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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뛰어난 건축 기술을 알려주는 목조 건물

<부석사 무량수전(경북 영주시)>   

“스님! 선왕이신 공민왕 때 불탄 무량수전을 다시 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역사가 깊은 건물이니 그래야겠지요. 원래 모습으로 다시 짓도록 합시다.”

왜구의 침입으로 불탔다가 고려 말에 다시 지어진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 시대의 건축 기술을 알려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이에요. 이 목조 건물에는 배흘림기둥과 주심포 양식이 사용되었어요. 고려 시대 대표적인 목조 건물들을 살펴보면서 당시 우리 조상들이 만든 건축물의 특징을 살펴볼까요?

현재 남아 있는 고려 시대 목조 건물들

목조 건물이란, 나무로 만든 건물이라는 뜻이에요. 나무는 돌에 비해 빨리 낡고 불에 타기 쉬워서 오랫동안 보존되는 경우가 드물어요. 그래서 삼국 시대에 만들어진 목조 건물은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어요.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목조 건물들이 현재 전하는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어요. 특히 주심포 양식으로 지은 건물이 많은데,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 등이 대표적이에요. 주심포 양식은 목조 건물 지붕의 무게를 기둥에 고르게 전달하면서 동시에 건물을 꾸며주는 나무 장식(공포)을 기둥 위에만 설치한 것을 말해요.

<공포 : 주심포 양식의 나무 장식(부석사 무량수전)>   
문화재청

안동에 있는 봉정사 극락전에서는 보수 공사 중 조선 시대에 지은 상량문(건물이 세워지고 다시 지어진 내력과 건물의 안녕을 비는 글)이 발견되었는데, 이 상량문에 공민왕 때 지붕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요.

일반적으로 전통 목조 건물은 새로 지은 지 대략 100∼150년이 지나야 지붕을 다시 수리하기 때문에 봉정사 극락전은 12∼13세기에 만들어졌다고 짐작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건물이 현재 전해지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고 알려져 있지요.

“돌도 아닌 나무로 지어진 건물이 800년 이상 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네요.”

“맞아요. 오랜 세월 동안 불에 타지 않고 몇 백 년을 거쳐 지금까지 보존되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기둥 가운데가 불룩 튀어나온 배흘림기둥과 주심포 양식으로 만든 대표적인 건물이에요. 한편,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1937년 수리할 때 건물의 내력이 적힌 글이 발견되었는데, 고려 말 충렬왕 때인 1308년에 지어졌다고 해요. 이 건물 역시 700여 년이 넘게 잘 보존되고 있어요.

반면 황해도에 있는 성불사 응진전은 앞에 소개한 건물들과 다르게 다포 양식으로 지어졌어요. 다포 양식은 고려의 뒷 시기에 유행한 건축 양식의 하나인데, 기둥 위에만 나무 장식이 있는 주심포 양식과 달리 기둥은 물론 기둥 사이 사이 벽면 위에도 나무 장식이 놓여 있어요.

<공포 : 다포 양식의 나무 장식(성불사 응진전, 황해북도 황주군)>   
국립중앙박물관

  

무량수전의 과거와 현재

우리나라 미술사를 연구한 학자들에게 한국 전통 건축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낸 건물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대다수가 주저 없이 부석사 무량수전이라고 대답한다고 해요. 또 우리나라 건축가들에게 같은 질문을 해도 대개 부석사를 첫 손가락에 꼽지요.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뛰어난 목조 건물로 꼽는 무량수전은 언제 만들어졌을까요? 무량수전이 속해 있는 부석사라는 절은 통일 신라 시대에 지어졌어요. 『삼국사기』에 따르면 676년 의상 대사가 문무왕의 명을 받아 부석사를 건립했는데, 이때 부석사의 중심 건물인 무량수전도 지어졌지요.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 씌어 있는 현판>   
문화재청

무량수전은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세계, 즉 행복하고 안락한 이상적인 곳을 다스리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신 불당’이라는 의미랍니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니고 있어 ‘무량수불’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수명이 무한한(끝이 없는) 부처님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부석사가 불에 타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어요. 무량수전도 이때 불타고 말았지요. 그래서 고려 전기에 원융 국사라는 스님이 부석사를 다시 지었어요. 고려 말 공민왕 때 이르러 왜구의 침입으로 무량수전이 또 한 번 불타는 바람에 우왕 때 다시 건물을 지었답니다. 지금 전하는 무량수전도 이때 지어진 건물이지요.

이후 조선 시대 광해군 때는 비바람으로 인해 건물이 일부 파손이 되어 수리하였어요. 이처럼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몇 차례 다시 짓기도 했지만 무량수전의 모습은 고려 전기의 양식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맵시 있는 지붕의 추녀 곡선, 그 추녀와 기둥의 조화, 처마의 머리를 받쳐 주는 간결한 나무 장식(주심포 양식)으로 유명하답니다. 그래서 2018년에는 무량수전이 속해 있는 부석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어요. 이제부터 우리 함께 무량수전을 통해 뛰어난 고려 목조 건축 기술을 살펴볼까요?

<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 무량수전은 장식이 적어 단정하면서도 균형 잡힌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있어요. 이 건물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인간의 눈으로 생기는 착시 현상을 없애는 과학적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랍니다. 즉, 착시 현상으로 인해 사물이 본래 모습과 다르게 보이는 것을 줄이기 위해 세심한 배려를 했다는 점이에요.

무량수전은 모퉁이의 기둥을 안쪽으로 약간 기울여 세웠어요. 이는 건물의 양 끝이 벌어져 보이는 불안감을 없애주지요. 또 건물의 양 끝 기둥은 다른 기둥보다 약간 높게 세워 안정적으로 보이게 하였어요. 그리고 중간이 굵고 위아래로 가면서 줄어드는 배흘림기둥은 기둥의 중앙 부분이 좁아 보이는 착시 현상을 보완하였지요.

한편, 무량수전은 내부가 다른 불당과 달라요. 불당은 불상을 모신 건물을 말하는데, 다른 절의 불당은 대부분 불상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런데, 무량수전은 불상이 건물의 왼쪽 끝에서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어요.

<밖에서 본 무량수전 불상(왼쪽)과 무량수전 내부의 모습(오른쪽)>   
문화재청

왜 이렇게 특이하게 불상을 놓았을까요? 이것은 내부의 불상이 앞에 늘어선 기둥들과 겹쳐 보이지 않게 해서 크고 엄숙한 느낌이 들게 하기 위해서라고 해요. 또한 불교에 따르면 아미타불이 서쪽에 있기 때문에 왼쪽에 놓았다는 의견도 있어요. 뿐만 아니라 강의와 의식을 행하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현실적인 목적일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어요. 한편, 내부 천장도 막혀 있지 않고 뚫려 있는데, 이렇게 하면 내부 공간이 훨씬 더 웅장한 느낌이 들지요.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과 주심포 양식>   

‘배흘림 양식’ 또는 ‘배흘림기둥’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만든 기둥일까요? 배흘림기둥은 중간이 굵고 위와 아래로 가면서 점차 가늘게 되는 원형 기둥을 말해요. 정확하게는 아래에서 3분의 1 지점의 폭이 가장 넓고, 위와 아래는 폭을 좁게 제작한 기둥을 가리키지요. 그러면 왜 이렇게 가운데를 불룩하게 만들었을까요?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의 눈은 사물을 바라볼 때 착시 현상을 보여요. 만약 배흘림양식으로 기둥을 만들지 않고 일직선으로 평평하게 만든다면 멀리서 볼 때 가운데가 움푹 파인 것처럼 보이지요. 대신 가운데를 불룩하게 배흘림기둥으로 만들면 멀리서 봤을 때 평평한 기둥으로 보여요. 이와 같이 건물을 안정감 있게 보이게 하려고 배흘림기둥으로 만든 것이지요.

사실 배흘림기둥은 부석사 무량수전에만 사용된 양식은 아녜요. 고구려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사용해 온 건축 기술입니다. 이러한 건축 기술은 고대 그리스의 신전 건물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하니, 동서양에서 공유되는 건축 기술이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한 것 같습니다. 그만큼 동서양의 교류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죠.

한편 고구려 때 만들어진 목조 건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 시대에 지어진 전라남도 강진의 무위사 극락전과 전라남도 구례의 화엄사 대웅전에서는 배흘림기둥을 볼 수 있어요.

한편, 우리 조상들은 무거운 지붕의 무게를 건물이 어떻게 지탱하도록 만들었을까요? 그것의 비밀은 처마 밑에 숨어 있어요. 처마 밑에 나무 장식물을 두어 지붕의 무게를 기둥이나 벽으로 전달하도록 했어요. 이것을 건축 용어로 ‘공포’라고 해요.

이러한 공포가 기둥 위에만 놓인 것을 주심포 양식, 기둥 사이 사이 벽면 위에도 놓인 것을 다포 양식이라고 불러요. 주심포 양식은 단정한 느낌, 다포 양식은 화려한 느낌을 주지요. 주심포 양식은 주로 고려 전기에 유행하였고, 다포 양식은 고려 후기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행하였어요.

역사 속 작은 이야기: 부석사에 전해오는 의상과 선묘의 사랑이야기

중국 책『송고승전』에는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과 선묘 사이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어요.

통일 신라의 승려 의상은 불교를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 중국 등주 지방에 도착하여 잠시 한 여인숙에 머물며 불교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 여인숙 주인의 딸 선묘가 의상을 마음 속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이후 의상이 10년 간의 중국 유학 생활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의상을 기다렸지만 결국 만나지 못한 선묘는 의상이 탄 배가 안전하게 신라에 갈 수 있도록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었다. 의상이 신라에 돌아와 불교를 널리 전파할 지역을 찾아다니다가 경상도 영주 봉황산에 좋은 곳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다른 무리가 자리잡고 있었다. 의상이 그들로부터 위협을 받자 선묘가 변한 용이 나타나 바위를 뜨게 해서 그 무리를 쫓아버렸다. 이후 의상이 그곳에 부석(浮石), 즉 돌이 뜬 곳이라는 의미를 담아 절을 세우고 부석사라 이름 지었다.

<선묘가 하늘로 뜨게 했다는 ‘부석(浮石)’이라고 씌어 있는 바위>   

무량수전을 본 뒤에는 뒤편에 ‘부석(浮石)’이라고 씌어 있는 돌과 조사당으로 향하는 3층 석탑 뒤편의 선묘각에 들러보면 좋겠어요. 부석사를 만든 통일 신라의 의상과 당나라의 선묘 낭자의 국경과 세속을 넘나든 아름답고도 슬픈 사랑이야기가 전하는 곳이기 때문이지요.

<무량수전 우측 뒤에 위치한 선묘각>   

[집필자] 방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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