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미있는 초등역사
  • 근대
  • 이육사
  • 이육사, 시를 써서 일제에 맞서다

이육사, 시를 써서 일제에 맞서다

<이육사문학관(경북 안동시)>   

“이원록! 너의 수감번호는 264번이다.”

‘그래! 내 호를 이육사로 해야겠어.’

1927년 이원록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로 체포되어 갇히었을 때 수인 번호(죄수 번호)가 264번이었어요. 이후 시인으로서 활동한 그는 자신의 이름인 이원록 대신 이육사라는 이름을 사용했어요. 독립운동을 하던 이육사가 왜 시인이 되었을까요?

의열단에 가입하다

이육사는 1904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낙동강 줄기에 자리 잡은 그의 고향은 7월이면 동네 어귀마다 청포도가 탐스럽게 익어가는 마을이었어요. 어린 시절 이육사의 이름은 이원록이었어요.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어요. 그리고 할아버지가 들려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절개와 기상에 대한 이야기를 마음 깊이 새겼어요.

“무릇 선비란 절개가 있어야 하느니라. 우리 집안은 퇴계 이황 선생의 후손으로 대대로 선비의 절개가 빛난 가문이다.”

“할아버지! 절개가 어떤 뜻인가요?”

“옳은 일에 뜻을 굽히지 않는 강인한 정신을 가리킨단다.”

“옳은 일은 어떤 일인가요?”

“나라를 사랑하고 사람을 아끼는 것이다. 명심하거라.”

“예. 할아버지! 앞으로 옳은 일에 앞장서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1910년 일제는 우리나라의 국권을 빼앗았고, 날이 갈수록 더욱 가혹하게 통치했어요. 안동에서 대구로 이사 간 이원록은 근대적인 학문을 배웠고, 1924년 19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유학을 갔어요. 이원록은 일본에서 1년 넘게 여러 학문을 배우고 돌아왔어요.

1925년 귀국한 이원록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의열단이라는 단체에 가입하였어요. 의열단은 ‘맹렬하게 정의를 위해 싸우는 단체’라는 뜻이에요. 이원록은 의열단의 단원이 되어 식민 통치 기관, 일본 경찰이나 군인, 친일파를 처단하고자 했어요. 한편으로 이원록은 형제들과 함께 수시로 중국을 드나들며 앞으로 어떻게 독립운동을 해야 할 지 알아보았어요.

그러던 중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에서 폭발물이 터져 일본 경찰 이 큰 상처를 입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당시 폭발물을 설치한 인물이 잡히지 않자, 일본 경찰들은 범인을 잡는다는 구실로 이원록을 비롯해 많은 민족운동가를 잡아들였어요.

“말해라! 누가 폭발물을 설치했는가?”

“나는 모르는 일이오.”

“네가 폭발물 설치의 배후 인물이며 운반책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

“아니요, 나는 정말 모르는 일이오.”

“이놈이 거짓말을 하는구나. 말로는 안 되겠다.”

세 명의 형제들과 함께 잡힌 이원록은 일본 경찰로부터 심한 고문을 받고 자백을 강요받았어요. 결국 이원록은 2년 이상 억울한 감옥살이를 해야 했어요. 이것이 열일곱 차례나 감옥에 갇힌 그의 첫 번째 감옥살이였어요. 이때 수감번호였던 264번은 그의 새로운 이름이 되었답니다.

1929년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발물을 설치했던 실제 인물인 장진홍이 일본에서 체포되었어요. 그제서야 이육사는 감옥에서 풀려나올 수 있었어요.

이후 이육사는 신문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일본에 저항하는 의지를 담은 시를 발표했어요. 그럴수록 이원록에 대한 일제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어요.

그러던 중 대구 시내에 일본을 비판하는 글이 몰래 붙었는데, 이 일과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받아 이육사는 또다시 2개월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되었어요.

감옥에서 풀려난 이육사는 예전부터 꿈꿔왔던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중국을 자주 왕래했어요. 중국 베이징에서 의열단 단원들을 만난 이육사는 무장 독립투쟁에 참여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받기 위해 의열단이 설립한 군사학교에 입학했어요.

“이육사! 큰 결심을 해줬소. 독립의 그날을 위해 열심히 훈련받은 뒤 일본군과 본격적으로 싸워 보세.”

“예. 앞으로 열심히 훈련받아서 독립운동의 선봉이 되겠습니다.”

이육사는 군사학교에서 비밀통신, 선전 방법, 폭파 훈련 등을 교육받았어요. 교육을 마친 이육사는 1933년에 귀국했어요. 부여받은 비밀 임무를 행동에 옮기기 전, 처남의 자수로 또다시 일본 경찰에 붙잡혔어요.

<1934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이육사의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아! 나의 독립운동은 여기서 끝나는 것인가? 아니다. 감옥 안이라도 멈출 수가 없다.’

이육사는 7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건강이 더욱 나빠졌어요. 그는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며 고민에 빠졌어요. 그는 의열단원으로서 무장 투쟁에 앞장설 것인지, 아니면 건강을 이유로 독립운동을 그만두고 일반 사람처럼 생활할 것인지 고민을 했어요.

오랜 생각 끝에 이육사는 글을 통해 민족의식을 높이고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일깨우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문학을 통한 이육사의 새로운 항일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답니다.

시를 써서 민족의식을 높이다

이육사는 일제의 가혹한 식민 통치에 맞서 저항적인 성격의 여러 글과 시를 써나갔어요. 그가 죽은 뒤에 발표되었던 ‘광야’가 대표작이에요.

<광야>   

이육사가 쓴 ‘광야’라는 시에서 광야는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 즉 조국의 땅을 상징한다고 보고 있어요. 매화 향기는 매화가 아직 추운 겨울이 가기 전에도 피어 향기를 남기는 만큼 꿋꿋한 민족의 정신을 뜻한다고 알려져 있어요. 그리고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모두가 예상하듯이 광복을 뜻하지요.

광복을 이룩해 줄 인물, 즉 민족의 뛰어난 지도자를 뜻한다고 보아 광복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확신을 드러내고 있지요. 이육사와 같이 일제에 저항하는 시를 쓰는 것은 무장 투쟁과는 다른 방법의 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육사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절정’이라는 시가 있는데,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담겨 있어서 ‘광야’와 함께 대표적인 저항시라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

<절정>   

1941년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뒤 민족 말살 통치를 하면서 우리 민족의 정신을 없애고자 했어요. 그래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못 쓰게 했어요. 심지어 우리의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칠 것을 강요했어요. 이와 같은 일본의 정책에 맞서 이육사는 잡지에 일본어로 된 문학작품을 싣지 않기 위해 한자로 된 시만 발표했어요.

<이육사 동상과 시비(이육사문학관)>   

중국에 있는 일본 감옥에서 순국하다

일본의 민족 말살 통치로 우리말로 된 문학 작품 활동이 어려워졌어요. 그래서 이육사는 1943년 4월 중국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찾아가 무기를 국내에 들여와 일본과 직접 싸울 것을 주장했어요. 그러던 중 그해 7월 어머니와 형의 장례를 치르러 잠시 귀국했다가 일본 경찰들에게 다시 잡히었어요.

며칠 후 이육사는 조사를 받기 위해 중국 베이징에 있는 일본 영사관을 거쳐 일본 헌병대 베이징 감옥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고문에 시달리다가 몇 달 후 1944년 1월 16일에 세상을 떠났어요. 파란만장한 이육사의 생애는 이처럼 중국에 있는 일본 감옥에서 끝나고 말았어요.

그가 순국한 이듬해인 1945년 8월 15일에 이육사가 그렇게도 오기를 고대하던 광복이 이루어졌어요. 그 이듬해 문학계 동료들에 의해 이육사의 원고가 정리되면서 그의 첫 번째 시집인 『육사시집』이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은 이육사를 시인으로만 알고 있어요. 그러나 원래 이육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무장 투쟁을 전개했던 인물이랍니다. 또한 이육사는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로 무려 17번이나 감옥살이를 했지만 독립운동에 앞장서며 시를 쓰는 활동으로 일제에 저항하고 민족의식을 깨웠던 인물이에요. 이러한 그의 정신은 시에 고스란히 남아, 지금도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답니다.

<『육사시집』초판본(이육사문학관)>   

[집필자] 방대광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