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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부가 되다

<천주교 새남터 기념성당(서울 용산구)>   

“지난번에 새남터에서 또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다고 하는데, 자네는 그 이유를 아나?”

“나도 전해 들었네만,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었다고 하는군. 그러게 왜 천주교를 믿어서 그런 험한 꼴을 당하는지 모르겠어.”

천주교는 서양의 가톨릭교를 말해요. 조선 후기 ‘서학’이라는 순수한 서양 학문으로 들어왔다가 점차 종교로 받아들여졌어요.

그러나 조선 정부는 조선인 신부를 포함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였어요. 그들은 왜 사형 선고를 받고 죽었을까요? 조선인 신부는 누구일까요?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다

조선 후기의 어지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 갔어요. 천주교에서는 천주님(하느님)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주장하였어요.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은 오직 천주님을 모시며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지요.

그런데 조선은 충효 정신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유교의 나라였어요.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겼고, 양반과 상민의 구별이 엄격한 신분 사회였지요.

조선은 천주교가 나라의 기본 질서를 무너뜨리고 부모와 임금을 부정한다고 여겼어요. 또한 서양 세력과 한통속이 되어 나라를 위험에 빠트린다고 의심하였지요. 그래서 조선 정부는 천주교를 믿지 못하게 하였고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어요.

1791년 천주교인 윤지충이 사형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가 사악한 종교를 믿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이유였지요. 이를 신해년(1791년)에 일어난 박해라 해서 신해박해라고 해요.

1801년에는 신유박해가 일어났어요. 이때 선교사 주문모를 비롯한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되었지요. 1839년에도 천주교인 백여 명이 처형당하는 기해박해가 일어났어요. 이때 김대건의 아버지도 목숨을 잃었고 어머니도 정처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었지요.

잇따른 박해로 외국인 사제들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어요. 그 속에는 증조부를 비롯한 다수의 김대건의 집안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김대건은 왜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목숨을 잃는 위험까지 무릅쓰며 천주교 신부가 되었을까요?

천주교 사제의 길로 들어서다

1836년 6월 어느 날 경기도 용인의 어느 산골 마을에 푸른 눈의 한 외국인이 나타났어요. 피에르 모방이라는 프랑스 신부였어요. 이곳은 천주교 박해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었어요.

모방은 이 마을에서 미사(천주교 의식)를 드리고,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어요. 그가 세례를 준 사람 중에는 세례명이 김 안드레아라는 소년도 있었어요. 그 소년이 바로 김대건이에요.

김대건은 1821년 충청남도 당진 솔뫼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를 따라 이 마을로 이사해 살고 있었지요. 모방은 그런 김대건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어요. 소년은 똑똑하였고 성격이 굳세었으며 진실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어요. 게다가 그의 집안은 증조부 때부터 천주교를 믿었을 만큼 신앙심이 매우 두터웠어요.

“제가 댁의 아들을 데려다 천주교 신부로 키워볼까 합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김대건의 부모님은 모방의 제안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어요. 오히려 영광스러운 일이었지요.

1836년 7월 김대건은 모방에게 예비 신학생으로 뽑혀 한성으로 올라가게 되었어요. 그해 12월 김대건·최양업·최방제 등 세 신학생은 모방 신부의 소개장을 가지고 마카오로 유학을 하러 가게 되었어요. 그들은 중국 북경을 거쳐 7개월 만에 마카오에 도착하였어요.

<김대건 신부의 여정>   

당시 마카오에는 프랑스 신부들이 운영하는 파리외방전교회가 있어서 여기서 이들을 훈련시키려 했던 것이지요.

마카오는 우리나라와 풍토와 기후가 달랐어요. 김대건은 몸이 약했던 탓에 늘 잔병치레를 해야 했지만, 서양 학문과 성서를 체계적으로 열심히 배웠어요.

천주교 신부가 되다

1842년 공부를 마친 김대건은 조선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는 그해 10월 중국을 거쳐 평안도 의주까지 갔어요. 그러나 국경의 감시가 심해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어요. 다른 방향으로도 길을 잡아 조선으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지요.

1845년 1월 드디어 김대건은 세 번째 시도 끝에 가까스로 조선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하였어요. 한양에 도착한 김대건은 신자들이 마련해 준 집에서 지내면서 비밀리에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어요. 후배 신학생들을 뽑아 신앙 공부도 시켰어요.

“이보시게. 은밀히 배 한 척 구해 주시게나. 바다 건너 중국에 있는 페레올 주교님을 모셔 와야겠네.”

그해 4월 김대건은 신자들과 함께 제물포 앞바다에서 배를 띄웠어요. 풍랑을 만나는 등 고생 끝에 일행은 중국 상하이에 도착하였어요. 그곳에서 그는 페레올 주교를 만났어요. 주교는 김대건 일행을 상하이 부근의 김가항 성당으로 데리고 갔어요.

<신부가 되는 김대건>   

이곳에서 김대건은 주교의 주관 아래 신부가 되는 의식을 치렀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어요.

그해 8월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 일행과 함께 50여 일 만에 조선으로 돌아왔어요. 그 뒤 주교는 김대건에게 이렇게 요청하였어요.

“김 신부님, 각 지방을 돌며 신자들을 격려하고 전도에 힘쓰세요.”

김대건은 지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천주교 신앙을 널리 알리기 위해 열심히 포교 활동을 하였어요. 그가 임무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오자, 페레올 주교는 말했어요.

“아무래도 중국에 있는 우리 사제들을 빨리 조선으로 데려와야겠소. 김 신부님은 어떻게 생각하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육지는 감시가 심하니 지난번처럼 바닷길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육지는 감시가 심하니 지난번처럼 바닷길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김대건은 수소문하여 배를 구했어요. 일행을 태운 배는 물길을 따라 천천히 나아갔어요. 한강을 벗어나 제물포 바다를 거쳐 강화 앞바다로 나아갔어요. 이때 김대건은 배 위에서 뱃길을 중심으로 상세하게 지도를 그렸어요. 백령도 부근 바다에서는 수많은 중국의 고기잡이배들이 열심히 고기잡이하고 있었어요.

김대건은 밤을 타서 고기잡이배 한 척에 올라, 중국 어부 한 사람을 은밀히 만났어요.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의 편지와 자신의 편지, 그리고 꼼꼼히 그린 지도를 어부에게 건네주며 말했어요.

“부탁하오. 이 편지와 지도를 매스트르 신부에게 전해 주시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김대건이 탄 배의 주인이 생선이 덜 말랐다고 하여 그들은 며칠 더 그곳에 머물러 있게 되었어요. 그러다 해안 지대를 순찰 나온 고을의 군졸들과 시비가 붙게 되었어요. 군졸들은 뱃사람들을 붙잡아서 갔고, 그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만 김대건의 신분이 드러나고 말았어요.

목숨을 버려 신앙을 지키다

김대건은 관군에게 붙잡혀 황해도 해주 관아로 끌려갔어요. 이미 그가 중국 배에서 전한 편지와 지도도 빼앗긴 뒤였어요. 그는 다시 한양으로 보내어졌어요. 그리고 포도청에서 문초를 받게 되었어요.

<고문을 받는 김대건>   

“너의 종교를 버려라!”

김대건은 형틀에 꽁꽁 묶인 채 심한 고문을 받았어요. 몸은 비록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담담하게 대답하였어요.

“내 목숨은 빼앗을 수 있어도 내 신앙은 빼앗을 수 없다!”

“참으로 어리석은 놈이로구나.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말만 하면 지금 당장 풀어 줄 수도 있는데.”

김대건을 심문하던 관리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어요. 계속되는 가혹한 고문에 김대건은 정신을 잃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어요. 정신을 잃으면 아무 말이나 할지 모를 일이었지요. 김대건은 고문에 지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였지만, 고통을 참고 이를 악물며 다시 힘주어 말했어요.

“사람이 한 번 나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법. 천주를 위해 죽는 것이 나의 소원이니, 오늘 묻고 내일 물어도 같을 뿐이다.”

김대건은 수십 차례의 고문을 받고 결국 사형 선고를 받았어요. 1846년 9월 16일 날이 밝아 왔어요. 김대건은 한강 변에 있던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갔어요.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어요. 그때 그의 나이 25세, 천주교 신부로 활동한 지 불과 1년 남짓한 기간이 지났을 뿐이었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은 이렇게 순교하였어요. 조선 정부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김대건과 같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이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어요.

그 후 1984년, 김대건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우리나라 성인으로 추대되었어요. 만약 여러분이 김대건이라면 자신의 신념을 위해 이처럼 목숨까지 버릴 수 있을까요?

<김대건 동상
천주교 박해의 상징인 서울 마포구 절두산 성지에 있다.>   

[집필자] 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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