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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의 보물 창고 조선왕조실록

<정족산사고지(인천 강화군)>   
문화재청

“김일손의 사초를 모두 궁궐로 들여오라.”

“예로부터 사초는 임금이 볼 수 없습니다. 임금이 만약 사초를 보면 있는 그대로 사실을 기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연산군은 이극돈에게 사초를 가져올 것을 명하였지만, 결국 김일손의 사초를 보지 못했어요. 도대체 사초가 무엇이길래 임금도 보지 못했던 걸까요? 사초는 평소 사관이 기록한 원고로 실록 작성의 기본 자료였어요. 그럼 실록은 무엇일까요?

조선왕조실록은 왜 편찬하였을까요?

조선은 새 왕이 즉위하면 이전 왕 때 일어난 일들을 책으로 만들었어요. 이것이 ‘실록’이에요. 말 그대로 ‘사실을 기록’한 실록은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연월일 시간 순서에 따라 편찬한 역사서이지요.

조선은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세운 나라에요. 유교는 기본적으로 옛것을 숭상해 모범적인 통치나 태평성대의 기준을 모두 고대의 모범적인 사례에 두었어요. 정책을 논의하다가 의견이 엇갈리면 옛날에는 어떻게 처리했는지 알아보고 참고하였지요.

그러다 보니 성현들의 언행이 기록된 경전과 역사 기록이 중시되었고, 자신들의 일도 후세에 참고가 될 수 있도록 모두 기록해서 남기고자 했던 거예요. 유교를 중시하는 조선에서 실록 편찬은 후손에게 역사를 전해 주는 아주 중요한 일이지요.

조선왕조실록은 역대 왕들의 기록이 모두 남아 있어 양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내용 또한 알차고 충실해요. 중국이나 베트남, 일본에도 실록은 있지만 다들 궁중에서 일어난 일만 기록했지요.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은 민간에서 일어난 일도 많이 기록해 두었어요.

또 금속 활자를 사용해서 찍어 냈고, 원본 그대로 전해지는 것은 조선왕조실록뿐이에요. 조선왕조실록은 국제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지요.

  

실록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나요?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을 기록한 분량이 총 1,893권 888책이에요. 이 내용을 원고지에 옮겨 적으면 63빌딩의 세 배 높이가 되고, 한글로 번역한 실록은 하루 100쪽씩 읽어도 4년 3개월이 걸리는 양이에요. 매우 방대하죠.

조선의 왕은 고종과 순종까지 모두 27대이지만, 그 당시 실록은 일제에 의해 만들어지면서 왜곡된 내용이 있어 조선왕조실록에 포함시키고 있지 않아요. 또 조선왕조실록 가운데에는 『연산군일기』,『광해군일기』와 같이 ‘일기’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있지만 성격과 체제는 실록과 같아요.

또 대개 한 왕에 1종의 실록을 편찬하는데, 선조‧ 현종‧경종‧숙종 때에는 역사적 상황에 맞춰 고쳐 편찬하기도 했어요. 이와 같은 경우는 원본과 수정본을 나란히 두어 수정 사항을 확인할 수 있게 했지요.

<실록청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있는 모습>   

실록은 왕이 죽고 나면 실록청이라는 임시 관청을 설치하여 편찬하였어요. 실록청의 규모는 왕의 통치 기간과 사료의 양에 따라 그때마다 달랐어요.

실록을 편찬할 때에는 사관이 기록한 ‘사초’를 기본 자료로 삼았어요. 일정 기간 동안 모아 춘추관에서 일시적으로 정리한 『시정기』,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의 업무 일지인 『승정원일기』, 조선 중기 이후 최고 의결 기관인 비변사의 사건 처리 기록인 『비변사등록』, 왕의 업무 일지인 『일성록』, 각종 공문과 개인의 문집이나 일기, 야사 등도 수집하여 참고 자료로 활용했어요.

자료를 정리해 초안을 만들고 이것을 기초로 1차 원고를 작성하면, 중간 책임자가 검토해서 2차 원고를 작성했어요. 이것을 다시 총 책임자와 함께 의논하여 문장과 체제를 통일해서 최종 원고본이 완성되지요. 이것을 정초라 해요. 실록의 정초가 완성되면, 활자로 인쇄해서 각 사고에 보관할 사본을 만들었어요. 인쇄 과정에서 자칫 잘못 들어가는 글자가 생길 것을 우려해 사관들이 교정도 보았어요.

실록을 인쇄하고 나면 사초와 실록청에서 작성한 원고들을 모두 폐기했어요. 지금 종로구에는 세검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요. 그 부근 냇가에서 종이를 물에 담가 먹물을 없애고 종이를 재생했어요. 종이가 귀한 시대에 종이를 다시 만들 수 있었고 무엇보다 실록에 담긴 국가의 주요 기밀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어요. 이러한 작업을 ‘세초’라고 해요.

<세검정에서 사초를 씻어 내는 모습>   

손으로 베껴 쓰면 잘못 옮기는 글자가 생길 수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은 인쇄본이기 때문에 그럴 염려가 없었어요. 실록을 활자로 찍어 낼 수 있었던 건 인쇄술의 발달 덕분이었지요.

최근에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선왕조실록을 영어로 번역하고 있는 사업을 하고 있어요. 앞으로 우리나라 역사에 관심이 있는 다른 나라 사람들도 조선이라는 신비한 세계를 맘껏 탐험할 수 있을 거예요.

임금도 사관의 눈길을 피하지 못한다?

실록을 비롯하여 각종 역사를 기록하고 편찬하는 일은 사관들이 담당하였어요. 사관의 가장 중요한 일은 사초를 작성하는 일, 즉 왕과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낱낱이 기록하는 거예요. 어전 회의는 물론 왕과 신하가 단독으로 만나는 자리까지, 사관은 왕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니며 모든 것을 기록했어요.

사초는 역사 기록의 기초 자료이기 때문에, 사관들은 있는 사실 그대로를 쓰는 직필을 중시하였어요. 왕이나 관료들로서는 자신에 대해 뭐라고 썼는지 무척 궁금했겠지요. 하지만 사초가 공개된다면 사관들이 남의 눈치를 보느라고 솔직하게 기록할 수 없겠지요.

그래서 사관들 외에는 아무도 사초를 보지 못하게 법으로 금지했어요. 왕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그리고 한 번 작성된 사초는 절대 고칠 수 없었어요.

이런 이유로 실록은 왕과 관료들이 바른 통치를 하도록 견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어요. 자신의 말과 행동이 모두 기록되어 역사에 남는다고 생각하면 허투루 행동할 수 없으니까요.

이렇게 기록한 사초를 사관은 매일 역사 담당 기관인 춘추관에 보고했고, 춘추관에서 이 사초를 일정한 기간마다 책으로 묶어 보관했어요. 사관은 춘추관에 보고하는 것 외에도 사초를 한 벌 더 작성했는데, 춘추관에 보관하는 사초에 적기 힘든 비밀 사항도 적고 자신의 의견도 덧붙였어요. 이 사초는 집에 보관한다고 해서 ‘가장 사초’라 해요. 나중에 실록 편찬이 시작되면 제출했어요.

왕도 마음대로 볼 수 없었던 사초

사관은 임금의 곁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그대로 꼼꼼히 기록했어요. 아무리 임금이라도 사관들의 눈은 피하지 못했지요. 아주 강력한 권력을 지닌 국왕이라도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려는 사관의 신념을 꺾을 수는 없었어요. 이와 관련하여 태종의 일화를 살펴볼까요?

하루는 태종이 사냥을 하러 갔어요. 그런데 그만 말에서 떨어졌지요. 순간 태종은 주위에 사관이 있는지 살펴보았어요. 자신이 말에서 떨어졌다는 것이 역사에 기록된다면 체통이 서지 않겠지요. 태종은 신하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어요.

“내가 말에서 떨어진 것을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러나 태종이 죽고 만들어진『태종실록』에는 말에서 떨어진 사실과 이 사실을 숨기려 했던 것까지 모두 기록되었지요. 국왕과 관료들은 사관이 자신들을 어떻게 기록할지 매우 신경이 쓰였어요. 그래서 사관을 피해 다니는 일까지 있었답니다. 그리고 아무리 임금이라도 사관의 기록인 사초를 함부로 볼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사초가 보고 싶었어요.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된 아버지가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궁금했지요. 하지만 당시 『태종실록』을 담당했던 신하는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전하께서 만일 실록을 보신다면 후세의 임금이 이를 본받아 실록을 고칠 것이며, 사관도 임금이 볼 것을 의식하여 사실을 다 기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어찌 후세에 진실함을 전하겠습니까?”

결국 세종도 사관의 강력한 반대로 사초를 보지 못하였지요. 역사를 사실 그대로 기록하기 위한 사관의 노력이 대단하지요?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는 실록의 소중한 역사 기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답니다.

조선의 역사가 담긴 실록을 온전히 보존하라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만큼 보관하는 방법도 중요했어요. 조선 건국 이후 실록은 춘추관에 한 부를 보관하고, 충주·성주·전주 등 교통의 요지였던 주요 도시의 사고에 한 부씩 모두 4부를 보관했어요.

그런데 임진왜란 때 실록은 전주 사고에 보관했던 것만 남고 모두 불타 버렸어요. 전주 사고의 실록은 난리가 나자 백성들이 미리 깊은 산속으로 옮겨서 무사할 수 있었어요.

<평창 오대산사고(강원 평창군)>   
문화재청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전주 사고의 실록을 원본으로 삼아 실록을 다시 인쇄했어요. 전쟁 후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역사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의지만큼은 확고했던 거지요.

<봉화 태백산사고(경북 봉화군)>   
문화재청

실록의 보관 장소도 주요 도시에서 깊은 산속으로 옮겼어요. 조선 후기에 실록은 춘추관에 한 부, 그리고 정족산·적상산·태백산·오대산 사고에 한 부씩 5부를 보관했어요. 이렇게 깊은 산 속 여러 곳에 사고를 둔 이유는 불이 나거나 임진왜란 때처럼 외적이 쳐들어 와 실록이 모두 없어질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였어요.

사고에는 실록뿐만 아니라 왕실의 족보, 중요한 역사서, 경서 등도 함께 보관했어요. 그러니까 사고는 국가의 중요한 서적 보관소였던 셈이지요.

사관들은 3년에 한 번 정도 사고 건물과 실록을 관리했어요. 사고에 찾아가 실록의 수를 점검하고, 상자에서 꺼내 햇볕에 말리고 먼지를 털어 주었어요. 좀이 스는 것을 막아 오래 보관하려는 노력이었지요. 이를 포쇄라고 하는데, 사관들의 중요한 업무였어요.

사고의 문은 정기 점검을 할 때, 새로운 실록을 봉안할 때, 나라에서 정책 결정을 위해 옛일을 참고할 필요가 있을 때와 같이 특별한 경우에만 열 수 있었어요. 이때는 중앙의 사관이 참여해야 했지요. 사고 문을 열어 본 후에는 반드시 누가 언제 어떤 이유로 열어 봤는지 기록지를 만들어 붙였어요. 이처럼 사고는 엄격하게 관리되었답니다.

다시 만들어진 실록은 병자호란이나 6·25전쟁 같은 위기를 넘기고 무사히 지금까지 전해졌어요. 실록은 1968년부터 한글로 번역되기 시작했는데 워낙 양이 방대하다 보니 1993년에야 작업이 끝났어요. 지금은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있어서 언제든지 인터넷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실록을 읽을 수 있어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사고가 있었던 곳>   

역사 속 작은 이야기: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따분한 정치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백성들의 생활 모습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기록도 있어요. 독특한 주제의 이야기나 생활사에 관한 재미난 기록들도 있어요.

예컨대 태종 때 일본에서 온 코끼리, 선조 때 남자 아이들의 귀고리 유행, 정조가 썼다는 안경 등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도 담겨 있지요. 이 중 코끼리 이야기를 소개해 볼까 해요. 우리나라에 없었을 것 같지만 코끼리가 태종실록에 처음 등장해요.

일본 국왕이 코끼리 한 마리를 바쳤다. 우리나라에는 처음이다. 사복시에서 기르게 했는데 하루에 콩을 4~5말씩을 먹는다.
-태종 11년 2월 22일 (계축)

그런데 문제가 터졌어요. 다음 해인 1412년에 관리 이우가 코끼리를 구경하며 못생겼다고 놀리다가 성난 코끼리에 그만 밟혀 죽는 사건이 일어난 거예요.

이에 조정에서는 코끼리에 대한 재판을 열었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동물 재판인 셈이지요. 재판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재판장은 임금에게 코끼리 재판 결과를 이렇게 보고하였어요.

“일본에서 바친 이 코끼리는 임금께서 곁에 두고 즐기는 동물도 아니고, 일 년에 먹어 없애는 곡물이 거의 수백 석에 이르러 나라의 이익에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이미 한 사람을 죽였고, 이번에 또 사람을 다치게 했습니다. 법으로 따지자면 사람을 죽였으니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옛날 중국에서 있었던 선례에 따라 코끼리를 전라도의 외딴 섬에 귀양 보내는 것이 옳은 줄 아뢰옵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코끼리는 전라도의 장도에 귀양을 갔어요. 그 후 전라감사로부터 이 코끼리가 먹지 않고, 사람만 보면 슬피 울며 눈물을 흘린다는 보고가 올라왔어요.

이를 불쌍히 여긴 태종은 다시 육지에서 기르게 했는데 워낙 많이 먹어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었다고 해요. 그래서 전라·경상·충청도에서 번갈아 가며 이 코끼리를 길렀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관련된 모든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요. 우리가 조선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보물 창고와 같은 기록이라고 할 수 있어요.

조선왕조실록 대단하지요? 조선왕조실록이 있어 우리가 지금 역사를 더 풍부하게 알 수 있지요. 여러분도 사관처럼 학급에서 일어난 일을 실록으로 남겨 보면 어떨까요? 우리 모두의 소중한 추억이자 역사가 되지 않을까요?

[집필자] 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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