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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필,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내다

<간송미술관(서울 성북구)>   

“분명 『훈민정음 해례본』이 맞지요?”

“네, 그런데 가격이 좀 비싸서… 기와집 한 채 가격인 천 원을 주셔야 한다고 합니다.”

“그 값에 열 배를 주겠소.”

책 한 권을 기와집 열 채 가격에 사들인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왜 이렇게 비싼 가격에라도 『훈민정음 해례본』을 사려고 했을까요?

손꼽히는 부잣집에서 태어나다

이 사람은 바로 전형필이에요. 그는 1906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집안은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종로 일대에서 장사를 해 서울에서도 이름난 부자가 되었어요.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운동도 잘했어요. 휘문고보(현재의 휘문고등학교) 4학년 때는 야구부 부장을 할 정도였어요. 그의 또 다른 취미는 책을 읽고 모으는 것이었지요. 그의 방은 그가 사 모은 책들로 가득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무 걱정 없이 살 것만 같던 그에게 슬픔이 찾아왔어요. 몇 년 사이에 할아버지부터 작은아버지, 그리고 형님까지 돌아가셨거든요. 집안의 대를 이을 자손으로는 아버지와 전형필만 남게 되었지요. 그는 한동안 깊은 슬픔에 빠져 살았어요.

전형필은 휘문고보를 졸업한 이후 일본 와세다 대학으로 유학을 가 법학을 공부했어요. 법을 공부해 일제에 억울함을 당하며 살아가는 우리 민족을 도와주라는 아버지 말씀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그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게 되면서 그는 변호사의 길을 포기했어요. 집안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아 엄청난 부자된 그의 운명을 바꿀 한 사람을 만났거든요.

오세창과의 만남, 운명을 바꾸어 놓다

독립 운동가이자 서예가로 이름을 날리던 오세창은 전형필에게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주었어요.

대학 재학 시절 전형필은 방학이 되면 휘문고보 시절 미술 선생님을 찾아가곤 했어요. 미술 선생님은 그에게 오세창을 소개해 주었어요. 오세창은 문화유산을 보는 눈이 남달랐어요.

옛날 책과 도자기들이 단순한 골동품들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신이 담긴 보물임을 알고 있었지요.

전형필은 오세창을 통해 문화유산에 눈을 뜨면서 그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변호사의 길 대신 전 재산을 들여서라도 문화유산을 지켜내기로 했어요. 일제로부터 우리 문화와 정신을 지키겠다고 결심한 거예요. 일제가 우리 문화유산을 빼앗고 파괴하는 상황 속에서 여느 독립 운동가처럼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힘을 쏟은 거예요.

전형필에게 간송이라는 호를 지어준 사람도 바로 오세창이에요. 간송은 산골물 ‘간’자와 소나무 ‘송’자로 한겨울에도 얼지 않고 흐르는 물과 그곳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란 뜻이에요. 아마도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뜻으로 지어준 호이겠죠?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을 사들이다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내 나라를 지키겠다고 마음먹은 전형필은 가장 먼저 인사동에 있는 책방인 한남서림을 넘겨받았어요. 그곳에서 옛날 책과 그림, 도자기 등 골동품들을 사들였지요.

“자네 그 소식 들었나? 한남서림에 가면 제값보다 더 후하게 사준다면서?”

“나도 도자기 하나를 들고 갔었는데, 어찌나 값을 잘 쳐주던지!”

전형필은 옛 책과 그림, 도자기 등을 팔러오는 사람들에게 후하게 값을 쳐주며 사들였어요. 그래야 거래꾼들이 귀한 우리 문화유산을 많이 가지고 올 테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 문화유산이 나타났어요. 바로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이지요. 그 매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일본인 마에다 사이치로였어요. 마에다는 조선 총독부가 그 매병을 1만 원에 사들이려고 하자, 더 비싼 값에 팔고 싶어 했어요. 전국의 골동품 가게에 사진을 돌리고, 기와집 20채 값인 2만 원까지 가격을 올렸어요.

전형필은 비싼 가격임에도 머뭇거림 없이 땅을 팔아 그 매병을 사들였어요.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거든요. 천 마리 학이 구름을 뚫고 옥빛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갯짓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 걱정과 근심이 모두 사라지는 느낌이었지요.

상감청자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어요. 일본인 무라카미였지요. 그가 찾아와 두 배 가격을 줄 테니 팔라고 하자 전형필은 이렇게 대꾸했어요.

“이보다 더 좋은 청자를 제게 가져다주신다면 산 가격대로 드리겠소.”

“하하하, 제가 실례를 했군요.”

전형필의 정중한 거절을 알아차린 무라카미는 그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돌아갔다고 해요.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국보 제68호)>   
문화재청

조선 백자와 신윤복의 미인도를 지켜내다

“1만 4천 5백 원”

“1만 4천 5백 10원”

1936년 11월 서울의 경성구락부에서 조선 백자(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를 놓고 경매가 벌어졌어요. 그 백자는 처음에는 천 원도 안 되는 가격에서 흥정이 오갔는데 순식간에 1만 4천 원이 넘는 가격이 되었지요.

<경매에서 백자를 지킨 전형필>   

점점 높아지는 가격에도 계속 흥정을 벌이는 두 사람이 있었어요. 바로 전형필과 일본인 야마나까였지요. 수많은 상인과 골동품 수집가들은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았어요. 과연 누구에게 그 백자가 돌아갈지 궁금해 하면서요.

야마나까가 1만 4천 5백 10원(지금의 45억 원 정도)을 부르자 전형필은 곧바로 1만 4천 5백 80원을 불렀어요. 전형필은 얼마를 주더라도 백자를 꼭 사고 싶었어요. 결국 조선의 청화백자는 전형필의 품에 안겼지요. 전형필은 조선의 문화유산을 지켜냈다는 사실에 마음이 뿌듯했어요.

1936년에는 조선 시대 신윤복이 그린 미인도가 일본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갔지요. 조선 시대 미인의 모습을 담은 신윤복의 대표적인 그림은 당시 일본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았어요. 그래서 가격이 점점 치솟아 3만 원에 이르렀지만, 전형필은 주저하지 않고 되찾아왔어요.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병(국보 제 294호)와 신윤복 필 미인도(보물 제1973호)>   
문화재청

1937년에는 일본에 있던 영국인 변호사 개스비로부터 고려청자 20점을 기와집 400여 채 가격인 40만 원에 사들였지요. 개스비는 청자를 팔며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당신은 젊고 의욕도 넘치니 당신 나라의 훌륭한 미술품들을 많이 모아서 세상에 널리 알리시오. 고려청자가 당신의 나라로 돌아가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손에 넣다

1943년 7월 어느 날, 전형필이 한남서림에 앉아 있는데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중개인이 눈에 띄었어요. 전형필은 그를 불러 무슨 일로 그리 바삐 가느냐고 물었어요.

“경북 안동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책 주인이 천 원을 부르지 뭡니까? 그래서 돈을 구하러 가는 길입니다.”

전형필은 이 소식이 조선 총독부에 알려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의 말과 글도 못 쓰게 하며 탄압하는 일제가 분명 한글 제작 원리 등을 설명한 『훈민정음 해례본』을 빼앗으려고 할 테니 말이에요. 그는 어떻게든 『훈민정음 해례본』을 먼저 손에 넣으려고 했어요.

“책 주인에게 만 원을 주고, 천 원은 수고비로 받으시오.”

“책 가격이 천 원인데 만 원이라고요?”

“그런 보물은 적어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지 않겠소?”

『훈민정음 해례본』을 손에 넣은 전형필은 그것이 세상에 전해진다는 사실 자체를 비밀로 했어요. 일제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말이에요. 꼭꼭 숨겨 두었다가 광복 이후에야 세상에 내놓았지요.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문화재청

전형필은 자신이 수집한 여러 가지 보물 중 훈민정음을 가장 귀하게 여겼어요. 6‧25 전쟁이 나자 어쩔 수 없이 문화유산들을 그대로 두고 피난을 가야했는데, 『훈민정음 해례본』만은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챙겨갔어요. 피란길에도 잃어버릴까봐 가슴에 품고 다녔고, 잠을 잘 때는 베개 속에 넣고 잤다고 해요.

전형필이 일제의 감시와 전쟁으로부터 훈민정음을 지켜낸 덕분에 우리는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를 알 수 있었지요. 왜 우리글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인지도 정확히 알 수 있었고요.

보화각을 세워 문화유산을 보존하다

전형필은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손가락질을 받았어요. 고물을 사들이는데 쓸데없이 재산을 날린다고 말이에요.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때론 열 배가 넘은 가격에 문화유산을 사들이고, 사들인 문화유산을 수선하는데 산 가격보다 더 많은 돈을 쓰기도 했지요. 전형필은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는데 아까울 게 없었어요. 종이 쪼가리 하나라도 일본으로 건너가선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지요.

“많은 후손이 볼 수 있도록 미술관을 열어 보존하고 전시할 것이오.”

1938년 전형필은 자신이 모은, 빛나는 보물들을 모아둘 보물 창고를 지었어요. 그것이 바로 보화각이예요. 『훈민정음 해례본』,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 신윤복의 풍속도 화첩 등 국보 12점, 보물 10점 등 수천 여 점의 문화유산이 보관되어 있었어요. 그가 죽은 뒤 보화각은 이름이 간송미술관으로 바뀌었어요.

<간송미술관 전경(서울 성북구)>   
한국학중앙연구원

간송미술관은 전형필의 뜻에 따라 문화유산을 후손들에게 널리 보여주기 위해 1년에 두 번 전시회를 열었어요. 많은 사람이 전시회를 보기 위해 몰려들어 미술관 주변 골목까지 긴 줄이 이어졌지요.

최근에는 전시회 장소를 옮겨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간송문화전’을 열고 있어요. 대구미술관에서도 전시회를 열었어요. 주제별로 전시회가 열리는데, 이전보다 조금 더 쉽게 간송이 지켜낸 문화유산들을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답니다.

만약 여러분이 전형필처럼 부자였다면 과연 문화유산을 지켜내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쳤을까요? 아마도 쉽지 않았을 거예요. 그건 전형필이 우리 문화유산을 수집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그는 문화유산을 지킨 독립 운동가였어요. 덕분에 우리는 지금 우리의 귀한 문화유산들을 만날 수 있답니다.

[집필자] 황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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