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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법칙을 찾은 조선의 과학기구

<세종대왕역사문화관(경기 여주시)>   

“전하! 드디어 간의가 완성되었습니다.”

“고생이 많았다. 이제부터 정확한 천체의 움직임을 측정할 수 있게 된 것인가?”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맞는 정확한 달력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세종은 이천, 장영실과 함께 중국의 간의를 연구해 우리 것으로 만들고는 무척 기뻤어요. 드디어 조선 하늘에 떠 있는 해, 달, 별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간의로 천체를 관측하는 것이 왜 중요했을까요? 세종은 과학기구를 개발하며 어떤 조선을 만들고 싶었을까요?

중국의 달력을 이용한 조선

“이달 초하룻날 사시(9시~11시)에 일식을 할 것입니다.”

천문관이 태종에게 일식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어요. 태종은 흰옷을 입고 신하들과 함께 월대에서 하늘의 변화를 기다렸지요. 그러나 오시(11시~13시)까지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일식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결국 일식 시간을 맞추지 못한 천문관은 옥에 갇혀 처벌을 받았지요.

조선 시대 천문을 잘못 예보한 천문관은 심한 경우 곤장을 맞기도 했고, 먼 곳으로 유배를 가기도 했어요. 일식 시간을 못 맞춘 천문관을 벌 줄 만큼 조선의 왕들은 왜 하늘의 변화에 관심이 많았을까요?

임금은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이었어요. 새로운 나라가 세워지거나 새 임금이 되면 하늘의 시간을 백성들에게 정확하게 알려주는 일은 매우 중요했어요. 그래야 때를 맞춰 씨를 뿌리고 추수를 할 수 있거든요.

매년 반복되는 일이었지만 계절 변화를 예측해서 농사지을 때를 알려주는 것은 하늘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있음을 백성에게 보여주는 것이었어요.

반면에 기상이변으로 가뭄이나 홍수가 일어나 큰 피해가 생기면, 백성들은 임금이 나라를 잘못 다스려서 벌어진 일이라 생각했어요. 특히 일식이나 월식과 같은 특이한 천문 현상이 생기면 임금은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자신의 통치에 대해 반성하는 마음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냈어요.

<일식을 준비하는 임금과 신하들>   

임금이 천문 현상에 관심을 많이 가질수록 천문관들의 역할은 더욱 커져 갔어요. 그런데 천문관들은 일식이나 월식을 목숨을 걸고 계산하는데 왜 자꾸 틀리는 일이 생길까요?

일식과 월식은 하늘에 떠있는 별들의 움직임을 매일 관찰하고 기록한 것을 바탕으로 만든 달력(역서, 책력)이 있어야 계산할 수 있었어요. 달력에는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시각, 해·달·별의 움직임, 월식과 일식, 절기 등을 날짜 순서에 따라 기록했어요.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중국에서 만든 달력을 구해 썼어요. 조선시대에도 달력을 얻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어요. 사신들은 매년 중국에 가서 황제를 만나고 새 달력을 얻어왔어요.

그런데 중국에서 만든 달력은 베이징에서 관찰하고 측정한 자료를 정리한 것이라 우리나라와는 맞지 않았어요. 조선의 천문관들은 중국 달력을 기준으로 하면서도 조선에 맞는 값으로 날짜를 다시 계산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정확하게 계산하려해도 조금씩 오차가 생겼어요. 심한 경우 중국의 달력에 기록된 일식이 조선에서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어요.

세종 시기에도 여러 차례의 일식과 월식이 있었어요. 세종은 신하들과 함께 소복을 입고 월대에 엎드려 해가 다시 빛나기를 빌었어요. 그런데 일식이 천문관의 예측과 달리 1각(15분)이 늦게 시작되었어요. 잘못 예보한 천문관은 곤장을 맞았지요.

세종은 더욱 정확한 예보를 원했어요. 농업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정확한 일 년의 절기와 시간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기준에 맞는 달력이 필요했어요.

세종은 여러 학자들과 함께 중국의 간의를 연구하여 해와 달, 별을 정확히 관측할 수 있는 조선의 간의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경복궁 경회루의 북쪽에 간의대를 만들었어요. 간의대에서는 매일매일 천문관들이 해와 달, 별의 움직임을 꼼꼼히 관측하고 기록했어요.

세종이 임금이 된지 26년이 지났을 때, 드디어 여러 해의 관측 결과를 이용해 천체의 위치를 계산하는 방법을 담은 조선의 달력 『칠정산』이 편찬되었어요. 칠정이란 해,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움직임을 기록한 책이에요. 책에 기록된 자료를 계산하여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식과 월식을 보다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때까지 자신의 하늘을 관측하여 일식과 월식을 정확하게 예보할 수 있었던 나라는 중국과 아라비아뿐이었어요. 세종과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자신의 하늘을 스스로 관측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어요. 하늘과 계절의 정확한 규칙과 질서를 백성들에게 알려주면서 세종은 조선을 더욱더 체계적인 유교 국가로 만들어 갔어요.

  

조선의 하늘을 관측하라, 간의와 규표

별의 위치를 측정하는 간의는 세종의 명령으로 이천과 장영실이 만들었어요. 장영실은 명에 있던 간의를 연구하기 위해 중국 베이징을 다녀오기도 했어요. 간의는 우리나라에 맞는 달력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는데,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야 했거든요.

<간의대와 간의, 규표 복원 모습>   
충북대학교 한국천문연구원

완성된 간의를 설치하기 위해 경복궁에는 간의대를 만들었어요. 간의대는 지금의 천문대와 같은 역할을 했지요. 간의대가 완성되자 천문관들은 매일 밤 간의대에 올라 별의 위치를 측정했어요. 낮에는 규표를 이용해 해의 높이를 측정했지요. 간의는 먼저 북극성을 일직선으로 바라보게 해 고정했어요. 별의 위치를 측정할 때는 간의에 붙어있는 여러 개의 원형 고리를 돌려 방향을 별과 맞췄어요. 그리고는 원형 고리에 새겨진 눈금을 읽고, 그 값을 기록했어요. 측정한 값을 비교하면 별이 1시간 전보다 좌우로 얼마나 움직였는지, 그리고 어제와 비교해 별이 위아래로 얼마나 변했는지를 알 수 있었어요.

<규표의 원리>   

간의대 옆에는 남북 방향으로 규표를 함께 만들었어요. 규표는 태양의 그림자를 재는 기구인데, 규석에 새겨진 눈금을 이용해 하루 중 그림자가 가장 짧을 때가 언제인지를 쟀어요. 해가 가장 높이 뜨고, 낮이 가장 긴 하지에는 그림자의 길이가 가장 짧았어요. 반면에 해가 가장 낮게 뜨고, 밤이 가장 긴 동지에는 그림자의 길이가 가장 길었어요. 그림자의 길이만 재어도 일 년의 시작과 끝을 정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측정한 1년을 똑같이 나누어 24절기로 구분할 수 있었어요.

세종과 학자들은 정밀하게 측정한 별의 위치와 해의 그림자 길이를 이용해 1년 365일, 12달 24절기, 1일 12시각, 1각(약15분)을 나누었어요. 이렇게 정해진 시간은 조선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자연의 질서 속에서 시간을 찾은 앙부일구

세종은 해와 별의 움직임을 측정해 정확한 시계를 만들고 이 시계의 보급에도 힘을 썼어요. 해의 움직임을 관측해 만든 것이 해시계에요. 지구는 하루에 한 바퀴씩 자전을 해요. 자전 때문에 해와 별은 360도 원운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해와 별이 15도만큼 이동한 것을 관측하면 24시각을 쓰는 지금의 1시각을 정할 수 있어요.

조선은 24시가 아니라 12시각을 사용했으니 30도만큼 이동한 값으로 1시각을 정했지요. 12시각을 나누는 기준은 하루 중 해가 가장 높게 떴을 때를 측정해 정했어요.

세종은 간의대 옆에 규표를 만들어 해가 가장 높이 떴을 때를 이전보다 더 정확하게 측정했어요. 또한 일 년을 구분하는 24절기도 정했어요.

<앙부일구의 시계선과 절기선>   
문화재청, 국사편찬위원회

세종은 이를 바탕으로 이전의 해시계보다 정확한 앙부일구를 만들게 했어요. ‘가마솥이 위로 열려 있는 모양의 해시계’란 뜻의 앙부일구는 가마솥 모양의 청동 그릇에 측정값을 눈금으로 새겨 만들었어요. 눈금에 그림자가 생기면 시각과 절기를 동시에 알 수 있어 시계인 동시에 달력의 역할도 한 것이에요. 각각의 시각에는 동물 모양의 12지신을 그려 넣어 글을 모르는 백성도 쉽게 시간을 알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죠.

세종은 앙부일구를 한양의 백성들이 가장 많이 다니던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하였어요. 앙부일구 주변으로는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앙부일구의 정확함과 편리함에 감탄을 하였죠.

<휴대용 앙부일구>   
국립중앙박물관

앙부일구는 세종 때에 처음 만들어진 이후 조선 시대 말까지 계속해서 만들어졌어요. 처음에는 궁궐과 여러 고을의 관아에 주로 설치했지만, 나중에는 집 마당에 설치하는 양반들도 생겨났어요. 옷에 넣고 다닐 수 있게 작게 만든 앙부일구도 있었죠. 앙부일구는 조선 시대 가장 인기 있는 시계였던 것이에요.

표준 시계 역할을 한 자격루

정확하게 시각을 알려주던 앙부일구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어요. 햇빛이 없는 흐린 날, 비가 오는 날, 그리고 밤에는 시각을 알 수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조선을 세운 이성계도 해시계가 아닌 이전부터 내려오던 물시계를 만들어 한양 도성의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리게 했어요. 물시계가 모든 시계의 기준 역할을 한 것이지요.

물을 같은 속도, 같은 양으로 흐르게 해 물의 양을 측정하면 물시계를 만들 수 있었어요. 하지만 물시계는 기계장치가 정밀해야 시각의 오차를 줄일 수 있었어요. 게다가 물시계를 지키는 사람이 실수를 해 시간을 알리지 않으면 도성 안의 백성들은 큰 혼란을 겪어야 했어요.

“나무 인형을 만들어 시간에 따라 스스로 알리게 하여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도록 하라.”

세종은 장영실에게 명하여 ‘자격루’를 만들게 했어요. 자격루란 ‘스스로 시간을 측정하여 알려주는 물시계’란 뜻을 갖고 있어요. 장영실은 일정하게 흐르는 물(1분 당 100ml)과 부력 장치, 쇠구슬, 나무인형, 종을 기계장치로 연결하여 물시계를 만들었어요.

장영실이 자동 물시계를 연구한지 꼭 10년 만에 완성한 자격루는 매우 정밀해 간의와 맞춰보면 조금도 틀리는 곳이 없었죠. 게다가 종소리가 울리면 나무인형이 시각이 쓰여 있는 패를 들고 나타나 스스로 시간을 알려주었어요. 스스로 시간을 알려주니 시계를 담당한 관리의 실수도 줄어들었죠.

<자격루의 작동 원리>   

완성된 자격루는 경회루 남쪽의 보루각에 설치되었어요. 보루각의 자격루에서 나무인형이 종을 울리면 종소리를 들은 경회루 남문의 관리가 북을 치고, 광화문을 담당한 사람도 함께 북을 쳐 종로에 소리를 전했어요. 종로에 있던 종루(보신각)에서는 북소리를 듣고 큰 종을 쳐서 도성의 모든 백성에게 시간을 알렸어요.

밤에는 북과 징까지 울려 자세한 시간을 알려 주었고 자격루가 알려주는 시간에 따라 도성문을 열고 닫았어요. 점차 자격루는 백성들에게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표준시계로서 자리를 잡아갔어요.

1각이라도 시간을 허투루 잴 수 없다! 일성정시의

자격루는 매우 정밀했지만 장치가 매우 복잡하고 이동이 불가능했어요. 제작비용도 많이 들었지요. 게다가 기계 장치가 고장이라도 나면 도성에 큰 소동이 날 수도 있었어요. 앙부일구는 밤에 사용할 수 없었고요. 세종은 낮이나 밤에 상관없이 간편하고 안전하게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시계를 고민했어요.

그래서 세종은 학자들과 함께 간의와 자격루, 앙부일구에 이어 이번에는 일성정시의를 만들었어요. 일성정시의는 낮 시간을 재는 해시계와 밤 시간을 재는 별시계의 원리를 이용해 만들었어요. 즉 해와 별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루에 1바퀴씩 도는 거리를 일정하게 나누어 시간을 정한 것이에요.

<일성정시의를 이용한 시간 측정의 원리>   

일성정시의가 만들어지면서 낮에는 해를, 밤에는 별의 움직임을 관측하여 온전한 하루의 시간을 정할 수 있었어요. 이렇게 일성정시의는 앙부일구와 자격루의 빈틈을 메꿨어요. 세종은 4개의 일성정시의를 만들어 1개는 궁에 설치하고, 나머지는 바퀴를 달아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시계를 지방에 보내 하루의 시간을 측정하도록 했어요. 이처럼 세종은 해, 달, 물을 이용하여 시계를 만들었어요. 비가 오나 밤이 되어도,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든지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되었어요.

역사 속 작은 이야기: 비의 양을 측정하라, 측우기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 농사는 생계의 근원이므로 임금의 일에서 제일 우선해야 한다.”

세종은 늘 농사를 중요시 했어요. 세종이 하늘을 관측하고, 정확한 달력과 시계를 만들고자 했던 이유도 농사와 관련이 많아요. 농사에서는 비의 양을 측정하는 일도 매우 중요했어요. 비의 양에 따라 한 해 농사의 수확량이 정해지기 때문이지요.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면 곡식 생산량이 줄어들어 백성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야만 했어요.

조선에 가뭄이 계속되던 어느 날이었어요. 세종의 맏아들 이향(문종)이 땅을 파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어요. 비가 오고 나서 땅이 젖은 정도를 알아보고 싶었지만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아바마마! 일정한 크기의 그릇과 자만 있으면 비의 양을 잴 수 있습니다.”

“비의 양을 잰다? 비의 양을 재서 무엇을 한단 말이냐?”

“비의 양을 잴 수 있으면 일 년 중 언제 비가 많이 오는지, 어느 지역에 비가 많이 오는지를 알아 미리 대비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세자의 말이 참말로 옳다.”

세종은 장영실을 불러 세자를 돕게 하였어요. 여러 번의 도전 끝에 ‘빗물을 재는 그릇’이란 뜻의 측우기가 만들어졌어요.

측우기를 만들 때 제일 어려운 일은 그릇의 크기를 정하는 것이에요. 그릇의 입구가 너무 크면 적은 양의 비가 왔을 때 그 양을 측정할 수가 없고, 입구가 너무 좁으면 바람이 불 때 비가 그릇 안으로 덜 들어와 정확한 강우량을 측정할 수 없었어요. 여러 번의 실험 끝에 측우기의 입구 크기는 14cm로 만들어졌어요. 이것은 지금의 세계표준규격과 유사한 크기인데, 지금 사용해도 될 만큼 매우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에요.

받침대는 빗물이 땅에 부딪쳐 다시 측우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높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주척이라는 눈금자로 측우기에 모인 비의 양을 쟀어요. 주척은 2mm 정도의 적은 빗물의 양도 측정할 수 있게 정밀하게 만들었어요.

측우기가 완성되자 세종은 명을 내려 전국 관아에 이를 설치하였어요. 그리고 지방 수령들에게 비가 온 날과 시각, 비의 양을 측정하여 보고하게 하였죠. 수령들이 보고한 자료를 모아 전국의 연중 강우량 자료를 만들었어요. 이러한 자료 덕분에 이전보다 더 체계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어요.

세종과 여러 학자들은 조선의 천문, 기상, 기후 등 여러 분야를 연구하였어요. 그리고 다양한 과학 기구를 만들어 백성들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고자 했어요. 세종과 학자들이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훈민정음을 만들었듯이, 여러 과학 기구 속에도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어요.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더욱 발전된 과학 원리와 도구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 속에서 모든 사람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찾아보아요.

<과학적 원리를 탐구한 측우기>   

<측우기로 강우량을 재는 세종과 세자(세종대왕역사문화관)>   

[집필자] 신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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