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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일본과 서양을 같은 도적이라고 주장하다

<수선사(일본 쓰시마섬)>   

“이번에 나라에서 일본과 조약을 맺어 항구를 열려고 합니다. 선생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본은 서양과 같은 도적이라고 볼 수 있소. 절대 나라의 문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상소문을 올려 강력히 반대하겠소.”

일본은 서양과 같은 도적이라고 주장한 인물은 누구일까요? 그는 왜 나라의 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을까요?

흥선 대원군의 통치를 끝내는데 앞장서다

최익현은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어요. 그는 가난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아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아버지 덕분에 여러 곳을 이사 다니며 좋은 스승들을 만났어요. 14세 무렵에는 뛰어난 유학자로 이름이 높은 이항로의 제자가 되었어요.

뛰어난 스승 밑에서 열심히 공부한 그는 23세 때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었어요. 관리 생활을 하던 중 1863년 고종 임금의 즉위와 함께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이 권력을 잡는 것을 보았어요. 나이 어린 고종을 대신해 흥선 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의 재정을 튼튼히 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펼쳤어요.

그러나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한 무리한 정책을 펼치기도 했어요. 경복궁을 다시 지으며 고액 화폐인 당백전을 발행한 것이 대표적이에요. 당시 사용되던 돈보다 실제 가치가 5∼6배나 되는 당백전이 발행되자 물가가 크게 올랐고,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졌어요. 그러자 최익현은 당시 최고 권력에 있던 흥선 대원군의 정책을 과감히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렸어요. 이 때문에 그는 하찮은 관직으로 밀려나게 되었지만,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되었어요.

이후 관직에서 물러난 최익현은 상소문을 올려 흥선 대원군의 서원 폐지 정책을 강력히 비판했어요. 또한 고종 임금의 나이가 20대가 되었으니 직접 정치를 해야 한다며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의 상소문으로 조정은 발칵 뒤집혔어요. 흥선 대원군의 눈치를 보던 많은 신하가 최익현을 벌주어야 한다고 하였지만, 최익현의 주장을 옳게 생각한 고종은 그를 보호해 주었어요.

결국 흥선 대원군은 10년 만에 최고 권력을 행사하던 자리에서 물러났어요. 최익현의 주장이 실현된 것이지요. 그러나 상소문의 내용이 과격하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지만 고종의 배려로 그는 3년 만에 풀려날 수 있었어요.

일본에 항구를 여는 것을 반대하다

3년간의 제주도 귀양살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최익현은 학문 연구에 몰두하며 평범한 생활을 했어요. 그러나 이러한 그의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어요. 1876년에 일본은 군함을 이끌고 인천 앞바다에서 대포를 쏘는 무력시위를 하며 조선의 개항, 즉 항구를 여는 조약을 맺자고 압박했어요. 그러면서 개항 이후에 서로의 물건을 자유롭게 사고파는 교역을 하자고 했어요.

고종을 비롯해 많은 신하가 일본의 요구를 들어줄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 여러 차례 회의했어요. 그러나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어요.

이러한 소식을 들은 최익현은 붓을 들어 개항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썼어요. 그리고 상소문과 함께 도끼를 들고 고종 임금이 있는 한양의 경복궁으로 갔어요. 받아들이지 않으면 도끼로 자신을 죽여달라는 강력한 의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지요. 경복궁의 광화문 앞에 꿇어앉은 그는 도끼를 옆에 두고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렸어요.

나라의 항구를 여는 조약을 맺게 되면 일본의 값비싼 사치품이 수입되고 쌀과 같은 우리의 생필품이 수출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의 생필품이 부족하게 되어 결국 조선의 경제는 망하게 될 것입니다.
……
저들이 일본인이지만 실제로는 서양 도적과 같습니다. 또한 저들에게 나라의 문을 열게 되면 서양의 종교가 들어오게 되어 우리의 아름다운 풍속을 해치게 될 겁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저는 목숨을 걸고 나라의 문을 여는 조약을 맺는 것에 반대합니다.

<궁궐 앞에서 조약 체결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린 최익현의 모습>   

당시 다른 나라의 문화나 상품을 받아들이는 것에 관심을 가졌던 고종은 최익현의 상소문을 달가워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결론이 나지 않은 나라의 정책에 대해 예의 없이 도끼를 가지고 임금이 행차하는 길옆에 엎드려 상소문을 올렸다며 최익현을 귀양보냈어요.

흑산도에서 귀양살이하던 하던 최익현은 1879년에 풀려났어요. 집으로 돌아온 그는 한동안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학문 연구에만 힘썼어요.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비판하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최익현에게 더는 참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어요. 청일 전쟁(1894∼1895)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침략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였어요.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은 러시아를 내세워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어요. 당시 고종을 가장 도와주고 조언을 해준 사람은 바로 왕비(후의 명성 황후)였어요.

그러자 일본은 조선에 대한 침략을 성공시키기 위해 명성 황후를 시해하는 참혹한 일을 저질렀어요. 이어서 친일 관리를 내세워 여러 정책을 펴게 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단발령이었어요. 단발령은 짧은 머리가 위생적이고 일상에서 작업 효율을 높여준다는 구실로 머리의 상투를 자르라고 명령한 법이었는데, 일본의 강요로 고종도 상투를 잘랐어요.

왕비를 국모, 즉 나라의 어머니라고 여기는 조선의 백성들에게 을미사변은 참을 수 없는 사건이었어요. 또한 부모님이 물려주신 몸을 훼손하지 않는 것을 효의 으뜸으로 삼는 유학자들에게 단발령은 불효막심한 행동을 요구하는 법이었지요.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항일 의병이 일어났어요. 최익현 또한 오랜 침묵을 깨고 상소문을 올렸어요.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는 자를 수 없다.’

<단발령 시행을 묘사한 조선 말기 풍속화가 김준근의 그림과 단발한 고종의 모습>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국사편찬위원회

또한 일본의 이익에 협조하는 친일 관리들의 처단을 주장했어요. 고종은 유학자들의 존경을 받았던 최익현에게 의병의 해산을 요청하는 일을 부탁했어요.

“저들은 모두 충성과 의리를 앞세운 백성들입니다.”

최익현은 의병을 감싸주며 고종의 명을 거부하였어요.

이후에도 최익현은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상소문을 올렸어요. 상소문을 통해 최익현은 나라의 전통 질서를 지키고 침략에 앞장선 일본과 친일 관리들을 비판했어요.

을사늑약에 맞서 항일 의병을 일으키다

1904년 러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침략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어요. 대한 제국의 영토를 일본이 군사적 목적으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강요하였고, 대한 제국의 살림살이를 맡는 재정 분야를 일본인과 상의해서 결정하도록 했어요. 이러한 상황을 고쳐보고자 고종 황제는 비밀 편지를 최익현에게 보내 도움이 되는 말을 해달라고 했어요.

최익현은 궁궐로 가서 고종 황제에게 다섯 가지의 개혁안을 올렸어요. 그러나 그의 개혁안은 반영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일본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어 고향으로 강제로 보내지기도 하였어요.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 황제에게 나라의 외교권을 포기하라고 강요했어요. 결국 친일 관리를 내세운 일본에 의해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겨준다는 을사늑약이 강제로 맺어졌어요.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는 등의 외교 활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거의 식민지 상태와 다름없는 것으로 우리의 주권을 빼앗긴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어요.

<을사늑약 체결 후 모인 일본 관계자들 : 가운데 동그라미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   
서울역사박물관

이러한 상황에서 최익현은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려 을사늑약은 일본의 강요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했어요.

“우리나라가 스스로 외교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면 이것은 나라가 없고 임금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라가 없고 임금이 없게 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노예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의 노예가 된다면 살아도 죽는 것만 못합니다.”

“폐하! 을사늑약에 협조한 이완용, 박제순,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 등의 친일 관리, 즉 을사 5적을 처단하십시오. 폐하께서 직접 조약이 무효라는 것을 선언하고, 외국 대사관들이 철수하기 전에 조약이 무효라는 글을 전달해야 합니다.”

상소문을 통한 자신의 주장이 반영되지 않자, 최익현은 직접 의병을 일으키기로 했어요. 그는 전국 각지의 이름난 유학자들에게 글을 보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요청했어요. 또한 세금 내는 것을 거부하고, 일본의 기술로 만들어진 철도 이용도 거부하며, 일본 상품도 사지 말자며 주장했어요. 특히 하루빨리 의병을 일으켜 일본과 싸우자고 호소했어요.

이러한 그의 호소에 여러 유학자와 농민들이 참여했어요. 그는 74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직접 의병장이 되어 전라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어요. 그가 이끈 의병은 큰 싸움 없이 태인을 점령하여 그곳의 무기와 세금을 접수했어요. 이어 전라북도 정읍에 도착해 무기와 병력을 늘렸어요. 나아가 주민들의 환영 속에 전라북도 순창까지 점령하였으며, 전라남도 곡성에 가서 일본이 만든 관청도 철거했어요.

그러자 일본의 압력에 굴복한 대한 제국은 군대를 보내 진압 작전을 전개했어요. 결국 병력과 무기에서 일본군을 당할 수 없었던 최익현의 의병은 패배하였고, 최익현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어요. 그 후 최익현은 일본군 사령부로 넘겨졌어요. 일본은 최익현을 달래기도 하고 겁도 주며 일본에 협조하라고 했어요. 최익현은 일본의 침략에 반대한다는 자기의 뜻을 꺾지 않았어요. 결국 최익현은 쓰시마섬에 귀양 가게 되었지요.

<쓰시마섬으로 유배가는 최익현>   
국사편찬위원회

일본 쓰시마섬의 감옥에서 단발을 강요당한 최익현은 이를 거부하며 단식을 했어요. 결국 일본이 오해라며 단발령을 거두어들이자 그제야 최익현은 단식을 중단했어요. 그러나 74세라는 나이로 인해 병을 얻었고, 결국 쓰시마섬에 간지 4개월여 만에 순국하였어요. 이듬해 그의 유해가 우리나라로 돌아왔어요.

최익현은 조선 말기에 전통 질서를 지키려는 굳센 의지의 유학자이자 일본의 침략에 맞서 목숨을 바쳐 의병을 일으킨 애국자로 평가받고 있어요. 이와는 달리 당시 세계정세의 흐름을 파악해 외국의 이로운 것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전통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한 고집 센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지요. 여러분이 당시 최익현과 같은 시대에 살았더라면 어떤 선택을 할 건가요?

[집필자] 방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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