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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리다

<독립기념관(충남 천안시)>   

“아들아, 이 돈을 받아라.”

“이게 무슨 돈입니까?”

“이 돈을 독립 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해라. 만약 네가 독립을 보지 못하거든 네 자손에게 똑같이 유언을 남기어라.”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가진 돈을 독립 축하금으로 내놓은 이 분은 누구일까요? 그녀는 살아있을 때 어떤 일들을 했을까요?

남편이 의병 활동하다 세상을 뜨다

이 사람은 바로 일제 강점기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렸던 남자현 선생이에요. 그녀는 1872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어요. 어려서부터 높은 벼슬을 지낸 아버지로부터 공부를 한 덕에 일찍 한글과 한문을 깨치고, 유학 관련 책을 두루 읽었지요.

19세 되던 해 그녀는 안동 사람 김영주와 결혼을 했어요. 하지만 편안한 결혼생활을 하기에는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어요. 1895년에는 일본이 왕비(훗날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일까지 벌어졌거든요. 나라를 구하고자 곳곳에서 의병들이 들고일어나 일본에 맞섰지요. 그녀의 남편도 의병에 참여했어요.

“나라가 망해가고 있는데 어찌 집에 홀로 있을 수 있겠소. 죽으면 지하에서 다시 봅시다.”

남편의 떠나가는 뒷모습에 마음은 아팠지만, 나라를 지키려는 남편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어요. 남자현이 25살 되던 해,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어요. 의병 활동을 하던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이었지요. 그녀는 배 속에 든 아이를 어루만지면서 일본에 대한 복수심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지요.

하지만 남자현은 넋 놓고 슬퍼할 수만은 없었어요. 보살펴야 할 3대 독자인 아들과 늙으신 시부모님이 계셨거든요. 열심히 누에를 기르고 명주를 짜 내다 팔며 집안을 꾸려나가야 했지요. 어찌나 효심이 깊었던지 그녀는 효부상을 받기도 했어요.

<남자현의 가족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3·1 운동이 일어난 후 만주로 건너가다

남편이 죽은 지도 어느덧 23년이 지났어요. 이제 그녀의 아들도 어엿한 청년이 되었지요. 그즈음 남자현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일이 벌어졌어요. 바로 1919년에 일어난 3·1 운동이지요. 3·1 운동을 접한 그녀는 일본에 맞서 남편의 원수를 갚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설 때가 되었음을 알았어요. 얼마 후 남자현은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갔어요.

“내 한 몸 편하자고 가는 것이 아니다. 그릇된 것을 바로 잡으려는 것이다.”

만주로 건너갈 때 남자현의 나이는 48세였어요. 당시로는 자손들의 봉양을 받으며 집에 있을 나이였지요. 그 많은 나이에 그녀가 나라를 구하기 위해 큰 뜻을 품고 만주로 건너간 것은 대단한 일이었어요.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리다

만주로 건너온 남자현은 독립군 부대인 서로 군정서에 가입했어요. 독립군들은 유일한 여성 대원이었던 남자현의 활동에 뜨거운 박수를 보냈지요.

무엇보다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따르던 사람들은 젊은 청년 독립군들이었지요. 그녀는 독립군들이 다치거나 아팠을 때 정성껏 치료하고 간호해 주었어요. 청산리 전투에 참여한 독립군 10여 명이 적에게 쫓겨 숨어 다니다 남자현의 집에 숨어들었어요. 그들 중 일부는 심한 부상을 입고 있었고, 겨울 추위에 대부분 동상까지 걸렸었지요.

남자현은 큰 독에 물을 반쯤 채운 뒤 들어앉아 있게 해 동상을 풀어 주고, 다친 곳을 치료해 주었어요. 따뜻한 음식도 대접해 주었어요. 마치 친어머니처럼 말이에요. 이후 그녀는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리게 되었지요.

<독립군을 치료하는 남자현>   

남자현은 여자교육회를 만들고, 교회도 세웠어요. 여성들을 교육하고, 믿음을 길러 주며 정신을 깨우쳐 주었어요. 또 각 독립운동 단체들이 통합 운동이 지지부진하자 독립운동 단체들을 찾아다니며 통합을 이끌어 냈어요.

그녀는 중국 땅까지 와서 독립운동을 하며 생각의 차이로 독립운동 단체들이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이러한 분열을 막기 위해 두 차례나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써 자신의 독립 의지를 전했어요.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우리나라를 빼앗은 일본과 싸우러 온 것입니다. 같은 민족끼리 분열되어 갈등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당시 ‘세 손가락의 여장군’으로 불렸답니다.

손가락을 잘라 조선 독립의 뜻을 전하다

독립군을 뒷바라지하는 등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던 남자현은 이제는 직접 총을 들고 독립 투쟁에 앞장서기 시작했어요.

1926년 4월 말 어느 날, 서울의 혜화동에 권총을 손에 들고 다부지게 입을 문 한 여인이 두 명의 남자들과 함께 나타났어요. 바로 남자현이었지요. 그들은 사이토 총독을 암살할 계획을 시행하려고 했지요.

때마침 그날은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장례식이 있는 날이었어요. 남자현은 사이토 총독이 올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를 암살하기 위해 작전을 짜고 기다리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녀는 계획대로 총독을 암살할 수 없었어요. 송학선이라는 사람이 먼저 암살을 시도했거든요. 그의 암살 시도는 성공하지는 못했고, 혜화동 일대에는 일본 경찰들이 쫙 깔렸어요. 경비가 철저해지자 남자현은 암살을 시도하지 못하고 눈물을 머금고 만주로 돌아가야만 했지요.

1927년에는 안창호 등 많은 독립운동가가 공산당원으로 몰려 중국 경찰에 체포되었어요. 그러자 그녀는 그들이 석방될 때까지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1931년 10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김동삼이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어요. 남자현과 같은 고향 사람이었던 김동삼은 그녀가 아들과 함께 낯선 만주 땅으로 왔을 때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사람이기도 하지요. 김동삼의 체포 소식을 전해들은 남자현은 그를 구출하기 위한 작전을 펼쳤어요.

김동삼이 국내로 옮겨진다는 정보를 알아낸 그녀는 무장한 채 열차로 숨어들었지요. 하지만 작전은 실패했어요. 이송 날짜가 바뀌어 김동삼이 그 열차에 타고 있지 않았거든요. 김동삼은 결국 몇 년 뒤 서울 감옥(당시 경성형무소)에서 숨을 거두었어요. 그의 죽음은 남자현에게 큰 슬픔이었지요.

<조선 독립을 바라며 혈서를 쓰는 남자현>   

1932년 일본이 만주에 꼭두각시 정권인 만주국을 세웠어요. 이에 대해 세계 여러 나라가 비난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국제연맹은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조사단을 보냈어요. 이 소식을 전해들은 남자현은 우리의 상황을 알릴 좋은 기회라고 여겼지요.

그녀는 왼쪽 무명(넷째) 손가락을 잘라 ‘조선독립원’, 즉 한국은 독립을 원한다는 글을 피로 썼어요. 그리고 글을 쓴 흰 천에다 잘린 손가락 마디를 함께 넣어 전달하려 했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달 과정에서 일제의 방해 때문인지, 어디론가 사라져 뜻을 이루지 못했어요.

단식으로 일제에 저항하다 세상을 뜨다

1933년 2월 말, 하얼빈 교외에 한 거지 차림의 여인이 바삐 걸어가고 있었어요. 바로 남자현이었지요. 그녀는 일본의 만주국 건국 기념일에 주만주국 일본 대사를 암살할 계획이었어요. 하지만 계획이 들통 나 그녀를 미행하던 일본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어요.

“거지 할멈, 당신이 남자현이지!”

일제 경찰에 체포된 남자현은 분했어요. 일제의 심장에 총을 겨누어 보지도 못하고 체포되고 말았으니 말이에요. 체포 당시 그녀는 죽은 남편의 피 묻은 옷을 속에 껴입은 채였다고 해요.

체포된 남자현은 일본 영사관 유치장에 갇혔어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감옥에 갇힌 남자현은 모진 고문을 당했어요. 결국 스스로 죽음으로 일제에 저항하기로 마음먹은 남자현은 15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요.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풀려나게 되었어요.

하지만 몸이 너무 쇠약해진 그녀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62세에 숨을 거두었어요. 그녀는 마지막 순간 아들에게 중국 돈 200여 원을 주면서 우리나라가 독립되면 독립 축하금으로 전달해 달라고 했지요.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

그녀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정신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지요. 마침내 광복 후 1946년 3·1절 기념식 때 특별한 행사가 열렸어요. 바로 그녀의 유언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김구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녀가 남긴 독립 축하금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 측에 전달되었어요. 이 장면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눈시울을 적셨을 거예요.

적지 않은 나이에 여인의 몸으로 무장 항일 투쟁에 뛰어든 남자현 선생. 사실 그동안 그녀의 활동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어요. 남자현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 독립운동가들도 마찬가지였고요. 최근에야 그녀들의 삶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어요.

우리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온몸을 바쳐 독립운동을 펼쳤던 수많은 사람 속에 남자현과 같은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음을 꼭 기억해야 해요.

<하얼빈 외국인 공동묘지에 있었던 남자현의 묘>   
독립기념관

[집필자] 황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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