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미있는 초등역사
  • 근대
  • 흥선 대원군
  • 흥선 대원군, 통치 질서를 다시 세우다

흥선 대원군, 통치 질서를 다시 세우다

<운현궁(서울 종로구)>   

“흥선 대원군은 여러 가지 개혁 정책을 펼쳐 세도 정치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외세의 침략을 막아낸 훌륭한 사람이야.”

“그렇지 않아. 서양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아 조선의 근대화가 늦어졌어!”

흥선 대원군은 아들인 고종이 왕이 된 후 약 10년 조선을 다스렸어요. 왕도 아닌 흥선 대원군은 어떻게 조선을 다스릴 수 있었을까요? 흥선 대원군의 업적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은 왜 둘로 나뉘는 것일까요?

흥선 대원군 권력을 잡다

흥선 대원군의 이름은 이하응이에요. 그는 둘째 아들이 왕이 되었기 때문에 대원군으로 불렸어요. 둘째 아들이 바로 조선의 26대 왕인 고종이지요.

조선 시대에는 흥선 대원군 말고도 대원군이 3명이나 더 있어요. 대원군은 조선의 왕 중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왕이 아니었던 경우 그의 아버지를 부르던 호칭이에요. 4명의 대원군 중 살아서 대원군이 된 사람은 흥선 대원군밖에 없어요. 그래서 보통 대원군 하면 흥선 대원군을 떠올리게 되지요.

고종이 왕이 된 것은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 덕분이라 할 수 있어요. 고종이 왕이 되기 전 조선의 왕이었던 철종은 철종은 원래 강화도에 살았어요. 농사를 짓고 살던 그는 자신이 왕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바로 직전의 왕인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당시 최고 권력을 누리고 있던 안동 김씨 가문에 의해 갑자기 왕이 되었어요. 철종은 5명의 왕자를 두었는데 모두 어린 나이에 죽고 말았어요. 그래서 철종이 죽은 후에도 왕이 될 수 있는 세자가 없었어요.

당시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은 헌종의 어머니였던 조대비였어요. 고종은 조대비의 양자(헌종의 동생)가 되어 왕위를 이어받았어요. 조대비의 마음을 움직인 사람이 바로 흥선 대원군이지요.

고종은 12세에 왕이 되었어요. 나라를 다스리기에는 어린 나이었죠. 그래서 처음에는 왕실의 큰 어른인 조대비가 고종을 도와 나라를 다스렸어요. 이때부터 흥선 대원군은 점점 나랏일에 나서게 되었어요. 2년쯤 지난 뒤에는 조대비가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흥선 대원군이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했어요.

<고종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린 흥선 대원군>   

세도 정치의 문제점을 바로잡다

고종이 왕이 될 무렵 조선은 안동 김씨 가문의 세도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었어요. 그들은 주요 관직을 독차지하고 비변사에 모여 국가의 중요한 일을 의논했어요. 그러다 보니 조선 초에 만들어진 최고 행정 기구인 의정부는 있으나마나하게 되었어요. 흥선 대원군은 비변사를 약화시키고 의정부의 역할을 되살려 이 문제를 해결했어요.

세도 정치 시기에는 돈을 받고 관직을 팔기도 했어요. 그러니 안동 김씨 집은 관직에 나가고 싶은 사람들로 늘 붐볐지요. 돈을 주고 관직을 사서 지방관이 된 사람들이 백성들을 위해 일했을까요? 그들은 자신이 관직에 나가는데 쓴 돈을 되찾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백성들에게 온갖 방법을 써서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들였어요. 당연히 백성들의 삶은 고달팠어요. 고종이 왕이 되기 1년 전에는 전국적으로 농민 봉기가 일어날 정도였어요.

권력을 잡은 흥선 대원군은 세도 정치로 나타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폈어요.

“이제부터 관아에서 곡식을 빌리지 않고 우리 마을에서 스스로 곡식을 빌려주고 갚는 제도가 생긴다는군.”

“그렇게 되면 탐관오리가 더는 우리를 괴롭지 않겠군.”

고종이 왕이 된 지 3년 되는 해인 1866년 흥선 대원군은 환곡의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했어요. 환곡은 원래 봄에 곡식이 부족할 때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약간의 이자를 붙여서 갚게 했던 좋은 제도였어요. 그런데 세도 정치 시기 탐관오리들이 많은 이자를 붙이거나 필요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억지로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방법 등을 써서 환곡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했어요. 당연히 백성들의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죠. 이런 환곡을 각 마을에서 자율적으로 운영하게 해서 지방관이 간섭할 수 없도록 했어요.

흥선 대원군은 호포제도 실시했어요. 호포제는 군대에 가는 대신 내던 군포를 농민들 외에도 양반도 내게 한 제도예요. 양반이 세금을 내면서 백성들의 부담은 줄어들었어요.

서원도 47개만 남기고 모두 없앴어요. 서원은 유교를 가르치고 훌륭한 유학자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에요. 나라에서는 서원을 중요하게 여겨 많은 서원에 땅과 노비, 책 등을 주었어요. 또 세금도 내지 않도록 혜택을 주었어요. 그러나 서원은 여러 가지 혜택을 입었으면서도 제사 지내는데 필요한 비용을 백성들에게 내게 하는 등 큰 피해를 주었어요. 서원의 문제점이 심각해지자 대부분 서원을 폐지했던 거예요.

흥선 대원군이 한 여러 개혁은 많은 백성에게 환영을 받았어요. 그런데 흥선 대원군이 한 일 중 백성들의 원망을 받은 일도 있어요. 바로 경복궁을 다시 짓는 것이었죠.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은 흥선 대원군이 권력을 잡을 무렵까지 다시 만들어지지 못했어요. 흥선 대원군은 추락한 왕실의 위엄을 살리기 위해 경복궁을 다시 짓기로 했어요.

경복궁을 다시 짓는 일은 쉽지 않았어요. 왜냐구요? 경복궁의 규모가 워낙 클 뿐만 아니라 경복궁을 짓기 시작한 지 1년 만에 불이 나기도 했거든요.

<경복궁을 다시 짓는 데 동원된 백성>   

그러다 보니 경복궁을 짓는 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어요.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 사용되던 상평통보의 100배만큼 가치가 있는 돈인 당백전을 마구 찍어냈어요. 그러다 보니 물가가 많이 올랐어요. 물가가 오르면 백성들의 생활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죠? 게다가 백성을 강제로 동원해 일을 시키기까지 했어요. 그러니 백성들의 환영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이죠.

<상평통보와 당백전>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고 척화비를 세우다

흥선 대원군이 권력을 잡을 무렵 청에서 일어난 두 번째 아편전쟁은 조선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어요.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일으키고 청의 수도인 베이징을 쳐들어갔거든요. 전쟁에서 진 청은 이들과 조약을 맺고 이전에 열었던 항구 이외에 더 많은 항구를 열 수밖에 없었어요.

흥선 대원군은 이런 서양 세력과 무역을 하지 않고 또 외교 관계도 맺지 않는 정책을 펼쳤어요. 그들과 교류하는 것이 조선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러던 중 1866년 프랑스가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에 침략해 왔어요. 병인양요가 일어난 것이죠. 프랑스는 조선이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천주교 신자 8,000여 명을 죽인 병인박해를 구실삼아 침략했어요. 프랑스는 한 때 강화도를 점령하기도 했지만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배한 후 물러났어요.

1871년에는 미국의 침략에 맞서 싸웠어요. 이를 신미양요라고 해요. 미국은 1866년에 일어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조선을 침략했어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에서 불태워진 일이에요. 미국도 프랑스처럼 강화도로 쳐들어왔어요. 강화도는 한양으로 들어오는 중요한 길목이었거든요. 미국은 대포를 쏘아 강화도의 초지진을 파괴하고 점령했어요. 그 후 어재연과 600여 명의 군인이 지키던 광성보도 차지했어요.

미국은 군함을 보내 강화도를 점령하면 조선을 개항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어요. 일본에 함대를 보내 개항시킨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흥선 대원군은 미국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어요. 미국은 할 수 없이 강화도에서 군대를 철수 했어요. 흥선 대원군은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을 막아내면서 서양 세력과 교류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뜻을 밝힌 척화비를 전국 곳곳에 세웠어요.

<척화비>   
문화재청

권력에서 물러난 흥선 대원군

신미양요가 끝난 후 2년 뒤인 1873년 최익현이 상소를 올렸어요. 그 상소는 흥선 대원군이 더는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는 내용이었어요.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에 불만을 가진 지방 양반과 유생들의 반발도 계속되었어요.

고종도 나라를 직접 다스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마침내 흥선 대원군은 권력에서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게 되었어요. 이후 조선의 권력은 왕비의 집안사람들인 민씨 세력이 차지했어요. 조선 정부는 1876년에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고 항구를 열었어요. 또한 서양의 근대적 문물을 받아들이는 개화정책을 펼치기도 했고요.

1882년 정부의 개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구식 군인들이 임오군란을 일으키면서 흥선 대원군은 다시 권력을 잡기도 했어요.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어요. 청의 군대가 들어와 임오군란을 진압하면서 오히려 청에 끌려가 살기도 했어요. 청에서 돌아온 후에도 다시 권력을 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1898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요.

흥선 대원군은 왕이 아니면서도 왕 이상의 권력을 누린,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에요. 세도 정치의 문제점을 바로 잡고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폈죠. 또 두 차례의 양요에서 승리를 거두며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어요. 흥선 대원군의 여러 가지 개혁 정책과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조선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청에 끌려갔을 때의 흥선 대원군>   
국사편찬위원회

[집필자] 김현숙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