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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탁, 다양한 방법으로 일제에 맞서다

<한국언론진흥재단(서울 중구)>   

“일본이 대한 제국의 국권을 빼앗아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비밀운동 단체를 만들어 항일 운동을 해야 합니다.”

“나도 도산과 같은 생각이오. 우리와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신민회를 만듭시다.”

도산은 안창호 선생의 호예요.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를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일제에 맞서 어떤 독립운동을 펼쳤을까요?

영어를 번역하는 나랏일을 맡다

양기탁이 바로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를 만드는 데 앞장선 사람이에요. 양기탁은 1871년 평양에서 태어났어요. 어릴 때부터 기억력이 뛰어나 한번 들은 것을 잘 잊어버리지 않았다고 해요. 양기탁은 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웠고 15살이 될 무렵 한성에 왔어요.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기 위해서였죠.

때마침 한성에는 외국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세워졌어요. 이 학교는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에서 일하는 의사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양기탁은 이 학교에서 처음으로 영어 공부를 했어요.

그러던 중 아버지와 함께 미국인 선교사 게일 박사를 만났어요.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데 꼭 필요한 사전을 만들려고 해요. 기탁 군과 아버님이 도와주면 좋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외국인 선교사 게일은 양기탁의 도움으로 6년 만에 『한영자전』이라는 이름의 사전을 완성했어요. 양기탁은 사전 만드는 일을 도운 덕분에 영어 실력이 부쩍 늘었어요.

<영어사전 편찬을 돕는 양기탁>   

양기탁은 선교사의 소개로 일본과 미국을 여행할 기회를 얻었어요. 3년 동안 여행하며 견문을 넓힌 후 1903년 우리나라에 다시 돌아왔어요. 당시 우리나라는 고종이 대한 제국을 선포(1897년)하고 황제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던 시기였어요.

33세의 나이에 대한 제국에 돌아온 양기탁은 미국인이 운영하던 한성전기회사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양기탁이 영어를 잘한다는 소식을 들은 고종은 그를 황실 외교 담당 부서인 궁내부 예식원의 영어 통역관으로 임명했어요. 양기탁은 일본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이 맺어질 무렵까지 그곳에서 일했어요.

영국인 베델과 함께 신문을 발행하다

을사늑약이 맺어진 직후 양기탁은 영어 번역을 하던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어요. 그 이유는 그가 발행하던 신문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글이 실렸기 때문이지요. 그 신문이 뭐냐고요? 바로 ‘대한매일신보’에요. 대한매일신보는 고종 황제의 개인 돈인 내탕금과 몇몇 사람의 자금을 지원받아 1904년에 세워진 신문사에요. 일제의 검열을 피하려고 영국인 기자 베델을 사장으로 임명했어요.

대한매일신보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를 강요한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어요. 또 을사늑약이 무효라는 내용을 담은 고종 황제의 문서가 다른 나라에 전달되었다는 사실도 알렸지요. 대한매일신보가 이런 활동을 펼치는데 양기탁은 큰 역할을 했어요.

그러니 양기탁을 좋게 볼 리 없었던 일본 정부가 고종 황제에게 압력을 넣어 그를 관직에서 물러나게 한 것이에요. 관직에서 물러난 양기탁은 대한매일신보를 펴내는 일에 더욱 힘을 기울였어요.

“오늘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의병 소식 읽었나?”

“나도 읽고 싶어 신문을 사러 갔는데 구할 수가 없었네.”

“벌써 다른 사람들이 다 사 갔나 보군.”

대한매일신보는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는 신문이 되었어요. 항일 운동에 대한 기사가 실리는 날에는 신문이 다 팔려 구할 수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고 해요. 당시 한국인이 만든 다른 신문들은 일본이 만든 법 때문에 일제에 저항하는 글을 쓸 수 없었어요. 그런 기사가 실리면 기사가 삭제되거나 신문 발행이 정지되었거든요.

<베델과 초기 신문사의 모습>   
배설선생기념사업회

그런데 대한매일신보는 이것을 피할 수 있었어요. 공동 발행인 영국인 베델 덕분이랍니다. 당시 일본은 영국과 아주 친한 사이여서 영국 사람이 발행하는 신문에 마음대로 간섭을 할 수 없었거든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다

“일본에 진 빚을 갚지 못하면 우리 땅을 떼어주어야 할 일 생길 수 있습니다. 돈을 모금하여 이를 갚아야 합니다. 이천만 동포가 담배를 끊고 돈을 모으면 일본에게 진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습니다.”

1907년 일본에 진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에서 일어났어요. 대한제국이 일제에게 빌린 돈은 1,300만 원이었어요. 당시 한 해 동안 나라 살림을 하는데 필요한 돈이 약 790만 원 정도였다고 하니 빚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죠.

“국채보상운동은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신문에 이 사실을 알려 사람들이 관심을 두도록 해야 합니다.”

양기탁이 중심이 된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을 나라 곳곳에 알렸어요. 그러자 대구뿐만 아니라 전국에 걸쳐 많은 사람이 이 운동에 참여했어요. 남자들은 모금을 위해 담배를 끊고 술도 마시지 않았어요. 부녀자들은 비녀와 가락지 등을 팔아 돈을 마련했지요. 고종 황제도 담배를 끊겠다고 발표할 정도였어요. 심지어는 일본이나 미국 등 해외에서도 사람들이 운동에 참여했어요.

국채보상운동은 1년 동안 계속되었어요. 그사이 운동을 추진하는 단체가 무려 27개나 생겨났다고 해요. 운동을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여러 단체를 하나로 모아 대한매일신보에 사무실을 두었어요. 대한매일신보의 총무였던 양기탁은 국채보상운동에 함께 참여했어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국채보상운동기념관)>   

그러던 중 일본이 양기탁을 가두고 재판에 넘기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모금한 돈 중 일부를 마음대로 사용했다는 누명을 씌운 거예요. 이후 무죄가 밝혀져 2달 만에 풀려날 수 있었어요. 하지만 국채보상운동은 집요한 일본의 방해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끝나게 되었어요.

신민회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펼치다

“안녕하세요? 저는 양기탁 선생님을 만나 뵙기 위해 미국에서 왔습니다.”

“반갑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로 저를 찾아오셨나요?”

“단체를 만들어 우리 민족의 힘을 키워 주권을 되찾는 방법을 의논하기 위해서입니다.”

“좋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항일운동단체를 만듭시다.”

1907년 4월 미국에서 살던 안창호가 양기탁을 찾아와 항일운동단체를 만들었어요. 단체의 이름은 신민회에요. 일본의 탄압을 피하려고 비밀단체로 만들었어요. 신민회는 우리 민족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평양에 대성학교를 비롯하여 전국 곳곳에 학교를 세웠어요. 그리고 강연회를 열어 근대적 사상을 전파했어요.

<평양 대성학교와 학생들>   
도산안창호기념관

1909년 봄에는 양기탁의 집에서 신민회 전국 간부회의가 열렸어요. 이 무렵 일본의 계속된 탄압으로 의병항쟁이 점점 어려워졌어요. 신민회 간부들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것이에요.

“일본에 계속 맞서기 위해는 의병항쟁을 이어받아 독립군을 길러내야 합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국내에서는 어려우니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세웁시다.”

<만주에 만들어진 독립군 기지와 무관학교>   

신민회의 결정에 따라 양기탁은 1910년 8월 독립군 기지를 어디에 만들지 살피기 위해 직접 만주 지역을 돌아다녔어요. 그래서 결정한 곳이 남만주 삼원보(지금의 지린성 통화시 류허현)였어요. 이회영 일가는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가족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갔어요. 그리고 독립군을 키워내는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를 세웠어요.

그런데 안타까운 일이 생겼어요. 독립군 기지를 건설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양기탁을 비롯하여 신민회의 주요 인물이 체포되었어요. 안중근 의사의 사촌인 안명근이 독립군 자금을 모금하다가 잡혔는데 일제가 이 사건을 꼬투리 삼아 신민회 회원들을 잡아들인 것이죠.

일제는 신민회 회원이 일본의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고 사건을 조작했어요. 그래서 전국적으로 600여 명을 체포하고 그중 105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어요. 105명에는 양기탁을 포함한 신민회 회원들이 많이 포함되었어요.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 사건(또는 105인 사건)’으로 양기탁은 10년 징역형을 받았고 신민회는 사실상 해체될 수밖에 없었어요.

중국에서 독립 운동을 전개하다

양기탁은 감옥에서 4년간 있다가 1915년에 석방되었어요. 일제는 그가 독립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평안남도의 한 시골에서 살게 하며 감시했어요. 양기탁은 일제의 눈을 피해 그곳을 탈출하여 만주로 가서 사람들을 모아 독립 운동을 했어요.

그러다 1918년 중국 톈진에서 일제에 붙잡혔어요. 양기탁은 다시 전라도의 한 섬에서 갇혀 2년간 지냈어요. 그곳에서 3·1 운동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양기탁은 3·1 운동이 끝난 후 풀려나 다시 서울로 왔어요.

“선생님! 동아일보가 창간되었습니다. 고문을 맡아서 신문 발행에 도움을 주십시오.”

양기탁은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했던 경험을 되살려 신문을 펴내는데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어요.

1921년에는 미국 국회의원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역에 나가 “독립 만세”를 외치다 다시 체포되었어요. 양기탁이 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는 충격을 받아 그만 돌아가셨어요.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외출이 특별히 허락되었어요. 양기탁은 이 기회를 이용해 다시 만주로 갔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독립군 단체를 만들어 일제에 저항했어요.

<수형기록표(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있는 양기탁의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만주에서 활동하던 양기탁은 1922년 여러 무장단체를 통합하여 통의부를 창설했어요. 그 후 정의부에서도 활동을 했어요. 정의부는 1924년에 만들어져 만주에 살고 있던 우리 동포의 독립 운동을 이끌었어요.

1930년대 양기탁은 만주를 떠나 어려움을 겪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합류했어요. 1932년 윤봉길의거 이후 임시 정부는 일제를 피해 중국의 이곳저곳으로 이동하고 있었어요. 1934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국무위원이자 대표인 국무령으로 선출된 양기탁은 임시 정부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힘을 보탰어요.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여러 독립운동 정당이 들어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펼쳤어요. 이 때 양기탁은 조선혁명당 대표로 독립운동 정당을 통합하기 위한 노력도 펼쳤어요.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 노력하던 양기탁은 몸이 쇠약해져 1938년 중국에서 숨을 거두었어요. 그 후 55년이 지난 1993년 우리 정부는 중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 그의 유해를 찾을 수 있었어요. 양기탁은 반세기가 지나서야 조국으로 돌아와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혔어요.

양기탁은 청년 시절 영어공부를 좋아한 개화파 청년이었어요. 그러다가 일제가 우리를 식민지로 삼으려 하자 이에 맞서 실력양성운동, 독립군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등 다양한 형태의 독립 운동을 펼쳤어요. 양기탁이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독립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려고 했기 때문일 거예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우강 양기탁의 묘역(국립서울현충원)>   

[집필자] 김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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