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미있는 초등역사
  • 근대
  • 이회영
  • 이회영, 만주에서 독립군을 길러내다

이회영, 만주에서 독립군을 길러내다

<이회영 집 터(서울 중구)>   

“형님, 그리고 아우님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지 벌써 3개월이나 지났습니다. 더 이상 이곳에서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인 것 같습니다.”

“네 말이 맞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까?”

“우리 식구 모두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떠나자고 주장한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만주에서 어떻게 독립운동을 했을까요?

한양의 이름난 집안에서 태어나다

이회영은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긴 후 형제들과 함께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에요. 이회영은 1867년 서울의 저동에서 태어났어요. 이회영이 태어난 저동은 오늘날 서울의 중심지인 명동 일대에요.

이회영의 집안은 조상 대대로 높은 벼슬을 했어요. 덕분에 이회영의 형제들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다른 양반집 자제들처럼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유학을 공부했구요. 그러나 이회영은 형제들과 달리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집안에 기쁜 일이 생겼어요. 동생인 이시영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게 된 것이지요.

“시영아! 과거 급제를 축하한다. 나라를 생각하는 훌륭한 관리가 되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형님도 곧 과거를 치르고 벼슬을 하셔야지요.”

“나는 과거를 보지 않을 거야. 유교 경전을 공부하는 것보다 전에 이상설과 함께 배웠던 신학문을 더 공부해볼 생각이야.”

이회영은 이상설보다 3살이 많았지만 둘은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에 살면서 단짝 친구로 지냈어요. 영어와 법학 등 신학문도 함께 공부했지요.

동생이 벼슬을 하게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친한 친구였던 이상설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했어요. 하지만 과거를 보지 않겠다는 이회영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어요.

이회영은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왜 과거를 보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을까요? 아마도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벼슬을 하는 것보다 일반 사람으로서 조선을 근대 사회로 만드는 데 앞장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근대 사상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다

청년이 된 이회영은 근대 학문을 배우기 위해 더욱더 노력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도 나갔고, 조선이 신분차별이 없는 평등한 근대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부터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노력했어요.

“석영 형님은 집에 계신가요?”

“예, 계십니다. 아니 그런데 저희같이 노비에게 왜 존댓말을 하시나요?”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까 당연한 일이지요.”

그는 자신의 집에 있는 노비들에게 존댓말을 쓰는 일부터 시작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집안의 노비들을 자유로운 신분으로 풀어주었어요.

<노비를 풀어주는 이회영>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다

일본은 1876년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이후부터 호시탐탐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 기회를 엿보고 있었어요.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나라들과 전쟁을 벌였어요. 바로 청일 전쟁(1894년~1895년)과 러일 전쟁(1904년~1905년)이에요. 두 전쟁은 모두 일본의 승리로 끝났어요.

특히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일을 본격적으로 진행했어요. 그 중 가장 먼저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았어요. 일본은 군대와 경찰을 앞세워 우리에게 을사늑약(1905년)을 강제로 맺도록 했어요.

을사늑약이 맺어졌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다양한 방법으로 저항했어요. 그중에는 을사늑약을 맺는데 앞장선 5명의 신하를 암살하자는 ‘오적암살단’이 있었어요.

<오적암살단
을사늑약을 체결하는데 일본에게 도움을 준 친일파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등 다섯 명을 암살하려고 했다. 사진의 왼쪽부터 이기, 나철, 홍일주, 오기호이다.>   
대종교총본사

이회영은 ‘오적암살단’이 활동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대며 그들의 활동을 지원했어요. 그러나 몇 차례 거사를 일으켰지만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였고 동지가 체포되면서 실체가 드러나 결국 실패했어요.

한편 이회영은 을사늑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맺어지고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을 인정하는 도장을 찍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들었어요. 국제법을 공부했던 이회영은 이렇게 맺어진 조약이 무효임을 알았어요. 그래서 이 사실을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때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어요.

“우당, 좋은 소식이 있네. 1907년 6월경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세계 44개국이 모여서 만국평화회의를 개최한다고 하네.”

“그게 정말인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릴 좋은 기회이군. 고종 황제 폐하께 이 소식을 알리고 특사 파견을 건의해야겠네.”

이회영은 당시 ‘대한매일신보’라는 신문을 펴내고 있던 양기탁으로부터 만국평화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이회영은 고종 황제를 직접 만나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어요. 그러나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이회영은 고종 황제를 직접 만나는 것을 포기했어요. 그 대신 이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환관을 통해 특사 파견 계획을 알렸어요.

얼마 후 고종 황제는 일본의 눈을 피해 이름이 쓰여 있지 않은 특사 임명장에 황제의 도장을 찍어 보냈어요. 이회영이 추천한 인물을 특사로 파견하겠다는 것이었죠.

헤이그 특사로 임명된 이준은 부산에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어요. 그곳에서 이상설을 만나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러시아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어요. 이곳에서 이위종이 합류하였고, 세 명의 특사는 마침내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했어요. 그리고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주장하는 활동을 펼쳤지만 일본의 방해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어요. 그 후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 삼아 고종 황제를 강제로 물러나게 했어요.

그 후 일제는 1910년 무력을 앞세워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하여 식민지로 만들었어요.

만주에 독립운동의 터전을 마련하다

1910년 12월의 어느 날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이 집에 모여 회의를 했어요. 그들은 식구들과 함께 만주로 가기로 정했어요. 그리고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땅을 비롯하여 자신들이 살던 집 등 전 재산을 팔았어요. 너무 급하게 땅을 팔다 보니 제값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해요.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한 이회영은 1910년 12월 가족들을 이끌고 만주를 향해 길을 떠났어요. 먼저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까지 갔어요. 그리고 압록강을 건너 10대의 마차에 나누어 타고 목표로 한 만주 삼원보 근방까지 갔어요. 이곳까지 오는데 약 한 달 쯤 걸렸다고 해요.

<만주로 갈 것을 의논하는 이회영과 형제들>   

만주에 도착한 이회영은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항일운동단체를 만들고 독립군을 길러내기 위한 학교인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를 세웠어요.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3500명쯤 되었다고 해요. 이들은 훗날 독립군으로 크게 활약을 해요. 대표적으로 ‘청산리 대첩’을 들 수 있어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길러내던 이회영은 1913년 다시 국내로 돌아왔어요. 부족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고종을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시키기 위해서였지요. 망명은 정치적인 이유로 자기 나라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 박해를 피하고자 다른 나라로 몸을 옮기는 것을 말해요. 베이징에 있던 이시영이 고종이 살 곳을 마련했어요.

그런데 고종의 망명은 이루어지지 못했어요. 1919년 1월 고종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지요. 그 후 이회영은 베이징으로 다시 돌아와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해 노력했어요.

베이징에서의 독립 운동은 쉽지 않았어요. 독립자금으로 가져온 돈이 바닥나서 생활이 무척 힘들었거든요. 점심 한 끼로 하루를 버티고 추운 겨울에도 불을 때지 못해 차가운 방에서 지내는 날이 많았어요. 그러나 이회영은 실망하지 않고 꿋꿋하게 독립운동을 펼쳐나갔어요.

그러던 중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여 ‘만주국’이라는 나라를 세웠어요. 일본이 만주를 차지하자 그곳에서의 독립운동은 점점 어려워졌어요. 당시 상하이에 머물고 있던 이회영은 만주의 일본군 사령관을 처단하고 그곳에 활동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만주로 가기로 했어요. 이회영의 아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은 위험하다며 말렸지만 그의 굳은 결심을 꺾지 못했어요.

마침내 이회영은 1932년 11월 배를 타고 다롄 항을 향해 떠났어요. 그런데 이회영은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어요. 일본 경찰은 조선인 밀정을 통해 이회영이 이곳에 오는 것을 미리 알았던 거예요. 감옥에 갇힌 이회영은 모진 고문을 받다가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요.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난 이회영의 다른 형제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선산을 지키기 위해 귀국한 첫째 형과 바로 아래 동생인 이시영을 제외한 형제 대부분이 중국 땅에서 죽음을 맞이했어요. 이시영은 이회영이 죽은 후에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했어요. 특히 그는 김구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활동했어요. 광복 후에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들과 함께 귀국하였고, 정부 수립 후 초대 부통령이 되어 활동했어요.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은 집안의 전 재산을 독립군을 길러내는 데 사용했어요. 또 자신들의 목숨도 기꺼이 내놓았죠. 사람들은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어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무슨 뜻이냐고요?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는 뜻이에요.

만약 여러분이 이회영과 같은 시대에 살았더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우당 이회영>   
국사편찬위원회

[집필자] 김현숙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