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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독립을 외친 국채 보상 운동 유적

<국채보상운동기념관(대구 중구)>   

“내가 비록 도적질을 하고 있으나 나라를 구할 의연금을 보태고자 하오. 꼭 전해 주시오.”

“당신의 뜻을 세상에 전하리다. 이름은 무엇이오?”

“그저 서울에 도착하시거든 충주의 도적 떼가 10원의 의연금을 냈다고 신문에 실어주시오.”

국채는 나라에서 진 빚을 말해요. 일본에게 빌린 국채를 갚아 나라를 구하고자 도적 떼도 의연금을 냈어요. 나랏빚을 갚기 위해 많은 국민이 참여한 이 운동을 국채 보상 운동이라고 해요. 국채 보상 운동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이 운동은 성공했을까요?

국채 보상 운동이 대구에서 시작되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영국, 미국과 비밀 조약을 맺었어요. 그 내용은 일본이 대한 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에 미국과 영국이 동의한다는 것이었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 제국에 대한 청과 서양 강대국의 간섭을 모두 차단했어요. 그리고 노골적으로 우리나라의 국권을 빼앗기 시작했어요. 특히 대한 제국의 경제력을 빼앗기 위해 국채를 도입하도록 했어요.

청일 전쟁 이후 도입되기 시작한 국채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긴 후 더욱 늘어났어요. 일본은 대한 제국에 여러 편리한 시설을 만든다는 핑계로 많은 돈을 빌려주었지만 사실은 항구나 철도 등 자신들에게 필요한 통치 시설을 만들기 위해서였죠.

1907년까지 일본의 강요로 들어온 돈은 1,300만원으로 당시 대한 제국에서 사용하던 1년 예산에 맞먹는 큰돈이었어요. 지금으로 계산하면 3,300억원 상당의 나랏빚이었어요. 일본에게 크게 빚을 지면서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길이 점점 줄어들었어요.

“국채 1,300만 원을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하고 말 것이오!”

“맞소이다. 일본에게 진 빚을 못 갚는다면 삼천리 강토는 내 나라 내 민족의 소유가 못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정부는 국채를 갚을 능력이 없으니 어찌한단 말입니까?”

“우리 2천만 국민이 3개월 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고 그 담뱃값을 모아 매달 20전씩 거둔다면 국채를 모두 갚을 수 있을 겁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우리의 고민을 신문에 실어 널리 알립시다.”

대구 광문사라는 회사의 사장 김광제와 부사장 서상돈은 여러 사람을 모아 국채 문제를 논의했어요. 이들은 모든 국민이 담뱃값을 아껴 국채를 갚는 운동을 벌일 것을 제안하였어요. 그리고 이를 대한매일신보에 실어 모든 국민에게 널리 알렸어요.

<국채 보상 운동을 의논하는 김광제와 서상돈>   

대구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이에 호응하는 많은 단체가 만들어져 운동에 동참하였어요. 대한매일신보로 시작해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 여러 신문사들도 국채 보상 운동 기사를 신문에 실어 적극적으로 홍보하였어요.

사람들은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모아 의연금을 냈어요. 부녀자들은 비녀, 반지와 같은 패물을 의연금으로 내놓았죠. 학생뿐만 아니라 기생, 백정, 인력거꾼, 심지어는 거지와 도적도 이 운동에 참여하였어요. 소식은 널리 퍼져 해외 유학생들과 동포들도 해외에서 의연금을 모아 보내왔어요.

<대한매일신보 의연금 영수증>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1907년에 시작된 운동은 약 3개월 동안 4만여 명의 국민이 참여했어요. 의연금도 많이 모이면서 조만간 국채를 모두 갚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점점 커져 갔어요. 국채 보상 운동이 활기를 띄자 일본은 이를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어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운동을 방해하려 했어요. 일본은 운동의 중심에 서서 이를 적극적으로 이끌던 대한매일신보를 먼저 공격했어요.

“베델과 양기탁이 국채 보상금 3만원을 마음대로 사용하였다.”

일본은 거짓 정보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거짓 정보를 이용해 대한매일신보의 사장 베델과 국채 보상 운동에서 큰 역할을 한 양기탁을 구속했어요. 그리고 재판을 이용해 베델을 국외로 추방했어요. 양기탁은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억울하게도 의연금을 개인적으로 사용했다는 의심은 사람들 속에 남아 있었어요. 결국 국채 보상 운동은 계속되는 일본의 집요한 방해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어요.

비록 일본의 방해로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나라빚을 갚을 순 없었지만, 경제 독립을 통해 국권을 지키려했던 국민들의 뜻은 사라지지 않고 3·1 운동과 물산 장려 운동으로 다시 이어졌어요.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적 기부운동, 언론캠페인운동, 근대여성운동이라는 점이 높이 평가되어 국채 보상 운동 기록물이 201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어요.

  

국채 보상 운동이 대구에서 시작되다

광문사는 동서양서적을 번역하고, 경상북도 지역 의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잡지를 펴내려고 만든 출판사예요. 문화를 통해 국민들의 힘을 기르려 한 광문사는 당시 대한매일신보 대구 지사의 역할도 담당했어요.

국채 보상 운동은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회 이름을 대동광문회로 바꾸기 위한 회의에서 시작되었어요. 국채 보상 운동을 제안한 서상돈이 먼저 8백 원을 내놓았고, 회원들도 의연금을 내놓아 2천여 원이 모였어요. 국채보상의 가능성을 확인한 대동광문회는 이 운동을 전국으로 퍼트리기 위해 ‘국채 보상 운동 취지서’를 써서 발표하였어요.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된 광문사터>   

취지서에는 국민들이 충과 의를 지키면 나라가 살고, 그렇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강조했어요. 영국에 빚을 졌다가 나라를 잃은 이집트를 비롯해 베트남, 폴란드의 사례도 들었지요. 그리고 국민들이 단결하여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모아 국채를 갚아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자는 뜻을 담았어요.

<『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27일자 국채보상기성회 취지서>   
독립기념관

국채 보상 운동에 참여한 다양한 국민들

취지서를 대한매일신보에 실어 세상에 알린 대동광문회는 담배를 끊자는 의미의 단연회를 만들어 모금 운동에 나섰어요. 그리고 대구 북후정(지금의 대구 시민 회관 자리에 있던 정자)에 사람들을 모아 군민 대회를 열고 자신들의 뜻을 알렸어요.

군민 대회와 함께 시장에서 장사하던 짚신장수, 콩나물장수, 밥장수, 떡장수 등 많은 상인들이 앞 다투어 의연금을 냈어요. 바느질로 근근이 생활하던 아낙네도 반지를 팔아 그 돈으로 의연금을 냈어요.

<군민대회가 개최된 북후정 자리에 세운 국채 보상 운동 기념비>   

의연금을 낸 가난한 국민들의 의로운 이야기가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한 신문과 잡지에 매일 매일 실렸어요. 나무와 짚신을 팔아 3원을 낸 어린 나무꾼, 40전을 낸 백정, 발로 뛰어 번 3원 4전을 낸 인력거꾼, 어른들로부터 받은 세뱃돈을 모아 낸 아이들, 심부름 값을 모아 의연금을 낸 고아원의 아이들. 가난하지만 온 정성을 다해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작은 노력들이 신문에 실려 전국으로 퍼져 나갔어요.

가난한 국민들의 의로운 뜻에 고종 황제도 담배를 끊고 운동에 동참하였어요. 관리와 군인, 선비, 종교인 등 너나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국채 보상 운동에 함께 했어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데 남녀노소, 빈부, 종교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국채 보상 운동의 중심에 선 여성

<여성 중심의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된 진골목>   

진골목은 ‘긴 골목’을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예요. 개항기에는 진골목 주변으로 부자들이 사는 동네로 유명했어요.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되자마자 진골목 주변에 살던 부녀자들은 패물폐지부인회를 만들어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어요. 패물폐지부인회를 시작으로 여성을 중심으로 한 30여 개의 국채 보상 운동단체가 전국에서 만들어졌어요.

“우리나라 사람 2천만 중 여자가 1천만입니다.”

“1천만 중에 반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 반은 넘을 것이오.”

“그렇소. 우리 모두가 반지를 팔아 의연금으로 낸다면 많은 국채를 직접 여인의 손으로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녀자들은 먼저 갖고 있던 비녀와 반지 등 패물을 의연금으로 기부했어요. 그것도 부족해 장사를 해서 번 돈이나 바느질을 해서 모은 돈, 식사량을 반으로 줄여 모은 돈으로 의연금을 마련했어요. 양반집 부녀자는 물론 신여성, 상인, 기생, 삯바느질 여성 등 지위와 상관없이 많은 여성이 적극적으로 참여했어요.

<국채보상소에 의연금을 내는 국민들>   

적극적으로 참여한 여성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대구 관기(관청에 속한 기생) 출신의 ‘앵무’(본명 염농산)였어요. 앵무는 의연금 100원을 내며 말했어요.

“의연금을 내는 것은 국민의 의무요. 내가 여자로서 감히 남자보다 더 낼 수가 없으니 누구든 몇 천원을 의연하면 내가 죽기를 각오하고 따라 내겠소.”

당시 앵무가 낸 100원은 매우 큰돈이었어요. 금액도 금액이지만 여성의 사회생활이 금기시되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남자들에게 더 많은 의연금을 내라고 당차게 주장하는 앵무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어요. 앵무에게 자극을 받은 사람들은 앞을 다퉈 의연금을 냈어요. 앵무의 소식을 전해들은 진주와 평양의 관기들도 단체를 만들어 운동에 함께 참여하였어요.

국채 보상 운동은 여성들이 자신의 뜻으로 단체를 만들어 활동한 최초의 여성운동이라 평가를 받고 있어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당시에 여성이 운동을 이끌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사건이었어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는 여성들의 의로운 마음은 일제 강점기에 다양하게 펼쳐진 여성 독립운동의 토대가 되었어요.

역사 속 작은 이야기: 경제독립을 위한 또 다른 노력, 물산 장려 운동

1910년 국권을 빼앗긴 후 일제의 많은 공산품이 수입되어 우리의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아 갔어요. 일제 물건이 많이 팔릴수록 우리 민족 기업은 망하거나 힘없이 근근이 버틸 수밖에 없었죠.

“우리가 입은 옷, 먹는 음식, 사용하는 물건 중에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맞소! 우리 집과 땅과 몸뚱이까지 팔아 우리가 쓰는 물건을 일본에게서 받아쓰니 한스러울 뿐입니다.”

“우리가 사용할 것을 스스로 만들어 쓰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1919년 대대적으로 전개된 3·1 운동이 결국 실패로 끝나면서 민족 지도자들은 우리 민족의 힘을 키울 필요성을 더욱 크게 느꼈어요. 그중 경제 자립을 위해 일제상품 불매운동과 우리상품 애용운동을 벌였는데, 그것이 바로 물산 장려 운동이에요.

<물산 장려 운동 광고>   
한국교육학술정보원

물산 장려 운동은 1920년대 초에 조만식을 중심으로 평양에서 시작되었어요. 이들은 우리 상품을 많이 사고 근검절약을 하면 민족 산업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조선물산장려회를 만들어 널리 알렸어요.

평양에서 시작된 물산 장려 운동은 종교계, 교육계 지식인들은 물론 상인, 기업인들도 크게 환영하였어요. 국채 보상 운동 때와 같이 전국 각지에 조선물산장려회 지부를 만들고, 신문을 통해 국민들에게 널리 홍보하였어요. 강연회나 거리행진을 통해 홍보하기도 했어요.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

조선물산장려회는 무명으로 만든 옷을 입을 것과 외국 상품의 사용을 줄이고 국산품을 사용할 것을 국민들에게 요청하였어요. 국민들의 반응은 뜨거웠어요. 국채 보상 운동 때와 같이 너도나도 국산품을 쓰려 노력했어요.

그러나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국산품을 쓰려고 하자 문제가 생겼어요. 우리 민족 기업들의 기술이나 생산 능력이 부족해 국민이 원하는 만큼의 물건을 생산하지 못한 것이죠. 물건의 양이 부족해지자 물가가 크게 올랐어요. 일제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자급자족을 통한 경제독립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실제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 뜻만은 높이 평가할 수 있겠지요.

1997년 IMF 외환 위기처럼 치열하게 경쟁하는 세계 속에서 경제 위기는 또 일어날 수 있어요. 경제 문제로 나라의 독립이 좌지우지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역사 속 조상들의 모습 속에서 그 답을 찾아보아요.

[집필자] 신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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