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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조화를 이룬 궁궐, 창덕궁

<창덕궁(서울 종로구)>   
문화재청

“짐이 왕이 된 지 5년이 되었소. 이제 개경에서 다시 한양으로 도읍을 옮겨야겠소. 그리고 경복궁 동편에 새 궁궐을 짓도록 하시오.”

“예, 전하의 분부 받들겠습니다.”

경복궁 동쪽에 새 궁궐을 지은 사람은 조선의 제3대 왕 태종이에요. 태종이 새로 지은 궁궐은 무엇일까요? 경복궁과 다른 이 궁궐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태종, 조선의 두 번째 궁궐을 짓다

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 이성계는 한양을 새 도읍으로 결정했었지요. 하지만 조선의 제2대 왕 정종은 다시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으로 돌아갔어요. 다시 한양으로 도읍을 옮겨온 때는 제3대 왕 태종이 왕위에 오른 지 5년째 되던 해(1405년)였어요.

태종이 한양으로 돌아와서 새로 지은 궁궐은 창덕궁이에요. 태종은 경복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궁궐을 지었거든요. 경복궁은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달랐던 정도전이 세운 궁궐이고, 제1차 왕자의 난(1398년) 때 자신의 배다른 동생인 방석과 방번이 죽은 곳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창덕궁의 주요 건물이 완성된 후 태종은 이곳에 머물면서 금천교라는 돌다리를 만들고 돈화문도 세웠어요. 그리고 이곳에 주로 머물면서 경복궁과 창덕궁 두 개의 궁궐을 동시에 운영하는 양궐체제가 성립되었고, 이런 모습은 후대 왕들에게도 이어졌어요.

창덕궁은 경복궁과 다른 점이 있었어요. 바로 건물의 배치에요. 경복궁은 정문인 광화문에서 주요 건물인 근정전, 사정전 등이 남에서 북으로 차례로 배치되었어요. 이에 비해 창덕궁은 인정전, 선정전 등 주요 건물이 정문에서 약간 동쪽으로 들어가 배치되어 있어요. 자연을 크게 훼손하지 않고 건물을 지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태종 때 지어진 창덕궁은 지금의 모습과 조금 달랐어요. 창덕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넓은 후원인데 당시는 지금처럼 넓지 않았어요.

창덕궁의 후원이 지금의 면적과 같아진 것은 세조 임금 때에요. 세조는 경복궁에서 살다가 얼마 후 창덕궁으로 옮겼어요. 그 후 선조 임금 때에는 창덕궁이 폐허가 되었어요.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군이 경복궁을 비롯하여 한양의 궁궐을 모두 불태웠기 때문이에요.

임진왜란이 끝난 후 광해군은 궁궐을 다시 세웠어요. 이때 경복궁은 복구되지 못하고 창덕궁만 다시 건설했어요. 이후 창덕궁은 경복궁을 대신해서 조선의 대표 궁궐이 되었어요. 광해군 이후의 왕들도 창덕궁에서 살았지요. 그래서 부속 건물들이 비교적 원형 그대로 남아있어 조선 시대 궁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요. 한편 창덕궁 동편에는 창경궁도 지어져요. 이 두 궁궐을 합쳐서 ‘동궐’이라고 불렀어요.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   
문화재청

  

웅장한 규모의 돈화문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이에요. 다른 궁궐의 정문과 비교해보면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어요. 바로 출입문의 개수에요. 황제가 아닌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궁궐의 정문에 3개의 출입문을 만들어요. 그러니 조선의 궁궐도 그런 원칙을 따라야겠죠.

<돈화문>   
문화재청

그런데 창덕궁의 돈화문은 조금 다르게 만들어졌어요. 드나드는 문은 3개이지만 굳게 닫혀 있는 양쪽 끝의 문까지 합치면 5개처럼 보여요. 그런데 돈화문은 평상시에는 사용하지 않았어요. 왕이 행차할 때만 사용했다고 해요. 그럼 신하들은 어느 문을 통해 창덕궁에 들어갔을까요? 바로 서쪽에 있는 금호문을 사용했답니다.

<금호문>   

처음 모습을 간직한 금천교

돈화문을 지나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금천이라는 물길을 볼 수 있어요. 금천은 관리들이 이곳을 지날 때마다 사사로운 마음을 흘려보내고 마음가짐을 바로 해 나랏일을 하라는 의미로 만드는 것이에요. 다른 궁궐에서도 볼 수 있지요. 금천을 건너려면 다리가 있어야 해요. 다리의 이름은 궁궐마다 달라요. 창덕궁에 있는 다리는 금천교라 불러요.

금천교는 창덕궁이 만들어지고 6년 뒤에 설치되었는데 창덕궁에 여러 차례 불이 날 때도 없어지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요. 금천교는 현존하는 궁궐에 있는 돌다리 중 가장 오래된 것이에요. 금천교를 건너면 왕이 나랏일을 돌보고 생활했던 곳으로 갈 수 있어요.

<금천교>   
문화재청

창덕궁의 중심 건물 인정전과 청색 기와지붕의 선정전

인정전은 경복궁의 근정전처럼 창덕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에요. 이곳에서는 나라의 중요한 행사가 거행되었어요.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는 무엇이 있을까요? 아마도 왕위 즉위식이 아닐까요? 이곳에서는 효종을 비롯해 영조, 고종 등 여러 왕이 즉위식을 했어요. 인정전은 태종 때 처음 만들어진 후 여러 차례 불이 나서 다시 짓곤 했는데 지금의 모습은 순조 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요.

인정전을 지나 동쪽에 나란히 있는 청색 기와지붕의 건물이 보여요. 바로 선정전이죠. 선정전은 왕이 신하들과 만나 나랏일을 의논하던 곳(편전)이에요. 경복궁으로 치면 사정전과 같은 역할을 한 건물이지요. 선정전은 현재 있는 궁궐의 전각 중 유일하게 남은 청기와 건물이에요.

<인정전과 선정전>   
문화재청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곳, 희정당과 대조전

희정당은 왕이 잠을 자거나 일상생활을 하던 곳이에요. 그런데 순조 이후에는 나랏일을 하는 곳으로 용도가 바뀌었어요. 이전에 왕이 나랏일을 하던 공간인 선정전이 죽은 왕의 위패를 모시며 제사를 지내는 곳이 되었거든요.

한편 지금의 희정당은 창덕궁이 세워질 때의 모습이 아니에요. 일제 강점기인 1917년에 불이 나서 건물이 없어지자 경복궁의 강녕전(왕이 일상생활을 하던 건물)을 옮겨와 지었어요. 그러면서 내부에 쪽마루를 만들고 샹들리에를 달아 서양식으로 꾸몄어요.

대조전은 왕비가 생활하던 곳이에요. 이곳도 희정당처럼 1917년 건물이 불타 없어지자 경복궁의 교태전(왕비가 살던 건물)을 옮겨와 다시 지었어요. 대조전은 돈화문을 비롯해 5개의 문을 통과해야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궁궐의 아주 깊숙한 곳에 있어요.

<희정당과 대조전>   
문화재청

최근까지 사람이 살던 건물이 있다면서요?

창덕궁에는 1989년까지 사람이 살던 건물이 있어요. 바로 낙선재와 수강재에요. 이곳에 살던 사람은 영친왕의 부인인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예요.

낙선재는 헌종이 자신의 휴식공간으로 지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고 검소하고 소박해요. 헌종은 낙선재 옆에 후궁을 위해 석복헌도 지었어요. 지금은 창덕궁에 포함된 건물이지만 옛 기록에는 창경궁의 부속 건물로 되어있다고 해요. 창경궁과 연결된 곳에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낙선재>   
문화재청

창덕궁의 후원을 돌아볼까요?

창덕궁은 조선의 궁궐 중 후원이 가장 크고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해요. 어찌나 숲이 우거졌던지 호랑이가 나타날 정도였다고 합니다.

자! 지금부터 후원으로 가볼까요?

내의원와 창경궁 사이에 놓인 길을 따라가면 부용지라는 커다란 연못을 볼 수 있어요. 사각형 모양의 부용지 주변에는 과거 시험을 치르던 영화당이라는 건물과 규장각이 있었어요. 부용지에서 조금 더 가면 ‘늙지 않는 문’이라는 뜻을 가진 불로문이 있고 이곳을 지나면 애련지라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어요. 애련지는 연꽃을 좋아했던 숙종이 붙인 이름이에요. 애련지 건너편에는 순조 때 효명세자가 지은 건물도 있어요.

애련지를 지나면 부채처럼 생긴 독특한 모양의 정자와 연못을 볼 수 있답니다. 이곳을 지나면 연경당이라는 건물도 볼 수 있어요.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사대부의 집을 본 떠 만들었어요. 낙선재와 함께 단청을 그리지 않은 것이 특징이랍니다.

역사 속 작은 이야기: 창덕궁의 후원을 변화시킨 정조

창덕궁의 후원은 원래 왕과 왕실 가족의 휴식공간이었어요. 그런데 이곳을 새롭게 변화시킨 왕이 있어요. 조선의 제22대 임금인 정조이지요. 정조는 왕이 된 후 창덕궁 후원에 2층짜리 건물인 주합루를 지었어요. 주합루는 부용지라는 연못 북쪽에 자리잡았는데 1층은 규장각으로 사용했어요. 규장각은 정조 시기 학문을 연구하고 왕의 정치를 돕는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이로써 후원이 단순한 휴식공간을 넘어서게 되었어요.

주합루로 들어가려면 문을 통과해야 한답니다. 그 문의 이름은 ‘어수문(魚水門)’이에요. 여기서 ‘어수(魚水)’란 물과 물고기란 뜻으로 왕과 신하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해요. 이 문의 이름에서 정조가 왕과 신하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어요.

현재 서울에는 창덕궁을 포함해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궁궐이 5개 있어요. 그중에서 조선 왕들이 가장 오랫동안 살았던 궁궐이 창덕궁이에요. 창덕궁의 후원은 어느 계절에 가도 좋아요. 특히 가을에 가면 곱게 물든 단풍과 아름다운 낙엽을 볼 수 있어요. 여러분도 올가을 창덕궁 후원에서 왕과 왕비처럼 걸어보면 어떨까요?

<창덕궁 주합루>   
문화재청

[집필자] 김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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