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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로써 민족의 아픔을 위로하다

<윤동주기념관(서울 서대문구)>   

‘나의 첫 시집 제목을 무엇으로 정할까?’

‘일제 강점기를 병든 시대를 치료한다는 의미로 ‘병원’이라고 할까?’

‘그것도 좋지만 우리 모두를 가까이에서 위로해주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제목으로 해야겠다.’

자신의 첫 시집의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지은 시인은 누구일까요? 그는 일제 강점기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명동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

1917년 윤동주는 간도의 명동촌(지금의 길림성 용정시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어요. 그의 집안은 증조할아버지 때 함경북도에서 간도로 이주하였지요. 윤동주 아버지는 명동학교의 교사였고, 어머니는 기독교 장로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자랐어요.

어린 시절 윤동주의 단짝 친구는 송몽규였어요. 그는 윤동주의 사촌이었는데, 다섯 살까지 같은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늘 붙어 다녔어요. 동네 사람들은 둘을 볼 때마다 웃으며 얘기했어요.

“너희 둘은 어째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고 매일 붙어 다니느냐. 꼭 쌍동밤 같구나.”

“저는 9월에 태어났고 동주는 12월에 태어났어요. 제가 석 달 빠른 형이지만 저희 둘은 가장 친한 친구에요!”

아홉 살 때 윤동주와 송몽규는 나란히 명동소학교에 입학했어요. 이 소학교는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졌는데, 선생님들도 대부분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이었어요.

명동소학교 시절 윤동주는 특히 국어 시간을 좋아했어요. 『솟는 샘』이라는 등사본 국어책은 윤동주가 가장 즐겨 읽던 교과서였어요. 『솟는 샘』에 나오는 동시를 비롯해 글 대부분을 외우다시피 했지요. 그러나 일본어 성적은 썩 좋지 않았어요. 일본어 시간에 그는 맨날 딴생각만 했거든요.

어느 날 일본어 선생님이 윤동주에게 다가와 말씀하셨어요.

“동주야! 네 일본어 성적이 이게 뭐니? 낙제 점수다. 사실 나도 일본어를 가르치는 게 좋지만은 않다. 그렇지만 우리가 독립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잘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어를 배워야 하지 않겠니?”

그때 윤동주의 친구이자 사촌인 송몽규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어요.

“우리나라를 빼앗은 일본의 말을 왜 배워야 하나요? 그게 우리나라의 독립과 어떤 관련이 있나요?”

“몽규가 질문을 잘했다. 너희들도 궁금하지? 신학문을 배워야만 실력을 키울 수 있고, 실력을 키워야만 독립을 하루빨리 할 수 있단다. 그런데 안타깝지만 신학문이 대부분 일본어로 되어 있거든.”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서 윤동주도, 송몽규도, 다른 친구들도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렇지만 나라를 강제로 빼앗은 일본의 말을 배워야한다는 것이 너무나 가슴 아팠어요.

윤동주와 송몽규는 어린이를 위한 잡지를 즐겨 읽었어요. 방정환이 펴낸 『어린이』라는 잡지가 서울에서 북간도의 시골 마을인 명동촌에까지 정기적으로 배달되었어요. 윤동주와 송몽규는 『어린이』를 읽은 후 동네 아이들에게도 전해줘 다같이 읽을 수 있도록 있었어요.

5학년이 된 어느 날 윤동주와 송몽규는 어린이를 위한 잡지를 스스로 만들어보기로 했어요. 남들 앞에 서기를 좋아하는 송몽규가 교탁 앞에 서서 친구들에게 함께 만들자고 이야기했어요.

많은 친구가 잡지 만드는 것에 동참하기로 했어요. 윤동주와 송몽규가 글을 편집하는 일을 맡기로 했고, 문익환이라는 친구가 원고 모으는 일을 하기로 했어요. 이렇게 명동소학교 5학년 학생들의 첫 번째 잡지 『새 명동』이 만들어졌어요. 『새 명동』에는 명동 학교에 대한 내용과 학생들의 문예 작품, 명동촌의 소식 등이 담겼어요. 비록 서울에서 발행되는 『어린이』에 비해서는 많이 부족하지만 윤동주를 비롯해 명동소학교 학생들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보물이었답니다.

<윤동주의 명동소학교 졸업사진>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글 쓰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다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1932년 고향 명동촌을 떠나 용정(룽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했어요. 은진중학교 시절 윤동주는 폭넓게 활동했어요. 교내 잡지를 발간하느라 밤새 원고지와 씨름하는가 하면 축구와 웅변에도 소질을 보였어요. 절구통 위에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 연습을 한 끝에 교내 웅변대회에서 ‘땀 한 방울’이란 제목으로 1등 하기도 했어요.

은진중학교는 캐나다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학교였어요. 그래서 중국 관리나 일본 경찰들도 함부로 학교 안에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학교 행사 때나 학급회의 때 마음껏 애국가를 부를 수 있었어요. 이러한 것들이 윤동주의 애국심을 높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지요.

1934년 12월 중순 서울에서 전보가 배달되어 왔어요. 윤동주가 받아서 보니 서울 동아일보사에서 송몽규에게 신춘문예(신문사에서 봄에 문학 작품을 받아서 뛰어난 작품들에 상을 주는 행사) 당선 소식을 전하는 전보였어요. 윤동주는 진심으로 송몽규를 축하해 주었어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무척 부럽기도 했어요. 글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신춘문예에 당선되길 바라거든요. 자신도 틈틈이 시를 쓰고 있던 윤동주는 잠을 뒤척이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자신도 앞으로 좋은 작품을 쓰기로 했어요.

송몽규의 신춘문예 당선은 윤동주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어요. 그날부터 윤동주는 더욱 정성스레 글을 썼고, 또 자신이 쓴 글 밑에 글을 쓴 날짜를 적어 놓았어요.

은진중학교 4학년이 된 윤동주는 단짝 송몽규와 헤어지게 되었어요. 윤동주는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해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로 편입하기로 했어요. 반면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던 송몽규는 중국에 있는 군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중국 난징으로 떠났어요. 얼마 후 윤동주는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편입 시험을 봐서 합격했어요.

고향에서 먼 평양에서의 학교 생활은 낯설고 힘들었지만 윤동주는 열심히 공부하고 또 시를 썼어요. 당시 윤동주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이름난 시인 정지용이었어요. 윤동주는 정지용 시집을 늘 손에 끼고 읽고 또 읽었어요. 평소에 시를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정성스레 공책에 옮겨 적었어요.

<숭실중학교 시절 윤동주>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윤동주의 숭실중학교 생활은 7개월 만에 끝이 났어요. 왜냐하면 당시 일제가 신사 참배를 강요했는데, 숭실중학교 학생들이 이것을 거부했기 때문이죠. 신사는 일본의 여러 신을 모아 놓은 사당이었는데, 여기에 가서 절하고 기도하는 것을 강요했어요. 그러나 기독교 계열의 숭실중학교 학생들은 ‘우리는 우상숭배(하느님이 아닌 존재나 사물을 하느님인 것처럼 숭배하는 것)를 할 수 없다.’라며 시위를 벌였어요.

시위로 학교는 무기한 쉬게 되었고, 결국 윤동주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숭실중학교를 그만두었어요. 그리고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조선 총독부의 지원을 받는 용정의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했어요.

얼마 후 독립군이 되기 위해 중국의 군관학교에 다니고 있던 송몽규도 용정으로 돌아왔어요. 일본의 항의로 중국의 군관학교가 문을 닫았기 때문이에요. 송몽규는 일본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다가 석방되었어요.

그사이 윤동주는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한 공부와 시 짓는 일에 열중했어요. 몇 달 만에 석방된 송몽규는 곧장 윤동주에게 찾아왔고, 밤새 둘은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송몽규는 윤동주가 시를 쓴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시를 보여 달라고 했어요. 송몽규는 윤동주의 시를 한 편씩 읽을 때마다 절로 감탄했어요. 그리고는 윤동주에게 말했어요.

“동주야! 나는 네 시가 참 좋다. 좋아. 군더더기가 없이 정말 깔끔해.”

“네가 중국에서 고생하는 동안 나는 시 짓는 일에 몰두하긴 했지만, 막상 몽규 네가 그렇게 칭찬해 주니 쑥스러운 걸.”

“동주야!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의 아픔과 독립 의지를 시로 남겨 봐. 그건 직접 총 들고 싸우는 독립운동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다

열심히 공부한 덕에 윤동주와 송몽규는 나란히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에 입학했어요. 윤동주는 우리말을 가르치던 최현배 교수의 수업 시간을 참 좋아했어요. 비록 우리 민족이 식민통치를 겪고 있지만 우리말을 잊지 않고 배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최현배 교수님의 강의는 윤동주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남았어요.

손진태 교수님의 역사 수업도 윤동주가 좋아하던 수업 시간이었어요. 손진태 교수님은 러시아의 통치를 받고 있던 폴란드 학생들이 자신들의 말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일화를 소개해 주셨어요.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에서 여러 교수님들의 강의를 들으며 일본에 대한 저항 의식을 키웠어요. 강의가 없을 때면 윤동주는 잔디밭이나 빈 강의실에서 친구들과 토론을 했어요. 토론의 주제는 대부분 ‘어떻게 하면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까?’였어요.

1939년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2학년이 되었어요. 당시 중ㆍ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일제는 많은 우리 청년들을 전쟁터로 끌고 갔어요.

‘나라 잃은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제대로 사는 삶일까?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국의 어두운 현실에 윤동주는 크게 실망했지만, 한편으로는 한글로 시 짓는 일에 더욱 몰두했어요. 연희전문학교 4학년이 된 윤동주는 한 해 동안 ‘무서운 시간’, ‘십자가’, ‘돌아와 보는 밤’, ‘별 헤는 밤’ 등 여러 시들을 지었어요.

‘졸업 기념으로 지금까지 지은 시를 모아 시집을 내야겠다.’

1941년 윤동주는 지금까지 지은 시 중에서 열여덟 편을 모았어요. 그리고 첫머리에 넣을 시를 골랐어요. 자신의 시들을 여러 편 살펴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시가 없었어요. 그래서 새로 시 한 편을 지은 뒤 책의 머리말 대신으로 쓰는 시란 뜻으로 ‘서시’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그는 이 시에 자신이 걸어 온 길에 대한 차분한 성찰과 앞으로 가야할 길에 대한 굳센 다짐을 담았어요.

<서시>   

1941년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앞두고 윤동주는 서시를 포함해 그동안 쓴 시 19편을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원고 묶음 세 부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세 부 가운데 한 부는 자신이 갖고, 출판하기 전에 의견을 들어보고자 친하게 지내던 연희전문학교의 영문과 이양하 교수님과 친한 후배 정병욱에게 주었어요. 시를 모두 읽어 본 이양하 교수님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윤동주에게 말했어요.

“동주군! 시들이 아주 좋더군. 그런데 시집을 출판하려면 일제의 검열을 받아야 하는데, 일제가 싫어할 만한 내용이 있어서 당장은 출판이 힘들 것 같네. 아직은 때가 아니니 시집 출판은 잠시 미루는 게 좋을 것 같아.”

윤동주는 적잖이 실망했지만 이양하 교수님의 의견을 따라 출판을 미뤘어요.

일본 유학을 떠났으나 죽음을 맞이하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폭넓게 세상을 접하고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일본 유학을 떠났어요. 1942년 3월 도쿄에 있는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했어요. 일본에서의 대학 생활은 기대만큼 재밌지가 않았어요. 특히 군사 훈련을 받아야 하는 교련 시간은 윤동주가 가장 괴로워 한 수업이었어요. 교련을 가르치는 교관은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모욕적인 말을 자주 했어요.

“한국인들은 미개한 인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황 폐하께서 미개한 한국인들에게 군대에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셨다.”

이때 학생들 사이에서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어요.

“그것은 한국인들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윤동주의 말에 일본인 교련 교관은 화를 내며 앞으로 윤동주를 주의 깊게 지켜보겠다고 협박했어요. 이후 교련 교관은 시시때때로 윤동주를 괴롭히곤 했어요. 그러나 일본인 학생들은 윤동주를 조용하지만 할 말은 하는 한국인 유학생이라고 생각했어요.

<일본 유학 후 여름방학에 귀향한 윤동주>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얼마 후 윤동주는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으로 전학을 갔어요. 도시샤대학은 윤동주가 가장 좋아했던 시인 정지용도 졸업한 학교였어요. 윤동주는 이미 교토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던 송몽규를 비롯해 한국인 학생들과 자주 모였어요. 그리고 우리 역사와 문화에 관한 책을 돌려보며 소감도 이야기하고, 애국심을 높이는 토론도 하였어요.

또한 이들은 일제가 한국인 청년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기 위해 실시하려는 징병제를 비판하며 저항 정신이 담긴 시들도 발표하였어요. 그리고 민족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가장 빠른 길은 바로 독립이라고 생각했어요.

1943년 7월 여름방학을 앞둔 윤동주는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어요. 짐을 미리 부치고 차표도 예매해 두었어요. 친한 친구들이 윤동주를 위해 송별회도 열어 주었지요. 고향으로 떠나기 전날 있었던 송별회에서 윤동주는 친구들 앞에서 민요 ‘아리랑’을 불렀어요. 모두 고향이 그립고,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는 조국의 현실이 안타까워 눈물을 글썽였어요.

그때 윤동주가 머물던 하숙집에 일본 형사들이 들이닥쳤어요. 그들은 다짜고짜 윤동주의 손에 수갑을 채운 뒤 경찰서로 끌고 갔어요.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아 왔던 윤동주는 교토지방재판소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로 2년 형을 선고받았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어요. 당시 함께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던 송몽규도 같은 죄목으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했어요.

훗날 증언에 따르면 윤동주와 송몽규 등 한국인 죄수들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정체 모를 주사를 주기적으로 맞았다고 해요. 일명 ‘생체 실험’이라고 하는데, 살아있는 사람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여러 가지 의학 실험을 했다고 해요. 주사를 맞고 나면 식은땀이 나고 입맛도 의욕도 없고 머리가 심하게 아팠다고 면회 때 얘기했대요.

1945년 2월 16일, 윤동주가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다가 쓰러졌어요. 그리고는 외마디 비명을 지른 뒤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일본에 있는 감옥에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어요. 그의 시신은 화장된 뒤 가족들에게 인도되어 그해 3월 장례식을 치른 후 간도 용정에 묻혔어요.

윤동주의 장례를 치른 하루 뒤 송몽규도 감옥에서 죽었고, 이후 그의 무덤은 윤동주의 무덤 가까운 곳에 위치하게 되었어요. 평생 따뜻한 우정을 나눈 윤동주와 송몽규는 죽어서도 가까운 곳에서 함께하게 되었지요.

식민지 지식인의 슬픔, 그 속에서도 독립의 희망을 담은 시를 지은 윤동주는 살아있을 때 시집을 내지 못했어요. 비록 윤동주와 이양하 교수가 갖고 있던 시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정병욱이 갖고 있던 원고 덕분에 1948년 윤동주의 유일한 시집인『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빛을 보게 되었어요.

당시 이 시집의 서문은 윤동주가 좋아하고 존경했던 시인 정지용이 써 주었어요. 정지용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윤동주를 평가했어요.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여러분들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고 윤동주가 슬퍼했던 당시의 현실, 그가 노래한 독립의 희망이 담긴 시의 구절을 찾아보세요.

<1955년에 출판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증보본>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집필자] 방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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