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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 대한의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서울 마포구)>   

“소문 들었나? 고종 황제의 밀사가 푸른 눈의 외국인이라 하던데.”

“그렇지 않아도 일본이 그 외국인을 더 눈엣가시처럼 여긴다는군.”

“그나저나 고종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특명이 잘 되었어야 하는데…”

일본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의 주권을 빼앗고자 하는 때였어요. 고종은 이를 막기 위해 비밀리 특사를 파견하고자 하였지요. 그런데 하필 고종은 왜 외국인에게 이토록 중요한 일을 맡겼을까요? 이 외국인이 조선에 온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는 어떤 일을 하였을까요?

조선과 처음 만나다

1886년 7월 4일 한 척의 배가 조선의 제물포항에 도착했어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한 지 한 달여 만이었어요. 이 배에서 푸른 눈의 한 외국인이 내렸어요. 그가 바로 호머 헐버트였어요. 23살 청년 헐버트는 이렇게 조선에 첫발을 내디뎠어요.

‘아, 여기가 조선이라는 나라구나!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미국 동북부 출신의 헐버트는 엄격한 교육자 집안에서 자랐어요.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어요.

이때 조선 정부는 미국 정부에 교사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어요. ‘조선’은 머나먼 아시아의 동쪽 작은 나라였어요. 그가 그 나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곤 세계 지리를 공부하다 본 ‘코리아(Korea)’라는 이름이 전부였어요.

하지만 헐버트는 망설임 없이 바로 조선에 갈 것을 결심했어요. 낯선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그의 가슴을 뛰게 하였어요.

‘이 새로운 도전과 모험은 놀랍고도 매력적인 기회가 될 거야.’

헐버트는 긴 여정으로 몸은 비록 지쳐 있었지만, ‘조선’이란 나라에 대한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피곤함을 느낄 수 없었어요. 그는 낯설고 신기한 광경을 보며 힘차게 한양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였어요.

육영공원의 교사가 되다

헐버트는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어요. 육영공원은 1882년 조선이 미국과 조약을 맺은 이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국립학교였어요.

헐버트가 육영공원 학생들과 처음 인사하는 어느 날이었어요. 학생들은 긴장한 듯 보였고 그래서인지 분위기가 무거웠어요. 이내 헐버트는 용기를 내 서투른 한국말로 인사를 하였어요.

“아~뇽 하세요. 나는 미쿡에서 온 헐버트임니다.”

그 순간 모두가 우하하 하며 웃음을 터뜨렸어요. 분위기는 금세 부드러워졌지요. 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어요.

<학생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헐버트>   

헐버트는 학생들이 공부에 흥미를 갖도록 최선을 다했어요. 우선 그는 오대양 육대주를 재미있게 설명하여 주었어요. 학생들은 새로운 세계에 흥미를 보이며 영어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어요.

학생들이 영어로 글을 쓰는 것은 아주 잘했어요. 그러나 영어 발음은 힘들어했어요. 헐버트는 학생들의 영어 발음 훈련에 정성을 다했어요. 영어 암송 시간을 따로 두어 영어 문장을 끝내야만 집에 가도록 할 정도였어요.

헐버트는 학생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한글을 터득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어요. 그는 한글을 배우기 위해 자비로 한글 선생을 따로 고용하였어요.

헐버트가 육영공원에서 보낸 5년은 한국의 진가를 발견하는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또한 그의 인생을 한국에 대한 사랑으로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값진 시기였어요.

한글의 매력에 빠지다

헐버트는 조선에 오자마자 열정적으로 한글을 공부하였어요. 한글을 배우기 위해 자비로 한글 선생을 따로 고용할 정도였어요. 그는 점점 한글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어요. 급기야 한글 공부 3년 만에 한글 교과서를 저술할 정도의 수준까지 되었어요.

헐버트는 어느 한글학자 못지않게 한글이 과학적이고 간편하며 독창적으로 만들어진 음성언어라는 점을 발견하였어요.

“한글은 영어와 달리 발음기호가 없고, 자음과 모음의 조합이 간편하여 쓰기와 말하기가 세계 어느 언어도 따라 올 수 없을 만큼 쉽다.”

『사민필지』 서문에서 헐버트는 한글의 우수성에 비해 애용되고 있지 않는 현실을 참으로 안타까워했어요.

“아, 안타깝도다. 조선 사람들은 한글이 이렇게 훌륭한 줄도 모르고 도대체 왜 오히려 한글을 업신여긴다는 말인가?”

헐버트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점점 빠져들었어요. 특히 한글을 사랑하여 한글에 대해 많이 연구했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월간지에 ‘한글’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어요. 그는 논문에 한글 창제 당시 세종대왕의 생각을 자세하게 분석할 정도로 한글에 대한 연구가 깊었어요.

헐버트는 1903년 세계 유명 학술지에 한글 창제 과정 및 한글의 우수성을 소개하였어요. 한글의 우수성을 국제사회에 최초로 소개되는 순간이었어요. 논문에서 그는 이렇게까지 말하였어요.

“한글은 대중 의사소통의 매체로서 영어보다 우수하다.”

“한글은 각 자모로 정확하게 소리를 낼 수 있는 완벽한 문자이다.”

<헐버트 부조(서울 종로구)>   

헐버트는 배재학당에서 가르쳤던 주시경과 함께 본격적인 한글 연구도 시작했다. 그는 독립신문에 ‘띄어쓰기’를 도입하여 누구나 읽기 쉬운 한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어요. 그는 한글의 참 가치를 발견한 외국인이었어요.

한글로 쓰인 교과서를 만들다

헐버트는 학생들에게 교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한글의 위대함과 학생들의 지식 함양을 위해 제대로 된 책을 쓰기로 했어요. 1889년 조선에 온 지 3년 만에 그는 한글로 쓴 교과서를 만들었어요. 책 이름은 ‘선비와 백성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에서 『사민필지』라 하였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였어요.

헐버트는 『사민필지』를 통하여 세계의 다양한 환경과 정치, 학문 등을 소개하고 앞으로 조선이 나아가야 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어요.

<사민필지>   
국립한글박물관

『사민필지』는 각 교육 기관에서 교재로 썼을 뿐만 아니라, 당시 상류층에게는 인기 서적이었어요. 특히 지금까지 러, 일, 청만 주로 알고 있던 조선인들은 『사민필지』를 통하여 세계 여러 나라를 두루 알게 되었어요.

비밀리 고종 황제의 특명을 받들다

1904년 대한 제국은 일본과 우리나라의 독립과 안녕을 보장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맺었어요. 그러나 일본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더러 군대도 철수 하지 않았어요. 그것은 러일전쟁의 원만한 수행을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지요.

1905년 일본은 예상을 뒤엎고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노골적으로 대한 제국의 주권을 위협하였어요. 급기야 대한 제국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우리나라의 모든 외교권을 빼앗고자 하였지요.

고종은 이 심각한 나라의 위기를 어떻게 하면 벗어날지 고민에 빠졌어요. 그러다 1882년 우리나라가 미국과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이 떠올렸어요. 고종은 대한 제국을 도와 달라는 친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기로 결심하였어요.

‘그래, 미국과 맺은 조약을 근거로 우선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자.’

‘그런데, 이 중요한 임무를 누구에게 맡겨야 한다는 말인가?’

영어를 잘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었고 대한 제국 편에서 상황을 잘 설명해 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어요.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떠올랐어요.

‘옳거니, 헐버트가 있지! 그라면 내가 믿고 맡길 수 있어.’

명성 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진 후 헐버트는 고종을 지키기 위해 불침번까지 섰어요. 또한 그는 위험을 감수하고 조선인 대신 일제의 침탈에 대해 비난을 해왔던 외국인이었지요. 헐버트는 고종이 믿을 수 있는 모든 조건에 들어맞는 인물이었던 것이지요.

<고종의 밀명을 받는 헐버트>   

고종의 밀명은 헐버트에게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어요. 온갖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이 하던 모든 일도 중단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러나 헐버트는 나라와 백성을 향한 국왕의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기꺼이 임무를 맡기로 하였지요.

1905년 헐버트는 고종의 밀지를 품고 은밀히 미국으로 떠났어요. 하지만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고의로 시간을 끌며 헐버트를 만나주지 않았어요. 결국 고종의 친서는 전달되지 못하였어요.

그런데 이 무렵 미국과 일본은 서로 필리핀과 한국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맺고 있었어요. 이미 미국은 일본 편에 있었던 것이지요. 일제의 대한 제국 보호 통치는 기정사실로 된 상황이었어요.

헐버트는 이러한 미국 내 사정을 전혀 모르고 미국에 협조를 구했던 것이에요. 결국 헐버트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헐버트는 이 일에 대해 미국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하였어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정식으로 조약을 맺은 친구의 나라, 한국을 배신한 사람이다.”

헤이그 특사 활동에 기여하다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고종은 특사를 파견하여 고종의 정식 허가 없이 을사늑약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이루진 것임을 폭로하고자 하였어요.

“대한 제국의 억울함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그런데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그 먼 곳까지 어떻게 갈 수 있을까?”

고종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헤이그 특사로 임명하였어요. 그리고 은밀히 또 한 명을 따로 불렀어요. 헐버트였어요.

“미국인 헐버트는 시종 우리의 대한 정책을 방해하는 자이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한국을 위해 반드시 무언가 할 것이다.”

당시 일제는 헐버트가 헤이그에 반드시 갈 것이라 믿고 예의 주시하고 있었어요. 헐버트는 네덜란드로 바로 가지 않고 스위스, 프랑스 등을 방문하였어요. 헐버트가 일제의 시선을 끄는 사이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은 헤이그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어요.

헤이그 특사들이 무사히 네덜란드까지 갈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제의 시선을 끌어준 헐버트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헤이그 특사와 헐버트 박사>   
국사편찬위원회, 국가보훈처

사실 헐버트는 고종의 특별한 밀사였어요. 고종은 헐버트에게 특사 임명장과 함께 친서를 맡겼어요. 당시 대한 제국과 수교를 맺었던 러시아, 영국, 프랑스, 미국 등에 고종 황제의 뜻을 전하기 위함이었어요. 국제 사회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고종의 치밀한 외교 전략이었던 셈이지요.

일본의 방해로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선생은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지 못했어요. 그러자 헐버트는 「만국평화회의보」 편집장이며 우리나라 특사들을 지지하고 있었던 스테드 씨를 만나 평화 클럽에서 대한 제국의 억울함을 알리는 연설을 하였어요.

결국 헐버트는 그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일제에 발각되고 말았어요. 그는 끝끝내 쫓겨나듯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그의 독립 운동은 미국에서도 계속 이어졌어요.

나는 언제나 한국민을 지지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권리와 재산을 빼앗겼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들을 대변할 것이다.

다시 코리아 땅을 밟다

해방 후 헐버트는 대한민국에 초대되었어요. 일본의 박해로 한반도를 떠난 지 40년 만의 일이에요. 그는 긴 여정을 견딜 수 있는 몸은 아니었지만 다시 조선에 갈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어요.

하지만 반가운 마음도 잠시 한국에 돌아온 1주일 뒤인 1949년 8월 5일, 헐버트는 한평생을 통해 그토록 사랑했던 한국 땅에서 눈을 감았어요. 그는 평소 자신이 원한대로 미국 대신 한국에 묻혔어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장례식은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으로 대통령을 비롯한 사회 단체 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장엄하게 치러졌어요. 1950년 3월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을 위해 헌신한 그의 공을 인정하여 건국공로훈장을 주었어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의 건국공로훈장이었지요.

남의 일을 나의 일처럼 열심히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더구나 목숨을 거는 건 더욱 그렇죠. 오늘 우리 함께 외국인 신분을 뛰어넘어 우리나라에 사랑을 갖고 독립 운동에 헌신하신 헐버트가 잠들어 있는 양화진을 방문해 보면 어떨까요?

[집필자] 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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