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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 평생 어린이를 위한 삶을 살다

<잡지〈어린이〉표지>   
국가기록원

“비록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지만 어린이들이 있기에 희망을 품어 봅니다.”

“예. 내일의 희망이 되는 어린이를 훌륭히 키워 내야겠지요.”

“얼마 전에 어린이를 위한 최초의 잡지가 나왔다니 그것을 사서 우리 아이들에게 읽히도록 합시다.”

나라의 미래는 어린이에게 있다는 생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잡지 『어린이』를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왜 『어린이』라는 잡지를 만들었을까요?

재미있는 이야기꾼으로 큰 인기를 끌다

방정환은 1899년 서울 야주개 마을(현재 종로구 당주동)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아버지는 야주개 시장에서 쌀과 생선을 팔던 상인이었어요. 장사가 아주 잘된 덕분에 어린 방정환은 남부러울 것 없이 풍족한 생활을 하며 자랐어요.

방정환은 장난꾸러기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친구들과 어울려 돌아다니다 다치는 일도 많았어요. 하루는 말총(말의 갈기나 꼬리의 털)을 뽑으려다가 말의 뒷발에 차여 크게 정신을 잃은 적이 있었어요. 간신히 깨어난 방정환에게 그의 할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이 녀석! 무엇을 하려고 말총을 뽑았느냐?”

“저는 말총으로 올가미를 만들어 참새를 잡으려고 했어요. 친구들한테 자랑하고 싶었거든요.”

“남의 것을 함부로 빼앗으려고 하면 안 된단다. 억지로 뺏으면 사람이건 짐승이건 반드시 보복하게 되어 있지.”

방정환의 할아버지는 방정환에게 친구 몇 명을 즐겁게 해주려고 장난을 치기 보다는 글로 이야기를 써서 더욱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라고 충고해 주셨어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방정환은 할아버지의 충고에 귀를 기울였고, 이때부터 이야기를 짓기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어요.

방정환은 다섯 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웠어요. 또래 아이들보다 일찍 한문을 깨우치고 나니 학교 공부가 하고 싶어졌어요. 하지만 나이가 어려 신식학교에는 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신식학교인 보성소학교에 다니는 삼촌의 공책을 몰래 숨겨 놓았어요. 그리고 그것을 가져다준다는 핑계로 삼촌 학교로 찾아갔어요. 보성소학교에 들렀다가 우연히 교장 선생님을 만났고, 방정환은 당차게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사정했어요. 방정환을 기특하게 여긴 교장 선생님은 웃으며 허락해 주었어요.

당시 보성소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은 댕기를 자르고 머리를 깎아야 했어요. 머리를 깎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했던 할아버지는 매우 화를 내며 입학을 반대했어요. 그러나 방정환의 굳센 마음을 확인한 후 손자의 뜻을 존중하여 학교에 다니는 것을 허락해 주셨어요.

아홉 살 되던 해에, 방정환은 이웃 어른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았어요. 그것은 아주 비싼 환등기였어요. 환등기는 스크린에 사진과 그림을 비춰주지만 음성(말)은 나오지 않는 기계에요. 그 이웃 어른은 방정환이 친구들을 모아 여러 이야기를 재미나게 들려주는 장면을 본 후 환등기를 선물한 거예요.

불빛을 비추면 벽에 그림이 나타나는 환등기는 당시에 사람들에게 큰 구경거리였어요. 사람들이 마당에 가득 차면 방정환은 변사(환등기 화면을 보며 이야기해주는 사람) 흉내를 내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어요. 환등기 그림에 방정환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더해져 방정환은 재미있는 이야기꾼으로 소문났어요.

1908년 방정환은 불과 열 살 때 소년들로 구성된 모임을 만들어 동화 구연, 토론회, 연설회 등을 펼쳤어요.

<이야기꾼 방정환>   

어린이들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다

보성소학교를 거쳐 미동보통학교를 졸업한 방정환은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했어요. 그러나 이듬해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갑자기 어려워지는 바람에 방정환은 정든 집을 떠나야 했어요. 그리고 물을 긷는 것은 물론 고모 집에서 밥 지을 쌀을 얻어오는 등 부모님을 도와 집안일을 도맡아 했어요.

그런데도 집안은 더욱 가난해져 도시락을 싸갈 돈조차 없어서 학교 점심시간에 혼자서 화장실에서 시간을 보냈어요. 게다가 어머니마저 병을 얻어 자리에 눕는 바람에 더는 학교에 다닐 수 없었어요.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둔 방정환은 당시 우리나라를 다스리던 조선총독부의 필경사로 취직했어요. 필경사는 서류를 옮겨 적는 직업이에요.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인 밑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지요. 온종일 서류를 베껴 적고 받는 월급 대부분은 가족에게 주었어요.

힘든 생활이 이어졌지만 여러 사람을 접하고 베껴 적는 글들을 읽으며 방정환의 세상을 보는 눈은 점점 넓어졌어요. 그리하여 어려움에 처한 나라의 현실을 걱정하게 되었고, 나아가 우리 민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어요.

이때 방정환은 천도교에 눈을 돌렸어요. 천도교는 최제우와 최시형이 만든 동학에서 비롯된 종교로 인간 존엄을 강조했어요. 방정환은 매주 천도교 회관에 나가 교리 공부에 힘썼어요.

그러던 어느 날 친분이 있던 민족운동가 권병덕이 방정환에게 충고했어요.

“여보게! 방정환군! 자네는 어찌하여 일본인을 위해 일하는가? 당장 그만두게.”

평소 뜻한 바 있던 방정환은 권병덕의 권유에 조선총독부 필경사 일을 그만두었어요. 이후 권병덕은 방정환을 천도교를 이끌던 3대 교주 손병희에게 소개했어요. 손병희는 방정환에게 천도교 본부에서 일하게 해주었어요. 방정환의 눈빛이 살아있다고 느낀 손병희는 유심히 그를 지켜보았어요. 하루는 손병희가 방정환에게 물었어요.

“자네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저는 아이들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나라가 바로 서고 나아가 독립을 하려면 이 땅의 아이들이 올바르게 자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훌륭한 생각이야. 자넨 이야기를 만드는 데 재주가 있으니, 그 재주를 활용해서 어린아이들을 위해 할 일을 찾아보게나.”

얼마 후 손병희의 셋째 사위가 되었어요. 이후 방정환은 본격적으로 어린이들을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을 펼쳤어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어요. 너나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거리로 나왔어요. 방정환도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 거리로 나와 만세 운동을 벌였어요.

<덕수궁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는 사람들>   
독립기념관

그러다 많은 사람이 일본 경찰에 의해 잡혀가거나 다치는 모습을 보았어요. 방정환은 동료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리라 다짐하고, 발행이 멈춘 채 방치되었던 조선독립신문을 생각해 냈어요. 방정환은 등사기를 구해와 만세 운동 관련 기사를 쓴 신문을 찍고, 밤에는 일일이 들고 밖으로 나가 집집마다 일일이 배달했어요. 결국 방정환은 잡혀가 고문을 받았어요. 다행히 방정환은 증거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경찰서에서 1주일 만에 풀려나올 수 있었어요.

방정환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일본 유학을 결심했어요.

‘그래. 일본으로 가자. 호랑이 굴로 들어가 보는 거야.’

1920년 일본으로 유학 간 방정환은 도요대학에서 아동 문학과 아동 심리학 등을 공부했어요. 공부하면서 어린이들에게도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유학 도중 방정환은 틈틈이 세계의 유명 동화집을 번역했어요. 방정환은 세계 각지의 이야기를 우리나라 어린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었어요. 그 결과 1922년 우리나라 최초의 동화집 『사랑의 선물』이 나왔어요. 이때부터 그는 강연을 다니며 '어린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방정환>   
국가보훈처

“아들놈, 딸년, 애새끼로 불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그 나이에 알맞은 존중받는 이름을 붙여 줍시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린이’라는 말을 사용합시다.”

방정환의 주장은 많은 사람의 호응을 받았고, ‘어린이’라는 말은 빠르게 퍼져 나갔어요.

잡지 『어린이』를 만들다

『사랑의 선물』이 어린이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게 되자 1923년에 방정환은 『어린이』라는 잡지를 만들었어요. 『어린이』는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어요. 1925년 서울 인구가 30만 명이었는데, 월간 잡지 『어린이』의 당시 판매량이 10만 권이나 되었어요.

이처럼 큰 인기를 끌었던 건 독자를 사로잡은 방정환만의 특별한 구성 덕분이었어요. 『어린이』의 인기 있는 유머코너의 지은이는 깔깔박사였고, 탐정 소설의 지은이는 북극성이었으며, 외국 동화의 번역가는 몽중인이었어요. 그런데, 이들 세 명 모두가 바로 방정환 한 사람이었어요.

방정환은 약 39개에 이르는 작가 이름을 사용하며 직접 잡지 연재에 힘썼어요. 어린이를 위한 글을 쓸 작가가 부족한 당시 상황에서 방정환은 다양한 필명을 사용하며 독자의 흥미를 높였어요.

또한 방정환은 조선 8도 윷놀이 판, 금강산 게임 말판, 세계일주 말판놀이 등 어린이의 흥미를 끄는 다양한 부록을 증정하기도 했어요. 이 부록은 단순한 놀이가 아닌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의식을 기르고 나아가 온 세계를 알도록 하려는 목적과 즐거움이 함께 잘 갖춰져서 큰 인기를 끌었어요.

그러나 우리나라를 식민지배하고 있던 조선 총독부는 방정환의 활동이 일종의 독립운동이라고 의심했어요. 일본 아이가 아닌 한국 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건 아주 위험한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300여 곳에서 판매되던 『어린이』를 몰수하였어요.

당시 방정환의 활동에 대해 그의 친한 친구였던 진장섭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해요.

“당시 방정환과 우리는 일본인들의 경계를 피해 겉으로는 어린이들의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실제로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을 일깨워주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방정환의 목표를 간파한 일제는 『어린이』를 철저하게 검열했어요. 검열 때문에 발행 일자를 못 지키기 일쑤였고 수많은 원고들이 통째로 삭제 당했어요.

한편, 방정환은 독자 초청 행사를 만들어 편집일이 없는 날엔 밖으로 나가 정기적으로 동화 구연을 하였어요. 그의 동화 구연은 매우 큰 인기를 끌었고, 그를 보기 위해 천명 이상이 모이기도 하였어요.

<방정환의 동화 구연>   

어릴 때부터 이야기하는 재주가 남달랐던 그는 청중들을 웃고 울리는 재주가 뛰어났어요. 일제 경찰의 의심을 받아 감옥에 갔을 때에도 죄수들에게 얘기를 너무 재밌게 해 줘서 나중에 석방될 때 다른 죄수들과 간수들이 그를 못 가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져요. 심지어 그를 감시하기 위해 그의 강연에 항상 참석했던 일제 경찰도 그의 동화 구연을 듣다 자기도 소리 내며 울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져요.

그러나 『어린이』를 한국 어린이들의 독립의식을 높이는 것으로 생각한 일제의 탄압은 갈수록 심해졌어요. 그럴수록 어린이에 대한 방정환의 사랑은 더욱 깊어졌어요.

‘이럴 게 아니라 어린이를 위한 날을 만들자.’

<1920년대 발행된 어린이날 포스터>   
국사편찬위원회

방정환은 함께 일하던 사람들과 어린이날 행사를 여는 것에 관해 의논했어요. 그 결과 5월 1일이 어린이날로 정해졌어요. 어린이날이 지금처럼 5월 5일로 바뀐 것은 1956년의 일이지요. 노동자의 날로 알려진 5월 1일과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지요. 제1회 어린이날 행사는 천도교 강당에서 열렸어요. 천여 명의 어린이가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어요. 방정환은 어린이날을 만든 목적에 대해 연설했어요.

“어린이는 이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갈 기둥입니다. 어린이들이 바르고 귀하게 자랄 수 있도록 우리 어른들이 있는 힘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하루하루 방정환은 바쁘게 일을 했어요. 자신의 건강도 돌보지 않은 채 어린이를 위한 여러 일을 하면서 방정환의 몸은 갈수록 약해졌어요. 방정환은 잡지 발행, 강연 등으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던 탓에 갈수록 야위어졌어요. 또한 일제 경찰의 방해로 『어린이』를 펴내는 자신의 잡지사가 심한 빚에 시달렸고, 그 일로 큰 고통을 받았어요. 그로 인해 매년 치르던 어린이날 행사도 제대로 치를 수가 없었어요.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이 잡지사로 출근하던 그는 더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어요. 병원에 입원한 지 일주일 되던 날 방정환은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어요.

“문 앞에 검정말이 모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 왔으니 가야겠소.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

동화 속으로 길을 떠나듯 방정환은 그렇게 눈을 감았어요. 서른두 살이라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어린이를 위한 불꽃 같은 그의 열정은 지금까지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어요.

“부인! 내 호가 왜 소파인지 아시오? 나는 여태 어린이들 가슴에 ‘작은 파도’를 일으키는 일을 했소. 이 파도는 날이 갈수록 커질 것이오. 뒷날에 큰 파도인 대파가 되어 출렁일 것이오.”

우리는 흔히 ‘어린이날’이 엄마, 아빠에게 용돈 받고 놀이공원 가는 노는 날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어린이날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까닭은 방정환 덕분이 아닐까요? 평생을 어린이를 위해 살아온 방정환 선생의 삶을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집필자] 방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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