근하던 프랑스군을 기습 공격했어요. 조선군의 공격에 당황한 프랑스군은 다시 강화도로 돌아갔어요.

양헌수, 프랑스군을 강화도에서 몰아내다

<정족산성 남문>   

문수산성 전투 이후 양헌수 장군은 포수로 이루어진 부대를 이끌고 프랑스군 모르게 강화도로 들어가 전투를 벌이고자 하였어요. 강화도 주민의 도움을 받아 섬의 남쪽에 위치한 정족산성에 무사히 들어갔어요.

정족산성은 3개의 봉우리와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아 만든 작은 성이었어요. 당시 정족산성에는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중요 문서들을 보관하던 정족산 사고가 있었어요. 프랑스군이 이를 안다면 이곳을 약탈할 것이 분명했어요.

“장군! 이리 위급한 상황에 와주셔서 크게 감사드립니다. 서양 오랑캐의 행패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이곳까지 와서 행패를 부렸단 말씀이시오?”

“며칠 전 프랑스군이 산성 주변을 정찰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돌아올 것이라 말하며 강화성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시 돌아온다...”

양헌수 장군은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 성을 세밀히 조사하였어요. 그리고 군사들을 성벽을 따라 은밀히 숨겨두어 프랑스군의 공격에 대비하였어요.

양헌수 부대가 정족산성에 들어왔다는 소식이 프랑스군에게도 전해졌어요. 양헌수 부대는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어요. 프랑스군 제독은 150명의 부대를 보내 정족산성의 조선군을 몰아내고자 했어요.

“장군! 적병이 나타났습니다!”

“적의 규모는 어찌 보이던가?”

“수백의 적병이 나뉘어 동문과 남문으로 접근해 오고 있습니다.”

“적의 기세는 어떠하던가?”

“아마도 우리 군이 있는 줄 모르는 듯 기세는 대단치 않사옵니다.”

“그래. 하늘이 우리를 돕는구나!”

<정족산성 전투>   

프랑스군은 점심 무렵에 공격을 시작하였어요. 프랑스군 세 명이 동문과 남문 사이에 있는 산기슭으로 올라와서 성벽을 기어 올라오려 했어요. 동문을 지키던 포수가 먼저 화승총을 쏘아 적 한 명을 쓰러뜨렸어요. 총성이 울리자 성벽 위의 조선군들이 일제히 화승총을 쏘아댔어요. 화승총 소리가 산 전체를 울렸어요.

조선군이 쏜 총알은 불과 100보 밖에 나가지 않았지만, 프랑스군의 총은 500보에 이르렀어요. 갑작스러운 조선군의 공격에도 프랑스군은 우수한 무기에 의지해 당황하지 않고 전투를 하였어요. 조선군도 화승총의 성능은 떨어졌지만 목숨을 걸고 프랑스군에 맞섰어요. 두 군대 사이에 피할 수 없는 전투가 계속되었어요.

전투가 한창인데 부하 병사 한 명이 양헌수 장군에게 급하게 달려와 말했어요.

“장군! 탄약이 모두 떨어졌습니다!”

“뭐이라! 적병도 우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맞서 싸워라!”

조선군의 탄약이 모두 떨어져 갈 무렵, 전투에서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프랑스군의 사기도 크게 떨어져 가고 있었어요. 프랑스군도 탄약이 부족해지자 무기를 버리고 물러나기 시작하였어요.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의 승리였어요. 조선군이 강화도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친 이 사건을 병인양요(1866년, 고종 3)라고 해요.

프랑스군은 정족산성에서 패하자 더는 조선에 머물 수 없었어요. 그들은 강화성을 점령하면서 약탈한 외규장각 의궤를 비롯한 중요 서적과 무기, 은괴 등 많은 보물을 배에 싣고 청으로 돌아갔어요. 외규장각을 비롯한 강화성의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른 후였지요.

<강화도와 서양의 침략에 맞선 조선>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하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불타고 행패를 부리던 선원들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어요.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조선의 개항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듬해 일본에 있던 미국 군함을 조선으로 보내 바닷길을 조사하고 돌아갔어요. 미국 함대가 나타나자 조선 정부도 미국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강화도에 군대와 무기를 늘리면서 수비를 강화했어요.

1871년 미국은 조선을 개항하기 위해 5척의 군함과 1천 명이 넘는 군대를 강화도로 보냈어요. 그리고 조선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강화도 주변의 수로를 탐사하였죠. 1871년 미국은 조선을 개항하기 위해 5척의 군함과 1천 명이 넘는 군대를 강화도로 보냈어요. 그리고 조선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강화도 주변의 수로를 탐사하였죠.

“우리 함대를 향해 포를 쏜다는 것은 서로 전쟁을 하자는 뜻인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빨리 사과를 하시오.”

“우리 바다를 허락도 없이 넘어 온 것은 그대들이오.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기기 위해 포를 쏘았을 뿐이오. 당신들 나라로 어서 돌아가시오.”

조선 정부와 미군의 입장은 서로 좁혀지지 않았어요. 미국 함대 제독은 미군의 힘을 조선에 보여주기 위해 강화도에 상륙할 것을 결심했어요. 미군은 먼저 초지진을 공격하였어요. 초지진을 향해 수많은 미국 함대의 포탄이 날아들었어요. 초지진의 성벽은 금방 무너졌고, 조선군은 어쩔 수 없이 초지진을 버리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전의 프랑스군과는 달리 미군은 해안을 따라 올라가면서 조선군의 방어 시설을 하나씩 점령해 갔어요. 초지진을 점령한 후 이웃한 덕진진을 점령하였고, 그리고는 많은 방어 시설이 갖춰진 광성보로 향했어요. 광성보에는 수로를 따라 북으로 향하던 미국 함대에 맞서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버티고 있었어요.

어재연, 목숨을 바쳐 미국 함대에 맞서다

<광성보의 모습>   

미군은 부대를 둘로 나눠 수로와 육로를 따라 나란히 광성보로 향했어요. 광성보에 도착한 미국 함대는 먼저 함포 사격을 했어요. 광성보의 여러 성벽과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손돌목 돈대도 함포 사격에 크게 파괴되었어요. 함포 사격이 끝나자 수로에서 광성보로 상륙한 부대와 육로를 따라 올라온 부대가 함께 가파른 언덕을 오르며 조선군을 공격하였어요.

조선군은 무너진 성벽 속에서 버티며 미군의 공격을 막아냈어요. 미군이 언덕에 거의 오를 때까지 조선군은 화승총을 계속 쏘아댔어요. 그리고 화승총을 쏠 수 없게 되자 무너진 성벽 위로 뛰어올라 아래쪽의 미국 병사를 향해 돌을 던졌어요. 미군이 성벽을 넘자 조선군은 칼과 창, 맨손으로 맞섰어요.

<광성보 전투(강화역사박물관)>   

조선군에게 항복이란 없었어요. 그들은 죽을 때까지 싸웠으며, 마지막 병사가 죽었을 때 광성보 전투는 끝났어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50여 명의 조선군은 이 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어요. 미국의 침략에 맞서 강화도에서 벌어진 이 사건을 신미양요(1871년, 고종 8)라고 해요.

광성보를 점령한 미군은 관아를 불태운 후 초지진으로 돌아가 머물면서 조선 정부와 협상을 시도했어요. 그러나 미국 함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조선 정부는 협상에 응하지 않았어요. 조선과의 통상이 불가능할 것을 예상한 미국 함대는 방향을 돌려 물러났어요.

두 차례나 서양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조선은 서양에 대한 경계심이 무척 높아졌어요. 또한 서양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도 커졌어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흥선 대원군은 한성과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서양과 교류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건히 하였어요. 그리고 군대를 정비하고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지요. 그러나 서양의 발전된 무기에 놀라면서 조선이 부강해지려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람도 늘어났어요.

서양 세력이 힘을 앞세워 개항을 요구하는 상황 속에서 조선은 어떤 결정을 해야 했을까요? 조선의 결정은 이후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집필자] 신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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