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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청산리에서 크게 승리하다

<백야기념관(충남 홍성군)>   

“이보게, 자네 소식 들었나? 만주에서 일어난 일말일세.”

“들었지. 만주에서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는군.”

“어제는 통쾌해서 잠까지 설쳤다네. 독립군이 참으로 자랑스럽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독립군이 일본군을 크게 물리친 사건이 일어났지요. 독립군이 일본군을 물리쳤던 곳은 어디일까요? 당시 우리 독립군을 이끌었던 장군은 누구일까요?

노비 문서를 불태우다

김좌진의 집안은 충청남도 홍성 지방에서 소문난 부자였어요. 큰 기와집에 많은 노비를 거느렸고, 한 해 농사만 2천 석을 거두어들일 정도였어요. 아버지를 일찍 여읜 김좌진은 13세의 어린 나이에 가장으로서 집안 살림을 떠맡아야 하였어요.

김좌진은 어린 시절부터 글공부보다는 활쏘기, 말타기, 병정놀이를 즐겨했어요. 강직하고 무인적인 성격이 강했지만, 약한 자를 돕는다는 생각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지요.

김좌진의 고향 홍성은 홍주의병이 크게 일어난 곳이었어요. 그는 당시 의병장이었던 김복한으로부터 항일 의식을 익혔으며, 계몽지식인 김석범을 통해 신사상을 접하였어요.

김좌진이 15세이던 어느 날이었어요. 김좌진은 집안 식구들과 노비들을 모두 불러 모아 큰 잔치를 벌였어요.

“오늘부터 우리 집의 노비들은 자유다. 나가서 잘 살도록 하여라.”

김좌진은 잔치가 끝나자 집안에 있는 노비 문서들을 불태웠어요. 그리고 노비들에게 땅을 살만한 돈을 고루 나누어 주었지요. 소작인들에게는 논밭을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고요. 노비들과 소작인들은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라 했어요.

김좌진은 계몽 지식인 김석한을 통해 신사상을 접하게 되었어요. 또한 여러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일찍이 나라 사정에 대해 눈을 뜨고 있었지요. 김좌진은 차츰 깨닫게 되었어요. 나라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을 일깨우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교육 계몽운동을 펼치다

자기 집안의 노비를 먼저 해방한 후, 김좌진은 교육운동에 뛰어들었어요. 교육이야말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호명학교를 세우는 김좌진>   

1907년 김좌진은 고향에 ‘호명학교’를 세웠어요. 자신의 집을 학교 건물로 내놓고 정작 자신은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였지요. 김좌진은 학교를 세워 시대에 맞는 교육을 하고자 하였고, 학생들에게 민족정신과 애국정신을 심어 주고자 하였지요.

김좌진은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였어요. 그는 신교육운동의 전개와 계몽운동 단체에 참여해 국권 회복을 위해 온 힘을 쏟았어요. 청년학우회에 가입하여 한성신보 신문의 이사를 맡았어요. 1909년에는 기호흥학회에 가입해 교육 사업에 활발히 참여하였지요.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펼치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애국지사들은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을 계획 하였어요. 그러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어요. 김좌진 역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자금 모집 활동을 펼치고 있었지요. 그러던 1911년 어느 날 김좌진은 중국에서 온 동지를 만났어요.

“김 동지! 무기 구매 자금으로 10만 원이 필요하오.”

10만 원이라면 당시에는 엄청난 액수의 큰돈이었어요. 김좌진이 이제까지 전국을 돌아다니며 거두어들인 돈은 3만 원이었어요. 땅도 팔았지만, 그래도 5만 원이 부족했어요.

고민 끝에 김좌진은 먼 친척뻘 되는 김종근을 찾아갔어요. 그는 서울에서 손꼽히는 부자였지요. 김좌진은 그에게 현금 5만 원을 부탁했어요. 그러나 그는 딱 잘라서 거절하였어요. 김좌진은 굴하지 않고 거칠게 요구하였지요. 그러자 그는 고함을 치며 경찰에 신고까지 하였어요. 이 일로 김좌진은 경찰에 체포되어 2년 반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지요.

독립군 총사령관이 되다

김좌진은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여전히 격렬하게 항일 운동을 했어요. 그러다 1918년 그는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갔어요. 그리고 그는 만주 지역 독립 운동가와 함께 민족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어요.

1919년 김좌진은 대한정의단에 합류하여 군사 책임을 맡았어요. 그는 대한정의단을 군정부로 확대 개편하고 사령관이 되었지요. 그는 군사를 모집하고 훈련하는데 힘을 쏟았어요. 또한 국외에서 다량으로 무기를 사들여 와 독립군의 힘을 키웠지요.

군정부는 다시 이름을 ‘북로 군정서’로 바뀌었어요. 김좌진은 독립군 부대의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 편성에 힘을 쏟았지요. 또한 군사 학교를 세워 잘 훈련된 독립군 군사들을 길러냈어요.

북로 군정서는 1920년 8월 수천 명 규모의 독립군과 다량의 총기류와 탄환 그리고 군자금 등을 갖춘 만주의 최정예 독립군 부대가 되었어요.

<김좌진과 북로 군정서군>   
독립기념관

일본군에 맞설 준비를 하다

일제는 독립군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두려운 마음이 들었어요. 더구나 지난번 봉오동 전투의 패배로 일본군은 크게 화가 나 있었지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대규모 병력을 보내 독립군을 소탕하고자 하였지요.

한편 김좌진의 독립군은 본부를 장백산으로 옮기기 위해 이동하고 있었지요. 1920년 10월 중순 독립군은 중국 지린성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에 이르렀어요. 일본군의 공격 소식이 들리자, 독립군 부대들도 김좌진 장군을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었지요.

“장군! 시베리아에 출동했던 일본군 부대가 장고봉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장군! 또 다른 일본군 부대가 함경북도 나남에서 토문강을 건너 북쪽으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장군! 남만주 철도 일본군 수비대가 송화강을 건너 서쪽으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그 무렵 첩보원들에 의해 일본군의 움직임들이 속속들이 우리 독립군 부대에 보고되고 있었어요. 이들은 독립군을 3면으로 공격할 셈이었어요.

“이번에야말로 적들에게 우리 독립군의 힘을 보여 줄 때다!”

김좌진은 여러 독립군 대장들을 불러 모아 함께 전투 계획을 짰어요. 이곳 청산리 주변은 계곡이 깊어 지형만 잘 이용하면 적은 수의 독립군으로도 대규모 일본군을 무찌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어요.

“장군! 지금 일본군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첩보입니다.”

10월 18일, 드디어 일본군이 청산리 골짜기를 향해 쳐들어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어요.

<청산리 전투가 일어난 곳>   

청산리에서 큰 승리를 거두다

독립군은 청산리 백운평의 울창한 숲 속에 숨어 있었어요. 독립군은 일본군을 숨죽여 기다렸어요. 일본군이 나타나면 일제히 공격할 생각이었지요.

“이제 일본군이 이곳으로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10월 21일 새벽이 밝았어요. 수많은 일본군이 길게 늘어서며 골짜기로 들어서고 있었어요. 일본군은 독립군이 청산리 골짜기 곳곳에 숨어 있는 줄도 모르고 깊숙이 행군해 왔어요. 어느새 청산리 계곡은 일본군으로 까맣게 뒤덮여 갔지요.

이때 어디선가 권총 소리가 들려 왔어요.

“땅! 땅땅!”

이범석 장군의 권총 소리였어요. 독립군은 이 권총 소리를 신호로 일본군을 향해 집중 사격을 시작했어요.

“놈들이 쳐들어왔다! 모두 돌격하라!”

그러자 사방에 숨어 있던 독립군들이 함성을 지르며 우르르 쏟아져 나왔어요. 일본군은 우왕좌왕하였어요.

“적을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독립군의 공격은 더욱 거세어져 갔어요. 청산리 골짜기는 어느새 총소리와 비명으로 뒤섞여 아수라장이 되었지요. 독립군의 기습 공격에 일본군은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었지요.

이 싸움에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일본군과는 달리, 독립군은 사상자가 20여 명에 불과했어요. 큰 승리였어요.

첫 전투에서 진 일본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장기전에 돌입하였어요.

이에 독립군도 작전을 바꾸었지요. 주력 부대가 그대로 백운평에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하룻밤 새 160리(63km)를 강행군하였어요. 그리고 갑산촌으로 후퇴하여 천수평에 있는 기병 중대를 기습하였지요. 이때 도망자 네 명을 제외한 중대장 이하 전원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어요. 또 독립군은 일본군이 어랑촌에 있다는 정보를 얻고 그곳에서 일본군과 맞붙어 싸웠어요. 이틀 밤낮에 걸친 전투에서 독립군은 수많은 일본군을 사살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어요.

<청산리 대첩>   

처음엔 너무나도 많은 수의 일본군 때문에 밀리는 듯했어요. 하지만 다른 독립군 부대들이 합류하자 상황이 달라졌어요. 김좌진 장군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을 거세게 몰아내기 시작하였어요.

청산리에는 며칠간 총소리가 끊이지 않았어요. 일주일 동안 10여 차례의 전투가 치러졌어요. 독립군 부대들은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어요.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군이 청산리 백운평·천수평·마록구 등의 3차에 걸친 싸움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친 싸움을 ‘청산리 대첩’(1920년)이라고 불러요.

청산리 대첩 이후 김좌진은 만주 일대에 흩어져 활동하고 있던 여러 독립군 부대들을 통합하여 나갔어요. 그의 꿈은 더 크고 강한 독립군 군대를 만들어 한반도로 진격하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일본과 러시아의 음모에 휘말려 그의 꿈은 그만 깨어지고 말았어요. 그러나 김좌진은 좌절하지 않고 독립 운동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군을 길러내는 데 모든 힘을 기울였어요.

그런데 1930년 1월 24일 김좌진은 그만 공산주의자가 쏜 흉탄에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고 말았어요.

암울한 일제 식민 시대에 김좌진의 청산리 대첩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통쾌함과 용기를 주었지요. 만약 김좌진의 독립군이 더 커졌다면 우리나라 독립은 더 빨리 이루어졌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독립운동을 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하고 있었을까요?

[집필자] 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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