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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우리의 역사로 일깨우다

<단재 신채호 생가(충남 대전시)>   

“황성신문에 실린 단재 선생의 글을 읽었는가?”

“물론이지. 그분의 글을 읽으면 내 속이 다 시원해진다니까.”

“나라에서도 단재 선생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황성신문』은 1898년 장지연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이 창간한 한문과 한글을 섞어 쓴 진보적인 신문이었어요. 국민들에게 독립사상을 일깨워주는 기사와 논설을 자주 실어 일제에 늘 탄압을 받았지요. 『황성신문』에 글을 쓴 단재 선생은 어떤 분일까요? 그는 신문에 어떤 내용을 실어 사람들을 일깨우려 하였을까요?

민족 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다

1880년 어느 겨울날 충청도 대덕의 산골 오두막집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어요. 이 사람이 바로 단재 신채호 선생이에요. 단재는 신채호의 호에요.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지은 ‘단심가’라는 시에서 따온 말로 지조를 중시한 그의 삶을 엿볼 수 있어요.

신채호의 집안은 콩죽도 배불리 먹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였어요. 하지만 신채호는 열심히 공부하여 1898년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입학했어요.

신채호는 성균관에 입학하고 얼마 뒤 ‘독립협회’에 가입하였어요. 어느 날 성균관으로 ‘만민 공동회를 이끌어 갈 인재를 모신다.’는 초대장이 날아왔어요.

“지금 우리 같은 젊은이들이 나서지 않으면 누가 나서겠나. 나라가 없어지면 우리의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신채호는 만민 공동회에 참여하는 것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 여겼어요. 그는 말 한마디가 나라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백성들을 계몽시키기 위해 앞장서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어요.

신채호는 곧장 계몽운동을 펼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그가 22살이 되던 1901년 동지들과 함께 ‘문동학원’을 세우고, 학생들에게 개화사상과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교육을 하였어요.

“지금 강대국들에게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있습니다! 스스로 힘을 기르지 못하고 뭉치지 못하면 나라를 잃고 노예가 될 것입니다!”

1905년 신채호는 성균관 박사 시험을 보아 당당히 합격하였어요. 박사가 되면 벼슬에 올라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어요. 그런데 신채호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어요.

이 무렵 나라를 구하겠다며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고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한가롭게 벼슬길에 오른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였어요.

신채호는 박사 자리를 내놓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어요. 애국계몽운동이 무엇보다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신채호가 선생으로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사람이 몰려들자 그의 마음도 뿌듯하였어요.

신문에 글을 써 사람들을 일깨우다

1905년 어느 날, 신채호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어요. 독립협회에서 일할 때 가까이 지내던 장지연 선생이었어요. 그는 『황성신문』의 사장이었어요. 그는 넌지시 신채호에게 물었어요.

“그런데 단재, 듣자 하니 지난 봄 성균관 교수직에 임명되었다던데, 어째서 벼슬을 마다하였는가?”

“지금의 어려운 상황에서 나라를 구하는 일이 먼저라 생각합니다.”

“나도 동감일세. 이러다가 나라가 쓰러지고 말 거야. 한성으로 가서 나와 함께 『황성신문』을 이끌어 가면 어떻겠나.”

신채호는 『황성신문』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였어요. 그는 신문에 주로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한다’, ‘백성들은 배워서 알아야 하고, 힘을 키워야 한다’, ‘백성들 모두가 우리나라의 뿌리와 역사를 알아야 한다’ 등의 글을 썼어요.

<신채호의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   

신채호의 뛰어난 문장력과 굽힘 없는 글이 신문에 오를 때마다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어요. 사람들은 신채호의 글에 감동하였고 모이기만 하면 너도나도 칭찬하기에 바빴어요. 이제 신채호의 글은 곧 백성들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었어요.

1905년 을사늑약의 내용이 발표되자 곳곳에서 반대 운동이 일어났어요. 『황성신문』도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논설을 실었지요. 이에 일제는 『황성신문』을 그냥 두지 않았어요. 장지연을 비롯한 신문사 간부들을 구속하고 신문 발행을 정지시켜 버렸어요.

이 때문에 신채호도 『황성신문』을 떠나 『대한매일신보』로 자리를 옮겼어요. 『대한매일신보』는 외국인이 만든 신문이어서 일제의 검열을 받지 않았어요. 그는 『대한매일신보』에 을사늑약과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논설을 계속해서 있었어요.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 논설란에 ‘이날에 또 목 놓아 크게 운다.’라는 논설을 썼어요. 그가 쓴 논설을 읽고 울분을 느끼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사람들은 그의 글을 돌려 읽고 또 돌려 읽었어요. 그의 글은 시름에 잠겨 있는 많은 사람을 일깨웠어요.

우리나라의 역사 영웅을 알리다

신채호는 언론 활동을 하면서도 틈틈이 역사 연구에 힘을 쏟았어요. 역사 연구를 한 것도 나라를 되찾으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신채호는 1908년 고구려의 을지문덕 같은 영웅이 이 땅에 다시 나타나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을지문덕전』을 저술하였어요.

“단재는 학자인데 장군을 더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우리나라가 왜 이 꼴이 되었는지 아직도 모르시오? 힘이 없기 때문이오. 지금 우리나라에 필요한 영웅은 나약한 선비가 아니라, 바로 지혜와 힘이 있고 애국심에 불타는 을지문덕 같은 장군이오.”

<전기를 쓰는 신채호>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에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 전」을 연재하고, 1909년에는 「동국 거걸 최도통 전」도 연재하였어요.

신채호는 이어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동명성왕에 대한 전기도 썼어요. 그는 우리나라 역사 영웅들의 일대기를 통해 사람들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심어 주려고 하였어요.

신채호가 생각하는 영웅은 단순한 영웅주의가 아니었어요.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하지 않는 영웅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가 쓴 역사 영웅들은 대부분 남의 도움 없이 자기 힘으로 나라를 지킨 사람들이었어요.

신채호의 위인 관련 글들에 대한 독자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어요. 격려하는 편지와 고맙다는 인사가 끊이지 않았어요.

<을지문덕전과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   
독립기념관

올바른 역사 연구로 어두운 시대를 밝히다

그 무렵 일본은 우리의 역사와 전통을 하찮은 것으로 바꿔 놓기 위해 일본 학자들에게 우리나라의 역사를 다시 쓰게 했어요. 일본 학자들이 쓴 우리나라 역사책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려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쓴 것이에요. 그런데도 일부 우리나라 학자나 학생들은 이 왜곡된 역사를 옳다고 믿었어요. 신채호는 이런 억지 주장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였어요.

“교활한 일본 학자들은 거짓말을 사실처럼 내세워,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옛날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한 일이 없다는 것은 그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신채호는 힘이 있는 민족이 되려면 애국심을 가진 민족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어요. 애국심을 지닌 민족이 되려면, 사람들이 우리의 역사를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신채호는 ‘역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 「독사신론」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하였어요. 이 글에서 그는 민족주의 입장을 뚜렷이 세웠어요. 호소력을 지닌 문장을 바탕으로 사대주의적인 역사의식을 날카롭게 비판하였지요.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학문을 그르친 사람은 김부식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써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중국이 제일이며, 우리나라는 중국에 빌붙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 놓았다.

신채호는 우리나라 역사 교육에 대해서도 날 선 비판을 이어 갔어요. 일부 학교에서 사대주의적인 역사책을 그대로 흉내 내어 쓴 역사 교과서를 사용했어요. 심지어는 일본인이 쓴 우리 역사를 그대로 담아서 역사 교과서로 만들기도 했어요.

역사 교육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역사는 청소년들에게 우리 민족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떤 길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가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역사는 애국심을 심어주는 학문이다. 그런데 오늘의 역사 교과서는 소년들에게 애국심을 심어주기는커녕 일본의 침략을 어쩔 수 없는 일처럼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왜곡된 역사를 비판하는 신채호>   

이러한 「독사신론」의 글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어요.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던 역사를 바로잡아 주었기 때문이지요. 신문사로 신채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어요. 그들은 신채호를 이 암울한 시대의 위대한 스승으로 존경하기 시작했어요.

신채호의 역사 연구는 사람들에게 애국심과 민족주의 사상을 불어넣으려는 애국 계몽 운동이었어요. 사람들 모두가 애국심을 가짐으로써,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잡아 보자는 독립운동이었어요.

다른 나라 땅에서도 역사 연구는 계속되고

1910년 신민회는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무관학교를 만들기 위해 신민회 간부 일부를 중국으로 망명시키기로 하였어요. 이에 신채호도 가족을 뒤로 한 채 압록강을 건넜어요.

언제 돌아올지도 모를 망명길에도 신채호의 등짐 보따리 속에는 안정복이 쓴 『동사강목』 이라는 역사책이 들어 있었어요. 그는 『동사강목』을 소중히 여기며 읽고 또 읽었어요. 그에게 역사 연구는 또 하나의 독립 투쟁이었어요.

“비록 나라를 잃은 몸이지만 부여, 고구려, 발해의 옛 땅을 직접 발로 밟아 보며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하겠노라.”

1914년 신채호는 서간도의 동창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어요. 그리고 틈만 나면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를 찾아다녔어요.

어느 날 신채호가 고구려 옛 땅인 중국 길림성 집안현(국내성)에 갔을 때였어요. 곳곳에 몇천 개의 왕릉과 귀족의 무덤이 있었어요. 광개토대왕의 능묘도 있었어요. 능의 크기를 잴 기구가 없어 자신의 팔과 발로 능의 둘레와 높이, 넓이를 쟀어요.

“이 많은 유적을 버려두고 고구려와 발해를 왜 우리 역사에서 빼려고 했는가! 왜 우리나라가 반도 안에만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직접 답사를 통해 역사를 연구한 신채호>   

신채호는 고구려의 역사 유적을 직접 눈으로 보았어요. 그리고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한층 깊이 연구하였지요.

이후 신채호는 베이징으로 가게 되었어요. 이곳에 있을 때는 베이징대학 도서관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수많은 역사책을 읽고 자료를 모으며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연구를 할 수 있었어요.

1924년 신채호는 그동안 작업해 왔던 조선사 연구를 정리하여 『조선사』의 총론을 완성하였어요.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바로 여기에 담겨 있어요.

1925년에는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 등의 역사 논문을 동아일보에 발표하였어요. 그는 일련의 역사 논문들을 통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어요.

이렇게 신채호는 중국, 만주, 연해주를 돌아다니는 힘든 망명 생활 속에서도 틈틈이 우리나라 역사 연구에 온 힘을 쏟았어요.

독립을 위해 길이 남을 명문장을 쓰다

1922년 말의 어느 날,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이 신채호를 찾아왔어요. 의열단은 항일 독립운동 단체 가운데서도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어요. 조선총독부의 경찰서와 중요한 일본 기관을 폭탄으로 파괴하고, 조선 총독과 고관들, 친일파, 일본 경찰이나 군대 지휘자를 암살하는 것이 의열단의 독립운동 방법이었어요. 김원봉은 의열단이 세운 계획을 신채호에게 설명하고 도움을 청하고자 했어요.

“선생님께서 의열단의 투쟁 선언문을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의열단은 의열 투쟁에 대한 규범을 갖고 있지 못했어요. 때문에 일본 사람들은 그들을 마치 테러단처럼 생각하고 있었어요.

신채호는 흔쾌히 김원봉의 부탁을 들어 주었어요. 그는 상하이에 있는 의열단 본부의 폭탄 제조하는 곳을 둘러보았어요. 그리고 이곳에 머물며 역사적인 「조선혁명선언」을 쓰기 시작하였지요.

이렇게 한 달여 만에 의열단의 독립운동 기준이 되는 「조선혁명선언」이 완성되었어요. 이 글에서 그는 일본의 야만적 행위를 낱낱이 따져 가며 비판했어요. 또한 일제에 타협하려는 모든 사람을 우리의 ‘적’으로 여겼어요.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 필수 조건을 모두 박탈하였다. … (중략) … 이상의 이유에서 우리의 적인 강도 일본과 타협하려는 자나, 강도 정치 아래에서 기생하려는 생각을 하는 자나 모두 다 우리의 적임을 선언하노라! … (중략) …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의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압박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의열단 단원들은 그 내용과 문장에 감동하였어요. 그들은 이 선언문으로 더욱 힘을 내서 독립운동을 하였지요.

<신채호 어록비(충남 천안시)>   

신채호는 민족의 적을 확실히 정의한 후에 독립운동의 방법을 제시하였어요.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는 외교를 통해, 외국의 힘을 빌려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남의 힘을 빌려 독립을 이룬다면 또다시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다고 여겼어요.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민중 스스로 총칼을 들고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에 영향을 끼친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은 이 시기 독립선언문 중 가장 뛰어난 명문장이라 평가받고 있어요.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하다

신채호는 일제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하면서 독립의 문제가 우리 민족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하였어요. 그는 정부가 없어도 개인의 자유가 온전히 보장되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어요.

신채호는 점차 무정부주의에 대한 생각이 강해졌어요. 이제 나라를 뛰어넘어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뭉쳐야 한다고 생각하였어요. 이윽고 그는 다른 여러 나라의 무정부의자들과 함께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게 되었어요.

‘정부가 있으니까 권력을 잡으려고 싸움을 한다. 정부가 없다면 서로 권력을 잡겠다고 싸우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모든 힘을 독립투쟁으로 모을 수 있을 것이다.’

1928년 신채호는 베이징에서 열린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들의 회의에 참석하였어요. 이 회의에서 독립운동에 쓸 자금 마련을 위해 가짜 돈을 만들기로 하였어요.

신채호는 무장투쟁 자금 마련을 위해 타이완으로 갔다가 그만 일제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어요. 그는 조사를 받는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았어요. 재판 시작 전에 그는 당당하게 말하였어요.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가짜 돈 만드는 일은 나쁜 일이잖소?”

“우리 동포가 나라를 찾으려고 한 일은 모두가 정당하다.”

1930년 신채호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어요. 신채호가 뤼순에서 감옥 생활을 시작하자, 우리나라에 있는 동지와 친구들은 신채호의 국사 연구 업적을 동포들에게 알리는 운동을 폈어요.

<조선사 연구초와 조선상고문화사>   
독립기념관, 한국학중앙연구원

그가 1924년부터 『동아일보』에 발표한 역사 논문들이 묶여서 『조선사연구초』로 나왔어요. 그가 베이징에서 쓴 ‘조선상고사’ 원고들이 『조선일보』에 실렸어요. 또 『조선일보』는 신채호의 역사 논문인 「조선상고문화사」를 1931년부터 40회에 걸쳐 실었어요.

신채호의 글은 많은 사람에게 애국심을 일깨워 주었어요. 출판사와 신문사에는 사람들이 보낸 편지들로 가득 찼어요.

“신채호 선생의 글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가 어떤 민족이며,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 어떤 형편에 놓여 있는가를 알았습니다.”

<감옥에서 역사를 연구하는 신채호>   

힘든 감옥 생활로 신채호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어 갔어요. 그는 병보석으로 감옥에서 나갈 수도 있었지만 거부하였어요. 1936년 2월 신채호는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는 뤼순 감옥에서 홀로 쓸쓸히 숨을 거두고 말았어요.

단재 신채호는 국민을 일깨운 참 언론인이었어요. 또한 올바른 역사를 연구하고 알린 진정한 역사학자였지요. 그리고 그 무엇보다 조국 광복을 간절히 바라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였어요.

만약 신채호가 타이완에서 체포되지만 않았다면, 그의 역사 연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더 알게 되었을까요? 이제 우리도 신채호를 생각하며 우리나라의 역사를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요?

[집필자] 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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