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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일제를 향해 폭탄을 던지다

<매헌 윤봉길 기념관(중국 상하이)>   

“김구 선생님, 주신 돈으로 새로 산 시계와 오래된 선생님의 시계를 바꾸시지요.”

“왜 그런 말을 하시오?”

“제 시계는 앞으로 몇 시간밖에 쓸 일이 없으니까요.”

1932년 4월 29일 한 청년이 독립운동 의거를 몇 시간 앞두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이끌던 백범 김구 선생과 자신의 시계를 바꾸자고 했어요. 이 청년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그는 왜 김구 선생과 시계를 바꾸자고 했을까요?

신식학교를 그만두고 서당에서 공부하다

김구와 시계를 바꾼 사람은 윤봉길이에요. 윤봉길은 1908년 충청도 예산에서 태어났어요. 원래 이름은 ‘우의’였고 ‘봉길‘은 별명이었어요.

<윤봉길과 김구의 시계>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윤봉길은 6살 때부터 큰아버지가 만든 서당에서 공부하다가 11살 때 덕산보통학교(오늘날 초등학교)에 입학했어요. 그런데 윤봉길의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윤봉길이 학교에 입학한 지 1년 만에 3·1 운동이 일어났거든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저렇게 탄압하다니. 내가 다니는 학교는 우리를 일본 사람으로 만들려는 곳이야. 이런 학교는 더는 다니지 않을 거야.’

윤봉길은 일제가 3·1 운동을 탄압하는 모습을 지켜본 후 학교를 스스로 그만두었어요.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서당에서 다시 공부를 계속했어요. 서당에서는 주로 한문을 배웠어요. 윤봉길은 한문으로 시를 잘 지었어요.

이 무렵 지은 시가 무려 300여 편이었다고 해요. 한편 윤봉길은 서당에서 전통 교육을 받으면서도 틈이 날 때마다 새로운 학문을 알려주는 잡지 등을 사다 읽으며 세상에 대한 안목을 넓혔어요. 이때 스스로 익힌 근대 학문은 훗날 윤봉길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답니다.

농민을 깨우치기 위해 노력하다

윤봉길이 19살 무렵의 일이었어요. 공부하다가 쉬는 시간에 산책하고 있는데 한 청년을 만났어요. 그 청년은 윤봉길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여기에 있는 것 중에 제 아버지 이름을 찾아주세요.”

“무슨 일로 그러시는데요?”

“아버지 묘가 어떤 건지 헷갈려서 공동묘지에 있는 팻말을 모두 뽑아왔어요.”

“아버님 성함이 적혀 있는 것은 이것인데 어느 무덤에서 뽑아왔는지 표시했나요?”

청년은 그제야 자신이 팻말을 뽑을 때 표시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결국 자신의 아버지 무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무덤마저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죠. 청년은 왜 이런 일을 벌였을까요? 글을 읽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윤봉길은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았어요. 이 청년처럼 우리 민족이 계속 글을 깨치지 못한다면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일이 절대 쉽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어요. 그래서 농민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들을 깨우치기 위한 활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1926년 윤봉길은 야학을 열었어요. 야학에는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어요.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듬해에는 야학에서 쓸 교재인 『농민독본』이라는 책도 썼어요.

<야학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윤봉길>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1929년 4월 윤봉길은 농민 단체인 ‘월진회’도 만들었어요. ‘월진회’는 농민들이 잘 살 수 있도록 회비를 모아 농가에 새끼 돼지나 닭을 키우게 했어요. 그뿐만 아니라 농민들을 깨우치기 위해 강연회도 열었어요. 윤봉길은 이 단체의 회장이 되어 활발하게 농민운동을 펼쳤어요.

그러던 중 1929년 11월에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났어요. 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족 차별에 반대하여 일어난 이 운동은 나라 곳곳으로 퍼져나갔어요. 일제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탄압했어요. 윤봉길은 이 운동을 지켜보면서 농민을 잘살게 하는 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독립운동을 하러 중국으로 가다

<글을 쓰고 있는 윤봉길>   

‘독립운동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옳지!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중국으로 가야겠다.’

1930년 3월 윤봉길은 자신의 결심을 글로 써서 가족들에게 남기고 중국에 가서 독립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윤봉길은 월진회 회원들의 회비를 빌려 기차를 타고 중국을 향해 떠났어요. 그런데 중국으로 출발한 지 이틀 만에 평안도 선천에서 사복을 입은 경찰에게 체포되었어요. 윤봉길은 그곳에서 한 달 넘게 갇혀 있다가 풀려났어요. 그리고 곧바로 압록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어요.

만주에 도착한 윤봉길은 그곳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와 독립군 근거지를 두루 돌아보며 어디서 독립운동을 할지 찾아보았어요. 또 만주에서 살고 있던 교포들의 참담한 생활을 본 뒤 그들을 일깨우는 강연도 했어요. 그 후 윤봉길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가기로 했어요.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어요. 준비해온 돈이 다 떨어져 상하이에 바로 갈 수 없었던 거예요. 칭다오로 근거지를 옮긴 윤봉길은 그곳에서 1년간 살았어요. 그곳에서 일본인이 하는 세탁소에 취직했어요. 윤봉길은 성실하게 일하고 돈을 벌어 월진회 회원들이 빌려준 돈도 갚고 상하이에 갈 여비도 마련했어요.

1931년 8월 윤봉길은 드디어 상하이에 도착했어요. 그곳에는 안중근 의사의 친동생이 살고 있었어요. 윤봉길은 그 집에 세 들어 살았어요. 그리고 돈벌이를 위해 인삼 장사를 하기도 했어요.

그 후 윤봉길은 공장에 취직했어요. 그 공장은 말총으로 모자를 만드는 곳이었어요. 윤봉길은 공장에서 일하면서 노동자 친목회를 조직하여 활발히 활동했어요. 또 영어학교에 다니며 영어 공부도 했어요.

윤봉길이 상하이에 와서 자리 잡을 무렵 일본이 중국의 만주를 침략했어요. 만주사변(1931년 9월)이 일어난 것이죠. 만주사변 후 일제는 그곳에 만주국이라는 나라도 세웠어요. 만주국은 일제의 뜻대로 다스리는 꼭두각시 나라였어요.

일제가 만주국을 세운 후 우리 민족이 중국에서 힘차게 독립운동을 펼치는 일은 점점 어려워졌어요. 일부 중국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일본의 첩자로 의심하는 일도 있었거든요. 그러면 독립운동을 하는 데 중국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던 거예요.

만주와 멀리 떨어진 상하이의 형편도 좋은 편이 아니었어요. 이 무렵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이끌던 김구는 새로운 방법으로 일제에 맞설 계획을 세웠어요. 그래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언제라도 목숨을 던질 수 있는 한인 애국단을 만들었어요. 1932년 1월에는 한인 애국단원인 이봉창을 일본의 도쿄로 보내 일왕이 탄 마차에 폭탄을 던지도록 했어요.

이봉창의 의거 소식을 들은 윤봉길은 김구를 찾아갔어요.

“김구 선생님! 저는 지금 공장을 그만두고 이봉창 의사와 같은 독립운동을 하고 싶습니다.”

“윤 군의 뜻을 잘 알겠습니다. 기회가 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봅시다.”

이봉창의 의거가 있고 난 뒤 3개월 남짓 후에 윤봉길에게도 기회가 생겼어요. 1932년 1월 일제가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 상하이를 침략하고 그곳을 차지했거든요. 그리고 4월 29일 일제는 상하이의 한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 축하 겸 자신들이 상하이를 차지한 것을 기념하는 행사를 계획했어요.

일본의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지다

일본의 행사 계획을 들은 김구는 한인애국단이 나서 일본의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지기로 결정했어요. 그리고 윤봉길에게 이 일을 맡기기로 했어요. 윤봉길은 자신이 하는 일이 개인적인 일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한인 애국단원이 되었어요. 그리고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 행사가 열릴 예정인 공원을 미리 가보기도 했어요.

<의거 3일 전 윤봉길 의사의 모습>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도시락과 물통 모양의 폭탄을 가지고 행사장에 도착했어요. 11시 40분쯤 행사장에 있던 일본 사람들이 국가를 부르고 있을 때였어요. 윤봉길은 단상을 향해 물통 폭탄을 던졌어요. 순식간에 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단상 위에 있던 일본군 대장 등은 죽거나 다쳤어요. 도시락 폭탄은 의거가 실패할 경우 자결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었는데 사용할 수가 없었어요.

<윤봉길의 의거>   

윤봉길은 의거 후 현장에서 일본 군인들에게 바로 체포되었어요. 일제는 상하이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의 군법회의에서 윤봉길을 조사한 후 그를 사형시키기로 했어요. 그리고 윤봉길을 일본으로 보냈어요. 결국 윤봉길은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에서 죽음을 맞이했어요. 일제는 윤봉길 의사가 한 일을 복수한다며 그의 유해를 가나자와 충혼탑 입구에 묻었어요.

김구 선생은 이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광복 후인 1946년에 윤봉길의 유해를 국내로 모셔왔어요.

윤봉길의 의거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어요. 일본의 만주 침략 후 우리의 독립운동을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던 중국 사람들의 시선이 변했거든요. 특히 중국의 한 지도자인 장제스는 이 일을 계기로 임시 정부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어요.

윤봉길의 의거를 어리석은 행동이었다며 비판했던 사람도 있었어요. 하지만 윤봉길은 개인적으로 일제에 폭탄을 던진 것이 아니에요. 한인 애국단원으로서 한 일이지요. 한인 애국단은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일제의 주요 인물에게 폭탄을 던져 우리의 의지를 보여 주려고 했어요.

윤봉길은 거사를 며칠 앞두고 두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답니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윤봉길이 어떤 마음으로 폭탄을 던졌는지 느껴지나요?

[집필자] 김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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