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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위기를 극복하고자 만든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전(경남 합천군)>   
문화재청

“이번에 대장경을 다시 새긴다 하더군.”

“나도 이번 일에 참여해서 작은 마음이나마 보태려고 하네.”

“이번에도 부처님 도움으로 외적의 침입을 물리쳤으면 좋겠네.”

고려는 몽골군의 침입을 맞아 대장경판을 만들기로 하였어요. 고려는 왜 이 긴박한 전쟁 상황에서 대장경판을 만들었을까요? 고려가 만든 대장경판은 고려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고려, 대장경판을 만들다

고려 현종 때 거란이 쳐들어오자 고려 사람들은 대장경판을 만들었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이지요. 이때 만들어진 대장경을 ‘처음 만든 대장경’이라는 뜻으로 초조대장경이라고 해요. 그런데 고려는 혼란스런 전쟁 중에 대장경판을 왜 만들었을까요?

고려는 불교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나라에요. 왕부터 백성까지 모두 불교를 믿었지요. 그래서 고려는 절을 짓거나 탑을 쌓는 등의 불교 사업을 통해 백성들의 마음을 한곳으로 모으곤 하였지요. 또한 나라에 어려움이 생기면 부처님의 힘으로 이를 이겨내려고 하였지요.

“대장경을 판각하여 불법의 보호로 외적을 물리치게 하소서.”

거란의 침입은 고려에게 큰 위기였어요. 고려는 거란과 맞서 싸우는 한편 대장경을 나무판에 새겼어요. 고려 사람들은 대장경 판각이 부처님 말씀을 널리 전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나라를 지켜 준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고려는 전쟁 중에도 힘든 대장경 판각을 통해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자 하였던 것이지요. 이 덕분인지 몰라도 다행히 고려는 거란을 물리칠 수 있었어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구의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초조대장경은 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졌어요. 이 일은 고려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어요. 고려를 지켜 주던 대장경이 불타 버렸으니 몽골군을 막을 힘이 없어졌다고 생각하였지요.

고려는 다시 대장경을 새기기로 하였어요. 당시 무신 정권은 대장경판을 만들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용기를 북돋아 몽골과의 항쟁을 계속 이어 가고자 하였어요. 고려 사람들은 대장경을 새기며 빌었어요. 예전에 대장경을 새겨 부처님의 힘으로 거란군을 물리친 것처럼 이번에도 대장경을 새기니 몽골군을 물리쳐 달라고 말이지요.

귀족에서 부녀자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대장경판 제작에 스스로 참여하였어요. 어떤 사람은 재물을 시주하고, 어떤 사람은 직접 글자를 새기는 일을 하였지요.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불교를 믿는 마음이 깊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팔만대장경은 무엇인가요?

그런데 대장경은 무엇일까요? 대장경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 그리고 제자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해설한 글들을 모두 모아 정리한 불교 경전들을 한데 아울러 이르는 말이에요.

중국에서는 불교가 도입된 이후 불교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사업이 활발히 벌어졌어요. 그런데 불경을 구하는 대로 두서없이 번역하다 보니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종이보다는 돌이나 나무에 새기고자 했어요. 대장경은 불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불상처럼 신앙의 대상이 되었지요. 대장경을 만들고 모시는 것만으로도 부처님의 공덕을 입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중 하나>   
문화재청

1237년에 만들기 시작한 고려의 대장경판 만들기 사업은 1251년에 이르러야 끝났어요. 이것이 바로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이에요. 고려 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초조대장경에 이어 다시 만들었다고 하여 ‘재조대장경’이라고도 부르지요.

하지만 보통은 대장경 목판의 개수가 8만 장이 넘는다고 해서 ‘팔만대장경’이라고 불러요. 또한 불교에서 8만은 구체적인 수라기보다는 많다는 뜻이에요. 8만 4천 가지의 괴로움에 해당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요.

국보 제32호인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은 매우 많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모든 글자가 정밀하고 고르게 새겨져서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 또한 지금까지 남아있는 대장경 목판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가 오래되고 내용도 완벽하기 때문에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답니다.

  

세 번 절하고 한 글자를 새기며 만들다

팔만대장경을 만드는 일은 하나하나 매우 어렵고 힘든 큰일이었어요. 수많은 불경을 정리하는 일부터 시작해 나라의 강력한 의지와 재정적 지원, 그리고 백성들의 단결된 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하였어요.

팔만대장경판은 나무로 만들었어요. 엄청난 양의 나무를 마련하여야 했고, 그것을 크기에 맞게 잘라 목판으로 만든 후 한 글자씩 새겨야 했지요. 나무는 세월이 지나면 벌레가 먹거나 습기에 썩어 훼손되어요. 이것을 막기 위해 팔만대장경판에 쓰이는 나무는 잘라서 바닷물에 3년을 담가 놓은 후 다시 소금물에 쪄서 사용했어요.

목판에 글자를 새기는 일은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어요. 자칫 한 글자만 실수해도 판 하나를 다시 새겨야 하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집중하기 위해 목욕하고 몸가짐을 가다듬은 뒤에 정성을 다하여 글자를 새겼어요. 그만큼 한 글자 한 글자마다 고려 사람들의 정성과 혼을 담아 만들었던 것이에요.

팔만대장경판은 경판 하나에 평균 한 줄에 14자씩 23줄을 앞뒷면에 새겼어요. 경판 1매당 644자를 새긴 꼴이지요. 이런 경판이 81,258매이니 경판 매수를 곱하면 글자 수는 무려 5,233만 152자가 되는 어마어마한 양이지요.

더 놀라운 것은 이 수천만 개의 글자가 모두 한 사람이 쓴 것 같이 모양도 고르고 오탈자도 거의 없다는 사실이에요. 또한 경전들의 내용을 일일이 비교해 가면서 잘못된 곳을 바로잡았기 때문에 내용도 정확하고 풍부하답니다.

글자를 다 새긴 다음에는 경판 표면에 옻칠을 해서 벌레 먹는 것을 방지하였어요. 또한 뒤틀림 방지를 위해 경판 네 모서리는 구리판으로 단단하게 고정하였어요.

팔만대장경판의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요?

경판 하나의 두께가 2.6~4cm로 팔만대장경판을 모두 쌓으면 약 2,400m가 넘어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인 백두산의 높이가 2,744m인 것을 생각해보면 팔만대장경판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겠지요.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의 앞면과 뒷면>   
문화재청

고려 인쇄술의 발달을 보여 준 팔만대장경

대장경은 판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지만, 인쇄를 해서 널리 퍼뜨리는 데 더욱 큰 뜻이 있어요. 팔만대장경은 고려 말과 조선 시대에 수차례 인쇄되었어요. 경판 앞뒤로 글자가 새겨져 있어 실제 인쇄량은 16만 면이 넘기 때문에 대장경 인쇄는 여간 방대한 작업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대장경 인쇄는 대개 나라에서 실시하게 마련이었고, 일부만 인쇄하는 일도 많았어요.

팔만대장경 판각은 인쇄술이 뒷받침되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인쇄술이 발달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회에서 지식을 얻고자 하는 욕구가 크다는 것을 뜻해요. 필요한 책의 종류나 양이 그다지 많지 않았을 때는 손으로 일일이 베껴서 책을 만들었어요. 그러다 필요한 책이 점점 늘어나자 책을 한꺼번에 만들어 낼 수 있는 인쇄술이 개발되었어요. 그것이 바로 나무판에 글자를 뒤집어 새긴 목판이랍니다. 목판은 비록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지만, 한번 만들어 놓으면 같은 내용을 많이 찍어 낼 수 있었지요.

<팔만대장경판을 만드는 모습>   

팔만대장경판 보관 건물이 유명한 이유는?

팔만대장경판은 강화도에서 보관하다가 조선 태조 때 한양을 거쳐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로 옮겨 보관해 오고 있어요. 해인사 안에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창고를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이라고 해요. 이곳에는 8만여 개나 되는 팔만대장경 목판이 마치 도서관의 책처럼 판가에 빽빽이 꽂혀 있지요.

13세기에 나무로 제작된 8만여 개의 팔만대장경판이 오늘날에도 거의 온전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어요.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이 천 년이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잘 보존되어 우리 곁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팔만대장경판의 보존 비결은 바로 장경판전 건물에 있어요. 장경판전은 통풍이 잘 되도록 앞뒤 벽에 창을 냈는데, 남쪽과 북쪽에 있는 창의 크기를 서로 엇갈리게 해서 건물 안에 들어간 공기가 아래위로 돌아 나오도록 만들었어요. 게다가 사찰에서는 보통 대웅전 같은 법당이 가장 높은 자리를 잡지만, 해인사에서는 장경판전이 가장 높은 곳에 있어요. 이 위치는 가야산 세 계곡이 만나는 지점과 멀지 않아 항상 바람이 불어온다고 해요.

또 판전 내부에는 굵은 나무를 써서 5층으로 튼튼하게 판가를 설치하고, 각 층마다 경판을 2단으로 일정하게 세워 놓았어요. 경판의 글씨를 새긴 부분은 목판 양쪽 끝 부분보다 얇아서 판과 판이 겹쳐도 손상되지 않고 공기가 통할 수 있도록 하였어요.

판전 바닥에는 숯과 횟가루, 소금, 모래를 차례로 깔았어요. 숯은 흡착력이 강해 공기와 물을 정화하는 기능이 있고, 소금은 외부 습도에 따라 수분을 흡수하거나 증발시키면서 습도를 조절하는 성질이 있어요. 이것 덕분에 판전 건물 내부의 습도는 늘 일정하게 유지되고 해충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어요.

<장경판전 뒷면 창살과 앞면 창살>   
문화재청

아무리 온갖 정성과 노력으로 팔만대장경판을 만들었다고 해도 목판은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오래되면 부서지거나 썩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는 장경판전 건물이 자연 조건을 이용하여 통풍과 습도 등을 잘 조절할 수 있도록 과학적으로 지었기 때문에 팔만대장경판은 7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온전히 잘 보존될 수 있었어요.

국보 제52호로 지정된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은 1995년 문화적·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어요.

<장경판전 외부의 모습과 내부의 모습>   
문화재청

역사 속 작은 이야기: 목숨 걸고 팔만대장경을 지킨 공군 장교 이야기?

1951년 6·25 전쟁이 한창이던 어느 날이었어요. 한국 공군 편대장 김영환 대령은 북한군이 몰려 있는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당시 한국 공군은 가야산의 해인사 일대를 중심으로 북한군 소탕을 위해 지상 공격 작전을 펼치고 있었지요.

그런데 김영환 대령은 쉽게 명령을 따를 수 없었어요.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고민하던 김 대령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자신이 이끌고 있던 전투기들에 다른 명령을 내렸어요. 명령 불복종이었어요.

“절대 내 명령 없이는 폭탄과 로켓탄을 사용하지 마라. 대신 해인사 주변의 북한군 무리에 기관총으로 공격하라.”

해인사 폭격을 독촉하는 명령이 또다시 떨어졌어요. 하지만 김영환 대령은 또다시 거부하고 부하들에게 반대의 명령을 내렸어요.

“각 전투기는 일체 공격을 중지하고 내 뒤를 따르라.”

그리고는 김 대령이 이끄는 전투기 편대는 방향을 돌려 다른 곳의 북한군 무리를 폭격하고 기지로 돌아갔지요. 평상시에도 군인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크게 처벌받지요. 더구나 전쟁 상황에서 명령을 어겼다는 것은 목숨을 내건 일이었지요.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은 당장 사형을 시키라며 크게 화를 냈어요. 하지만 당시 공군 참모 총장이 김영환 대령의 사정을 대통령에게 전함으로써 김 대령의 사형을 면하게 되었지요.

한편 김영환 대령은 명령 불복종죄로 문책을 받을 때 자신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어요.

“태평양 전쟁 때 미군이 일본 교토를 폭격하지 않은 것은 교토가 일본 문화의 상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에게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신적 지주인 팔만대장경이 있습니다. 해인사는 세계적 보물인 팔만대장경판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 곳을 어찌 수백 명의 공비를 소탕하고자 잿더미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공비들은 며칠이 지나면 해인사를 떠날 것입니다. 저는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의 공군 장교입니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서는 폭탄을 투하할 수 없었습니다.”

김영환 대령의 목숨을 건 행동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팔만대장경판과 장경판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마터면 세계유산이자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불 속에서 그만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했지요. 이런 분들의 용감한 행동으로 찬란한 우리 역사가 이어져 내려오고 민족의 힘이 되고 있는 것이랍니다.

[집필자] 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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