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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감옥에서도 독립 만세를 외치다

<서대문형무소(서울 서대문구)>   

“기차 소리가 ‘동전 한 푼, 동전 한 푼’ 하는 것 같지 않니?”

“아니, ‘대한 독립, 대한 독립’ 하는 것 같은데.”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네!”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칙칙폭폭, 칙칙폭폭’하는 소리를 ‘대한 독립, 대한 독립’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 이 소녀는 누구일까요? 그녀가 얼마나 대한의 독립을 원했기에 기차 소리마저 그렇게 들렸을까요?

이화학당에 입학하다

이 소녀가 바로 유관순이에요. 유관순은 1902년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났어요. 기독교인이었던 아버지 유중권은 학교를 세워 사람들을 깨우치며 나라를 지키는 운동을 펼쳤어요. 어머니 또한 새로운 교육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 덕분에 여성인 유관순도 교육을 받을 수 있었지요.

유관순의 고향에는 선교사들이 들어와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어요. 그 덕에 제법 많은 사람이 교회를 다녔지요. 그의 삼촌도 기독교를 전하는데 열심이었기에 유관순도 자연히 교회에 나가게 되었지요.

1910년 우리의 국권을 강제로 빼앗아간 뒤, 일제는 총칼을 앞세워 무자비한 통치를 해오고 있었어요.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 운동을 벌였어요. 당시 기독교를 믿는 사람 중에도 독립을 위해 힘쓰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1916년, 유관순은 15살의 나이에 선교사의 추천으로 사촌 언니와 함께 이화학당에 입학했어요. 이화학당은 덕수궁 근처 정동에 위치한 학교였어요. 유관순은 학교에 입학하면서 신학문을 배웠어요. 또한 가까이에 있는 정동 교회에 다니며 자유와 평등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어요.

<유관순의 이화학당 보통과 졸업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학교 담을 넘어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의 문제는 외부의 간섭 없이 민족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했어요. 민족자결주의는 이후 식민지 여러 나라 독립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지요.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는 한국 유학생들이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를 벌였어요. 우리 민족 지도자들도 온 민족이 참여하는 만세 운동을 벌여 우리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고자 준비했어요.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한날이 바로 고종 황제 장례식 이틀 전인 3월 1일이었어요.

1919년 3월 1일, 덕수궁 문 앞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수많은 사람으로 가득 찼어요.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원통한 마음에 고종의 마지막 길을 보기 위해 지방에서 수많은 사람이 올라왔거든요.

민족 대표들은 계획대로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문을 발표했어요. 비슷한 시각, 탑골 공원에서는 독립선언식이 이루어지고 있었어요. 학생 대표가 팔각정으로 올라가 독립 선언서를 읽어 내려갔어요.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은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만세를 불렀지요. 그리고 거리로 나가 소리 높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어요.

거리 시위대에 유관순도 끼어 있었지요. 유관순은 이화학당의 친구들과 함께 ‘학생 결사대’를 결성해 거리로 나갔던 거예요. 3월 1일 만세운동 이후에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할 거라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이화학당은 교문을 걸어 잠갔어요. 그러나 유관순을 비롯한 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학교 담을 넘어 시위에 참여했어요.

<덕수궁 앞 만세 시위>   
독립기념관

유관순은 3월 5일 남대문에서 열린 만세 시위에도 참여했지요. 그날 시위는 학생들이 앞장선 시위로, 앞선 시위 때보다 더 많은 학생이 거리로 나왔지요. 유관순은 일본 헌병에 체포되었지만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곧 풀려날 수 있었어요.

학생들의 시위가 멈추지 않고 계속되자, 일제는 휴교령을 내려 학교 문을 닫게 했어요. 이화학당이 휴교하자 유관순은 사촌 언니와 함께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기차 안에서 들리는 칙칙폭폭 소리는 마치 대한 독립 만세 소리처럼 들리는 듯했어요.

아우내 장터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

고향으로 내려가 보니 아버지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만세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유관순도 주변 지역 학교와 교회를 찾아다니며 뜻을 함께할 사람들을 모았어요. 발이 부르트도록 걷고 또 걸으며 사람들을 찾아다녔지요.

“삼천리강산이 만세 운동으로 들끓고 있습니다. 어찌 우리 동네만 아무 일 없이 잠잠할 수 있겠습니까?”

“만세 운동을 벌이기 전날, 매봉산 봉우리에 봉화를 피울 것입니다.”

유관순의 말대로 매봉산 정상에서 불길이 타오르자, 주변의 20여 곳이 넘는 산봉우리에서 불길이 타오르며 만세 운동이 일어날 것을 알렸지요.

4월 1일 아침, 천안의 병천 아우내 장터에 약 3천여 명에 가까운 많은 사람이 모여 들었어요. 유관순은 사촌 언니, 그리고 남동생과 함께 만든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얼마 후 긴 장대에 큰 태극기가 펄럭였어요. 그리고 한 사람이 나와 독립 선언서를 읽어 내려갔어요. 유관순도 단상 위로 올라가 연설을 했지요.

“나라 없는 백성이 어찌 백성이라 하겠습니까? 다 같이 독립 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

그녀의 외침에 아우내 장터에 모인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태극기를 흔들며 소리 높여 만세를 불렀어요. 장터는 펄럭이는 태극기와 드높은 만세 소리로 가득했어요. 시위대 맨 앞에는 유관순의 아버지가 서 있었지요.

<아우내 장터에서의 만세 운동>   

아우내 장터의 만세 운동 소식을 전해 들은 일본 헌병들이 출동해 시위대를 막아섰어요. 무지막지하게 총을 쏘아대고 칼을 휘둘렀지요. 일본 경찰의 거침없는 공격에 많은 사람이 쓰러졌어요. 20여 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다쳤다고 해요. 유관순의 부모도 이때 목숨을 잃었답니다.

“아버지, 어머니! 누가 저 좀 도와주세요.”

유관순은 쓰러져 있는 부모님의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했어요. 분노를 떨칠 수 없었던 유관순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부모님의 시신을 둘러업고, 일본 헌병들이 있는 주재소로 달려갔어요.

“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총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

유관순은 분노를 터트리고 항의해 보았지만 소용없었어요. 오히려 유관순마저 만세운동의 주도자로 체포되어 공주 교도소로 넘겨졌지요.

감옥에서도 만세 운동을 벌이다

유관순은 공주 지방법원에서 실형을 받고 항소했어요. 이후 경성 복심법원에서 3년 형을 선고받았지요. 이후 감형되어 1년 6개월의 징역을 살아야 했어요. 재판과정에서 그녀는 너무도 당당했어요.

“내 나라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른 것이 어찌 죄가 되느냐? 죄가 있다면, 불법적으로 내 나라를 빼앗은 너희들에게 있는 것 아니냐?”

유관순은 오히려 단호한 목소리로 일본 재판관을 꾸짖었어요. 재판 이후 유관순은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게 되었지요. 유관순이 갇힌 여자 감방에는 만세 운동을 벌이다 잡혀 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유관순 같은 학생도 있었어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   
국사편찬위원회

그녀는 죄 없는 자신이 왜 징역을 살아야 하는지 너무도 억울했어요. 그럴수록 독립에 대한 의지는 더욱 높아졌지요. 감옥이지만 그곳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어요. 아침, 저녁으로 만세를 부르는 일말이에요.

3·1 운동 1주년이 되는 날에는 옥에 갇힌 사람들과 함께 기념식을 열었어요. 그리고 형무소 밖에까지 만세 소리가 들리도록 소리 높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어요. 유관순이 갇힌 감방에서 시작된 만세 소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감방에서도 터져 나왔어요. 삽시간에 서대문 형무소에 갇힌 우리 동포 3,000여 명이 거의 다 참여했어요.

만세 소리는 형무소 밖으로까지 퍼져 나가 일본 경찰을 깜짝 놀라게 했어요. 서대문 형무소에서 들려오는 만세 소리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전차 운행이 마비되었다고 해요.

<감옥에서 만세 운동을 하는 유관순>   

감옥에서 죽음을 맞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한 뒤, 유관순은 형무소 지하 독방에 갇히게 되었어요. 독방은 허리를 제대로 펼 수 없을 정도로 비좁았어요. 독방에 갇힌 뒤 유관순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고문을 받았어요. 심한 매질에 온몸이 성한 곳이 없었고,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지요.

급기야 유관순은 모진 고문 후유증으로 병을 얻었어요. 결국 감옥에서 풀려나기 이틀 전인 1920년 9월 28일,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맞았어요.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도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뿐인 것을 안타까워했대요.

유관순의 죽음 소식을 듣고 이화학당 교장 선생님과 선교사가 형무소로 달려왔어요. 형무소는 그녀의 시신을 넘겨주지 않으려고 버텼어요. 교장 선생님이 이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겨우 시신을 넘겨주었고,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지요.

학생 신분으로 3·1 운동에 참여하고, 기꺼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친 유관순! 그녀의 희생은 우리 어린이들에게 학생이지만 역사의 주인공으로 책임을 다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답니다.

[집필자] 황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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