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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하고 다양해진 고려 불상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충남 논산시)>   
문화재청

“우리 마을에도 거대한 불상이 완성되었다네.”

“이제 멀리서도 부처님을 볼 수 있겠어. 고생했네.”

고려 시대에도 사람들에게 불교는 매우 중요하였어요. 전국 곳곳에는 수많은 불상들이 세워졌지요. 그런데 고려 시대 불상들은 통일 신라에 비해 투박하고 거대한 불상이 많아졌어요. 왜 그럴까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불상은?

고려 시대에는 거대한 불상이 많았어요. 가장 대표적인 불상으로 충남 논산시 반야산에 있는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323호)이 있어요. 흔히 ‘은진미륵’으로 널리 알려진 이 불상은 고려 광종의 명으로 고려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승려 혜명이 주도하여 만들었어요.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높이가 18미터나 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불상이에요. 또한 이 불상은 고려 초에 만들어진 거대한 불상의 대표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불상은 두 개의 커다란 돌을 이어서 만들었어요. 몸에 비해 큰 머리, 독특한 얼굴, 원통형의 보관과 천개(뚜껑처럼 생긴 넓적한 돌), 단순하고 뭉툭한 손 등으로 특이하게 보여요. 네모난 얼굴, 좁은 이마, 넓은 볼, 길게 째진 부리부리한 눈, 두툼한 입술, 넓적한 코와 유난히도 큰 귀 때문에 권위적으로 보여요.

통일 신라의 석굴암 본존불은 완벽한 조형미와 온화하고 근엄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어요. 반면 고려 시대 은진미륵은 엄청난 크기에 전체적인 비례도 잘 맞지 않고 조화롭지 않은 어딘가 어색한 듯한 모습이지요. 어떻게 보면 마을마다 세워진 장승처럼 익살스럽기도 해요. 또한 언제 어디서나 백성들을 바라보며 뭔가 큰 힘을 발휘할 것 같은 부처님을 느끼게 하지요.

한편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보물로 지정되어 관리되어 오다가, 그 가치를 다시 평가받아 국보로 승격되었어요.

  

불상의 이름은 어떻게 붙여졌을까요?

불상 이름은 평소 잘 쓰지 않는 말인데다가 길기까지 해서 어렵지요? 그런데 알고 보면 불상 이름은 일정한 순서에 따라 붙인 것이어서 그 규칙만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지요. 불상은 보통 출토 장소, 재료, 부처 종류, 자세 등의 순서로 이름을 붙여요.

맨 앞에는 그 불상이 원래 있던 장소를 표시해요. 장소는 시군까지만 밝히기도 하고, 동리까지 밝혀 주기도 하지요. 보통 문화재로 지정될 때의 지명이나 사찰 이름을 그대로 쓰기 때문에 현재의 명칭과 다를 수 있어요.

다음으로 불상을 만들 때 사용한 재료를 표시해요. 나무로 만들면 목불, 돌로 만들면 석불, 바위에 새긴 마애불, 쇠를 녹여 만든 철불, 구리로 만들어 금칠을 입힌 것은 금동불이에요.

그 다음은 어떤 부처인지를 표시해요. 불교에는 석가모니 부처님 외에도 여러 부처님이 있어요. 석가여래는 세상에 실존했던 부처님이에요. 아미타불은 극락정토를 관장하는 부처님이에요. 비로자나불은 불교의 진리를 상징해요. 약사여래는 중생들의 질병을 고쳐 주는 부처님이에요. 미륵불은 지금은 보살로 있지만, 미래 세상에 나타나 어려움에 빠진 중생들을 구제해 준다는 부처님이에요. 세상이 어지러울 때 사람들은 미륵불을 간절히 기다리곤 하였지요.

불상 이름 맨 끝에 있는 단어는 불상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를 표시해요. 서 있는 것은 입상, 앉아 있는 것은 좌상이라 해요. 소형 불상 가운데 한쪽 다리만 꼬고 앉은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반가상’이라 합니다. 좌상과 입상이 가장 많고 간혹 부처가 옆으로 누워 있는 자세의 와상도 있어요.

이와 같은 규칙으로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이름을 풀이해 보면, 충청남도 논산의 관촉사에 있는 돌로 만든, 미륵보살을 표현한, 서 있는 모습의 불상이 되겠지요. 다른 예로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경기도 파주의 용미리에 있는, 바위에 새긴 2구의 부처, 서 있는 모습의 불상이에요. 또 다른 예로 ‘하남 하사창동 철조석가여래좌상’은 경기도 하남시 하사창동 절터에서 발견된, 철로 만든, 석가모니 부처가, 앉아 있는 모습의 불상이에요.

다양한 고려의 불상들

고려 시대에는 건물 안에 모셔진 불상뿐만 아니라 실외의 거대한 석조 불상도 유행하였어요. 대표적으로 충남 논산에 있는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들 수 있지요. 이 외에 부여 대조사 석조보살입상, 예산 삽교읍 석조보살입상,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등이 있어요.

크기는 대부분 은진미륵보다는 좀 작지만, 몸체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조각한 뒤 차례로 올려 세우는 방법은 같았어요. 거대하면서 입체감 없는 돌기둥 형태, 비례감 없는 간략한 신체 표현 방법 등은 고려 시대 석불의 지방적인 특징이 잘 보여 주고 있지요.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문화재청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호)은 미래 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보살을 나타낸 것으로 높이가 10m나 돼요. 불상 위 머리 위 덮개 부분에는 네모난 관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사각형으로 넓적하며, 양쪽 귀와 눈은 크나 코와 입이 작아서 다소 비현실적인 느낌이에요. 어깨를 감싼 옷은 두껍고 무거워 보여 투박한 모습이에요.

예산 삽교읍 석조보살입상(보물 제508호)은 2개의 돌을 이어서 조각한 석불로 충청남도 예산군 수암산 중턱에 있어요. 머리에는 두건 같은 관을 쓰고 있고, 그 위에 6각으로 된 갓 모양의 넓적한 돌을 올려놓았지요. 어깨의 윤곽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조금씩 넓어지지만, 입체감 없이 밋밋하여 마치 돌기둥 같지요.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제100호)도 거대한 불상으로 마치 네모난 기둥 같지요. 머리에는 커다란 사각형의 갓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어색하게 큰 편이에요. 또 몸과 어울리지 않게 팔과 손을 붙여 비현실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요.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문화재청

바위에 새긴 불상을 마애불이라고 해요. 고려에는 이런 마애불을 흔히 볼 수 있어요. 마애불에는 커다란 바위에 불상을 얇게 새긴 것도 있고, 몸체만 새기고 머리 부분은 만들어 올린 것도 있지요. 머리에는 낮은 보관과 천개를 올렸어요. 천개는 ‘하늘 가리개’로서 야외에 새겨진 불상에 눈비가 닿지 않도록 모자처럼 씌운 것이에요.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얼굴과 보관 및 천개,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뒷면>   
문화재청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 입상(보물 제93호)은 거대한 자연 암벽에 새긴 2구의 불상이에요. 왼쪽 둥근 갓을 쓴 불상은 원통형의 목에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고, 오른쪽 4각형 갓을 쓴 불상은 합장한 손 모양만 다를 뿐 왼쪽 불상과 같은 모양이에요.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었고, 자연석 그대로 조각하여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 토속적인 분위기가 느껴지지요.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보물 제115호)은 자연 암벽에 신체를 선으로 새기고 머리는 따로 새겨 올려놓은 12미터가 넘는 거대한 불상이에요. 상투 모양의 머리가 높이 솟아 있고, 얼굴에는 자비로운 미소가 흐르고 있어 전체적인 형태는 자연스러운 편이에요. 양손은 검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어 왼손을 가슴에 대고, 오른손을 배에 대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요.

<서울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보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   
문화재청

이 밖에 6미터 높이의 보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보물 제216호)이 있어요. 또 서울 북한산에 가면 서울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보물 제215호)을 볼 수 있어요. 이렇듯 여러 산을 다니다 보면 의외로 거대한 마애불상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철불은 통일 신라 후기부터 고려 초기에 이르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많이 만들어졌어요. 철로 불상을 만드는 것은 재질의 특성상 매우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런데도 왜 이 시기에 철로 불상을 만들었을까요? 당시 무역이 원활하지 않아 수요가 많았던 금동불의 재료인 구리가 부족하였기 때문이에요. 또 널리 퍼져있는 사치스런 불교 행사를 삼가는 분위기도 있었고요. 이러한 상황에 철은 몇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구리를 대신해 불상을 만드는 재료가 되었지요.

대표적인 철불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하남 하사창동 철조석가여래 좌상(보물 제332호)이 널리 알려져 있어요. 이 불상은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하사창리의 절터에서 발견된 고려 초기의 철불이에요. 높이가 2.8미터, 그 무게는 무려 6.2톤에 이르지요.

하사창동의 절터에는 ‘천왕’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굴되었고, 고려 초기 비문에 ‘광주 천왕사’라는 기록이 있어 이 철불이 발견된 곳은 천왕사가 있었던 곳으로 여겨지고 있어요. 얼굴은 둥글지만 치켜 올라간 눈, 꼭 다문 작은 입, 날카로운 코의 표현에서 고려 시대 불상의 특징을 엿볼 수 있지요. 당당한 어깨와 두드러진 가슴은 통일 신라 석굴암 본존불의 양식을 이어받고 있음을 알 수 있어요. 철불 특유의 날카로운 인상에 비해 신체는 완만하고 전체 비례도 안정감이 있어요. 통일 신라 철불보다 부분 이음매가 훨씬 부드러워 제작 기술이 발전했음을 보여주고 있어요.

충주 철조여래좌상(보물 제98호)은 높이 0.98m의 철로 만든 고려 초기의 불상이에요. 머리에는 날카롭고 뾰족한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가 있어요. 삼각형에 가까운 얼굴, 길고 넓은 눈, 꽉 다문 입가로 내려오는 팔자형의 주름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어요.

<충주 철조여래좌상, 양평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문화재청

금동불은 가장 화려하며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불상이에요. 주로 금당에 모셔 두지요. 하지만 화재나 도난, 해외 유출 등으로 인해 많이 남아 있는 편은 아니에요. 고려 시대 금동 불상으로는 양평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 제1790호) 등이 있어요. 황금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불상은 사람들에게 고귀하고 성스러운 부처님을 만나게 하지요.

목불은 나무로 만든 만큼 오래가지 못해 전하는 것이 아주 드물어요. 근래 화성 봉림사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보물 제980호)이 고려 후기 이전에 만든 것으로 확인되었지요.

이 밖에 나무로 골격을 세우고 진흙을 붙여 가면서 만든 소조불이 있어요. 소조는 재료라기보다 제작 방법이에요. 고려 시대의 소조불은 그 사례가 흔치 않은 편이어서 이름에 ‘소조’자를 붙여주고 있지요. 대표적으로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안에 있는 부석사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이 있어요.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 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요.

고려 시대에는 왜 거대한 불상을 만들었을까요?

고려 시대의 거대한 돌부처는 일부를 제외하면 지방 사람들이 스스로 원해서 만들고 참배하였던 불상이에요. 지방 세력가의 후원으로 사람들이 힘을 모아 불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지방색이 강하게 나타나 있지요. 그래서 그런지 고려 시대의 거대한 석불은 대부분 돌기둥 같은 몸체에 토속적인 얼굴을 하고 있어요. 신체의 비례가 어색하고 입체감도 크지 않고 조각도 엉성한 듯 보이지만 얼굴만큼은 신경 써서 만든 불상이 많아요.

거대한 돌부처는 철이나 청동으로 만든 부처님에 비해 특별한 기술 없이도 만들 수 있었어요. 또 자연 암벽에 새겼기 때문에 비용도 덜 들고 야외에 만들어져서 참배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갈 수 있는 장점이 있지요.

고려 시대 불상이 커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통일 신라 말기 무렵부터 불상이 커지기 시작했지만, 고려로 와서 한층 활발해졌어요. 당시 중앙 정부와 지방 호족들은 부처님의 힘을 빌려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자 했어요. 불교계 또한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위엄을 효과적으로 보여 주고자 하였지요. 거대한 불상은 이러한 분위기에 맞물려 널리 만들어지게 되었어요. 거대한 불상은 훨씬 신비한 힘이 있어 보였고, 부처님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만족감을 주었지요.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윗부분>   
문화재청

역사 속 작은 이야기: 은진미륵 이야기

관촉사 은진미륵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요. 고려 광종 19년(968) 봄이었어요. 충남 논산 동쪽 사제천이라는 마을에 사는 한 할머니가 나물을 캐러 반야산으로 올라갔을 때였어요. 어디선가 웬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 오는 것이었어요. 할머니는 이상한 생각에 울음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가 보았어요.

“에그머니나! 저게 뭐야?”

아기는 보이지 않고 갑자기 큰 바위 하나가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이었어요. 깜짝 놀란 할머니는 비명을 지르며 산 밑으로 달아났어요. 이 소식을 들은 고을 원님은 기이하게 여겨 곧바로 조정에 알렸어요. 고려 광종 임금은 신하들과 이 일에 대해 의논하였어요.

“폐하, 이것은 땅 밑에서 솟아오른 바위에 부처님을 새겨 세우고, 슬픔에 잠긴 백성들을 위로하라는 부처님의 뜻이라 여겨지옵니다.”

광종은 전국에서 훌륭한 솜씨를 지닌 석공들을 불러들이고, 금강산의 혜명 스님을 불러다 그 바위를 깎아 불상을 만들게 하였어요. 혜명 스님은 반야산에 올라가 그 바위를 자세히 살펴보았어요. 바위는 크고 넓었지만, 생각만큼 높지는 않았어요. 이 바위로는 불상의 아랫부분을 만들고, 불상의 윗부분은 따로 바위를 찾아 만들기로 하였어요.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서 알맞은 바위를 찾았어요.

혜명 스님은 길이 남길 웅대한 석불을 만들겠다고 다짐했어요. 석공들은 두 패로 나누어 정성을 다해 바위를 깎고 다듬으며 부처님을 만들어 나갔어요. 드디어 37여 년이라는 긴 세월 끝에 높이 18여 미터의 거대한 불상이 완성되었어요.

그러나 혜명 스님은 또 다른 고민이 생겼어요. 석불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아랫부분에 윗부분을 올려놓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에요. 혜명 스님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혜명 스님은 마을의 냇가 모래밭에서 찰흙으로 불상을 만들며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게 되었어요. 한 아이가 모래를 편편하게 고르더니 불상의 아랫부분을 놓았어요. 그러자 다른 아이가 불상의 아랫부분 주위로 모래를 경사지게 쌓더니, 그 위로 불상의 윗부분을 밀어 올려 놓는 것이었어요. 그리고는 주위에 묻었던 모래를 치워 버리자 불상이 우뚝 서 있게 되었지요.

“오! 바로 이거다!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혜명 스님은 매우 기뻐하며 한달음에 반야산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일꾼들을 모아 놓고 흥분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어요.

“불상의 아랫부분 주위에 흙을 쌓아 비탈길을 만드시오. 그런 다음 불상의 윗부분을 밀어 올리시오.”

불상을 올리고 흙을 치우니 과연 거대한 은진미륵 불상이 완성되었어요. 혜명 스님과 석공들 모두 기뻐 어쩔 줄 몰랐어요. 혜명 스님은 마을 냇가에서 만난 아이들이 너무나 고마웠어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다시 한번 그곳에 가 보았어요. 그러나 아이들은 어디로 갔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음, 아마 문수보살이 어린아이로 변해 나에게 지혜를 주셨구나.”

혜명 스님은 감격하며 두 손 모아 부처님께 감사를 드렸어요.

여러분이 직접 고려의 거대한 불상들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아마 못생긴 모습에 웃음을 지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거대한 부처님의 모습에 고려 문화의 다양함과 위대함을 느끼지 않을까요?

[집필자] 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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