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미있는 초등역사
  • 고대
  • 고인돌 유적
  • 청동기 시대의 비밀을 간직한 고인돌

청동기 시대의 비밀을 간직한 고인돌

<핑매바위(전남 화순군)>   

“아이고! 이를 어쩌나? 족장님께서 그만 돌아가셨다네”

“슬퍼하고 있을 때가 아니네. 사람들을 모아 어서 장례를 치러야지.”

“그러세. 작년에 만들어 놓은 돌을 이용하면 되겠어.”

전라남도 화순에 있는 이 바위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고인돌 가운데 하나로 핑매 바위라 부릅니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무덤을 말해요.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큰 돌을 옮겨 무덤을 만들었을까요? 고인돌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괴바위’, 고인돌로 밝혀지다

1995년 겨울, 전라남도 화순의 보검재 계곡으로 목포대학교의 이영문 교수와 학생들이 찾아왔어요. 마을 사람들이 옛날부터 ‘괴바위’라 부르던, 길 가의 큰 바위를 찾아 답사를 온 거예요. 당시 마을 사람들은 깊은 숲 속 나무와 풀 속에 가려 있는 돌을 그냥 산 속의 흔한 바위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지요.

‘괴바위’의 아래쪽은 흙으로 덮여 있어 큰 바위만 땅 위로 보였어요. 이영문 교수 일행이 바위 아래의 흙을 파내자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여러 개의 돌기둥이 드러났어요. 바위 아래에는 사람들이 일부러 돌을 떼어낸 자국도 보였지요. 산 속의 흔한 바위가 아니라 고인돌이었던 거예요.

<괴바위(전남 화순군)>   

‘괴바위’가 고인돌임을 확인한 사람들은 보검재 숲 속으로 들어가 주변을 샅샅이 살폈어요. 나무들 사이로 바위가 있고, 바위(덮개돌) 밑을 보면 어김없이 굄돌이 있었어요. 여러 달에 걸쳐 보검재 주변을 조사해 모두 596개의 고인돌을 찾을 수 있었어요.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던 곳을 유심히 살펴 어마어마한 유적을 찾아낸 것이에요.

이렇게 찾은 화순의 고인돌 유적에서는 돌도끼, 돌화살촉 등 다양한 유물들도 함께 출토되었어요. 유적의 보존상태도 좋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고인돌을 만드는 과정을 알 수 있는 채석장까지 발견되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어요. 그래서 2000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답니다.

  

고인돌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고인돌을 만드는 첫 단계는 돌을 떼어 내는 일이었어요.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바위산에서 원하는 모양의 큰 돌을 얻기 위해 나무를 이용했어요. 바위에 40~50cm 정도의 간격으로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뾰족한 모양의 나무 쐐기를 박아 넣었어요. 그리고 나무에 물을 부었어요. 물에 젖은 나무는 팽창하게 되고, 그 힘으로 바위가 쪼개졌어요.

쪼개진 바위는 여러 사람이 모여 통나무를 깔고 줄을 엮어서 원하는 곳으로 끌고 가 무덤을 만들었어요.

<쐐기를 이용한 채석 모습과 덮개돌을 옮겨가는 사람들(고창고인돌박물관)>   

덮개돌을 옮길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필요했을까?

마고 할미가 버리고 갔다는 전설이 담긴 핑매 바위는 돌을 던진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에요. 핑매 바위는 길이 7m, 높이 4m, 무게 220톤이 넘는 초대형 덮개돌로 만든 세계 최대 크기의 고인돌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어요. 핑매 바위를 옮기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필요했을까요?

<고인돌 덮개돌을 옮길 때 필요한 사람 수>   

보통 1톤의 바위를 옛날 방식으로 옮기려면 성인 남성 10명의 힘이 필요해요. 220톤 무게의 핑매 바위를 옮기려면 약 2,200명의 사람이 필요하지요. 핑매 바위를 기준으로 남자 1명 당 3~5명 정도의 가족이 있었다고 보면 한 마을에는 대략 1만여 명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어요. 이 많은 사람들이 핑매 바위를 중심으로 산 아래쪽에 모여 살았을 거예요.

핑매 바위 아래에는 작은 크기의 많은 고인돌이 모여 있어요. 핑매 바위처럼 크기가 크고 잘 다듬어진 고인돌은 무덤이라기보다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으로서 쓰였을 것으로 보여요. 마을 사람들은 무거운 돌을 함께 끌고 와 고인돌을 만들고, 그곳에 모여 죽은 자들의 넋을 위로했을 거예요. 또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마을 사람들의 협동과 단결을 이끌어내지 않았을까요?

고인돌은 지배자의 무덤?

고인돌은 많은 사람을 동원해 만들었기에 보통 지배자의 무덤이라 추측하고 있어요. 고인돌에 함께 묻은 물건들을 통해서도 죽은 자의 신분을 알 수 있지요. 돌검이나 청동검은 마을의 우두머리가 사용하던 것이에요.

<고인돌의 내부모습 복원(고창고인돌박물관)>   

그러나 고인돌이 꼭 지배자의 무덤인 것은 아니에요. 고인돌에서는 어린 아이, 여자, 노인들로 보이는 사람의 뼈도 발견되었어요.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던 토기나 돌로 만든 도구들도 나왔지요. 크기가 작은 고인돌은 아마도 평범한 일반 사람들이 묻혔을 것으로 보여요. 핑매 바위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수백 개의 화순 고인돌은 지배자와 마을 사람들 모두를 위한 공동묘지라 할 수 있지요.

고인돌 왕국 한반도

기원전 2,500년~기원전 수백 년 전후로 만들어졌던 고인돌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많아요. 지금까지 한반도에서는 약 2만 여기 이상의 고인돌이 발견되었어요. 거대한 고인돌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청동기 시대 한반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고인돌은 주로 해안이나 강변의 바위산 절벽 근처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어요. 모두 고인돌의 재료를 구하기 쉬운 장소들이에요.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강과 바다 주변의 살기 좋은 평지에 모여 살면서 근처 산의 바위를 이용해 고인돌을 만들었을 거예요.

사람이 살기 좋은 곳에 터를 잡은 청동기 시대 마을은 이후에도 사람들이 그곳에서 계속 살면서 청동기 시대의 흔적을 조금씩 덮어 갔어요. 그래서 지금 청동기 시대 마을 유적은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답니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은 발굴을 통해서 여러 마을 유적을 확인했어요.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마을은 부여 송국리에서 발견되었어요.

부여 송국리 유적을 발굴해 보니 통나무를 이용해 목책(나무담장)을 세운 흔적, 적을 막기 위한 물구덩이, 집터가 발견되었어요. 목책과 물구덩이는 적을 막기 위한 시설이에요. 이 유적을 통해 청동기 시대에 여러 부족 사이에 잦은 전쟁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어요.

집터는 모두 100여 개가 발견되었는데, 둥근 모양의 집터와 주춧돌을 사용한 네모 모양의 집터가 나왔어요. 집짓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집 안에 더 넓은 공간을 만들 수 있는 모양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부여 송국리 유적과 화순 고인돌 유적 마을 복원 모습>   

또한 여러 점의 토기, 항아리, 시루와 반달 돌칼, 돌낫, 돌도끼도 발견되었어요. 이 유물들은 주로 농사와 관련된 것으로 신석기 시대 도구보다 더 발달된 모습을 하고 있어요. 그물추와 가락바퀴도 발견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물고기도 잡고, 실도 짰음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에요.

<청동기 시대의 다양한 생활 도구들>   

마을 밖에서는 고인돌도 발견되었어요. 마을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며 함께 생활하다 죽으면 마을 가까이에 묻혔어요. 죽어서도 고인돌에 묻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한 것이지요.

<우리나라 고인돌의 분포>   

역사 속 작은 이야기: 고인돌은 우리나라에만 있을까?

<세계 고인돌의 분포>   

고인돌은 유럽, 인도, 동남아시아 등 유라시아 대륙에서도 발견되었어요. 유럽에 있는 고인돌은 주로 탁자 모양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여러 개의 돌을 이어 터널처럼 길게 연결시켜 놓은 모양도 있어요. 이것은 한 사람을 묻는 한반도의 고인돌과 달리 여러 사람을 함께 묻기 위해 만든 것이에요.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자연의 모든 것이 살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중에서도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바위를 중요한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죠. 큰 바위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문화가 전 세계에 널리 퍼져있었음을 고인돌을 통해 알 수 있어요. 사람들은 커다란 바위를 사용해 무덤을 만들고, 그 바위처럼 죽은 자가 영원하기를 바랐을 거예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많은 역사의 흔적들은 지워졌지만 고인돌은 그 자리에 남아 우리 선조들이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를 지금까지 보여주고 있어요. 변하지 않는 돌, 고인돌! 여러분도 고인돌과 함께 옛 조상들의 삶을 상상해 보아요.

<프랑스 까르냑의 고인돌>   

[집필자] 신범식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