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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운동의 중심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

<상하이 청사 입구>   
독립기념관

“윤봉길 의거에 일본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상하이를 탈출하라고 프랑스 당국에서도 알려왔습니다.”

“이제 우리 임시 정부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3·1 운동 이후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이끌고 있었어요. 하지만 윤봉길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군들을 향해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펼치면서 더 이상 상하이에 머물 수 없었어요. 그런데 왜 우리 정부가 중국에 세워졌던 것일까요?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어디로 이동했을까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세워지다

1910년 일제는 우리의 국권을 빼앗고 대한 제국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어버렸지요.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국내외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벌였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었어요.

그러던 중 3·1 운동이 일어났어요. 전국 방방곡곡의 온 국민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 운동에 일제는 깜짝 놀랐어요. 사람들은 만세 운동을 벌이며 독립운동을 이끌어 갈 정부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 결과 한성(서울)과 연해주, 상하이 등에 정부가 들어섰어요. 이후 세 곳에 흩어져 있는 정부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지요.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1919년 9월에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합쳐졌어요. 당시 임시 정부가 자리 잡은 곳은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였지요. 조계지는 프랑스 경찰이 치안을 담당하는 지역으로 일본 경찰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지역이었어요. 일본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을 하기 유리한 곳이었어요.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나라 이름을 대한 제국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대한’, 국민의 나라라는 뜻에서 ‘민국’ 이라고 했어요. 행정부에 해당하는 임시 정부, 국회 역할을 하는 임시 의정원, 그리고 법원이 있었어요. 지금과 똑같이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로 구성된 정부였지요. 헌법(대한민국 임시 헌장)도 만들었어요. 임시 헌장 제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한다’는 내용이었어요.

지금과 같은 내용이라고요? 그렇답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대한민국의 출발이었지요. 그리고 제2조에서는 임시 의정원의 결의에 의하면 임시 정부가 통치한다”고 규정하였어요. 이것은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의회의 역할과 근대적 입법·행정기관의 분권을 분명하게 밝힌 것입니다.

하지만 1932년 이봉창 의거 이후 일본이 상하이를 침략하였고, 이후 윤봉길 의거로 일본이 강하게 압박하는 상황 속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더 이상 상하이에 머물 수 없었어요. 어쩔 수 없이 탈출해 항저우를 거쳐 친장으로 이동했어요.

1937년 일본이 중일 전쟁을 일으키고, 중국 본토를 적극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임시 정부는 이후 임시 정부를 돕기로 약속한 국민당 정부를 따라 창사, 광저우 등을 거쳐 충칭으로 옮겨갔어요. 이 과정은 정말 힘든 고난의 연속이었어요. 이 과정은 정말 힘든 고난의 연속이었어요. 임시 정부는 머물렀던 곳에 따라 상해 시기(1919~1932), 이동 시기(1932~1940), 충칭 시기(1940~1945)로 구분해요.

지금부터 머나먼 중국 땅에서 여러 번 청사를 옮기며, 항일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대해 살펴보아요. 또 27년간의 고된 이동 생활 속에서 임시 정부 사람들이 무엇을 꿈꾸었는지도 알아보아요.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

3·1 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로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었지요. 그들은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를 마련했어요. 그리고 그해 9월에는 국내외 있던 여러 임시 정부들이 하나로 합쳐져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출범했지요.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상하이에 13년 동안 머물며 청사도 여러 번 옮겼어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임시 의정원 신년 축하 기념사진>   
독립기념관

지금 남아 있는 상하이 청사는 그곳 중 하나이지요. 그런데 상하이 청사에 직접 가보면 ‘정말 한 국가의 정부가 이런 곳에 있었다고?’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몰라요. 낡은 주택가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붉은 색 벽돌 건물이거든요. 머나먼 중국 땅에 와 정부를 만들고 독립 투쟁을 펼쳐나갔던 독립운동가들의 어려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요.

그나마 한국과 중국 정부의 노력으로 상하이 임시 정부 건물에 대한 공동 조사가 이루어졌어요. 그 결과 1993년 일제 강점기 당시 모습 그대로 복원하기 시작했지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상하이 청사>   
독립기념관

청사를 마련한 임시 정부는 나라의 독립을 찾고, 국민이 주인인 국가를 세우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어요. 이승만이 대통령, 이동휘가 국무총리가 되어 임시 정부를 이끌어갔어요. 국내외 연락을 위해 비밀 행정 조직인 연통제를 실시했어요. 교통국과 통신국도 두어 국내는 몰론 다양한 지역의 독립운동가들과 연락을 취했지요.

독립신문도 발간했어요. 그 신문이 미국 하와이까지 전해졌고, 국내에도 몰래 전해져 임시 정부의 활동을 알 수 있도록 했지요.

이렇게 다양한 활동을 펼치던 임시 정부에 위기가 닥쳤어요.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에게 미국이나 국제 연맹이 우리나라를 통치해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보낸 사실이 알려졌지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외교 활동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무장 투쟁을 주장했던 신채호 등 독립운동가들이 국민 대표 회의 소집을 요구했어요.

1923년에 국민 대표 회의가 열렸어요. 임시 정부를 해체해야 한다는 사람들과 계속 임시 정부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람들로 나뉘어져 대립했어요.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등 주요 인물들이 모두 임시 정부를 떠났어요. 재정 또한 넉넉지 않아 어려움은 더 했지요. 천여 명 가까이 되었던 상하이의 독립운동가들이 떠나가고, 이제는 겨우 수십 명만 남는 힘겨운 상황이 되었지요.

이러한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위해 김구는 1931년 비밀리에 한인 애국단을 만들었어요. 1932년에는 한인 애국단 소속인 이봉창이 일본 도쿄에서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윤봉길이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지는 독립 투쟁을 펼쳐 큰 성과를 이루어냈어요. 윤봉길이 의거를 일으키자 일본군은 임시 정부 청사에까지 들이닥치는 등 김구를 잡기 위해 눈에 불을 켰어요. 이후 임시 정부를 지키기 위해 상하이를 떠나 고난의 이동 생활을 시작했어요.

두 번째 임시 정부 청사, 항저우 청사

임시 정부와 김구는 함께 움직일 수 없었어요. 그러면 모두가 위험해지는 상황이니까요. 김구는 자싱의 작은 마을에 몸을 숨기고, 임시 정부는 항저우로 옮겨 갔지요. 일본군을 피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었어요. 일본군의 폭격 때문에 지하에 숨어 지내기도 하고, 먹을 것이 없어 굶는 날도 많았지요. 그런 중에도 독립을 향한 열망은 변함이 없었어요.

임시 정부의 두 번째 청사가 항저우에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아요. 그래서 항저우 거리를 다니다 임시 정부 청사를 그냥 지나칠 가능성이 높아요. 임시 정부 사람들은 1932년부터 1935년까지 항저우 청사에 머물며 독립운동을 펼쳐나갔지요. 2층으로 된 청사를 돌아보면, 힘든 조건 속에 나라를 지키고, 독립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저절로 알게 될 거에요. 일제의 공격에 항저우에서의 생활도 오래 가지 못하고 친장으로 이동해야 했지요.

<대한민국 임시 정부 항저우 청사>   

<대한민국 임시 정부 항저우 청사 내부>   
독립기념관

항일 투쟁의 마지막 근거지, 충칭 청사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중국 대륙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대장정을 계속해야 했어요. 임시 정부가 자리 잡은 곳에 일제의 폭격이 이어졌지요. 결국 몇 개월 만에 짐을 싸 이동하는 생활이 계속되었어요.

1940년, 마침내 중국 국민당 도움으로 충칭에 도착해 청사를 마련했어요. 충칭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임시 수도가 마련된 곳이었어요. 충칭 청사는 1940년부터 1945년 11월까지 사용되었던 곳이에요. 이 시기를 충칭 시기라고 하지요. 충칭 청사는 항일 독립 투쟁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곳이지요.

이 시기 임시 정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합류하여 대일전쟁에 힘을 보탰어요. 충칭시기 임시 정부는 헌법도 개정하고, 건국의 방향을 보여주는 ‘건국 강령’도 제정하는 등 눈부신 발전을 했어요.

언덕 위 비좁은 골목 계단 옆에 위치한 청사를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울컥하는 마음이 들기도 해요. 충칭 청사는 상하이나 항저우 청사와 달리 제법 규모가 커요. 청사로 사용된 건물이 몇 동이 있는데, 비교적 잘 복원되고 보존된 편이에요.

충칭에 청사를 마련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김구 주석을 중심으로 일제에 적극적으로 맞섰어요. 1940년 9월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대인 한국광복군도 만들었어요. 독립 전쟁을 벌이기 위한 준비였지요.

<충칭 연화지 청사>   

<김구 주석 사무실과 국무회의 회의실 모습>   
독립기념관

임시 정부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을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일제에 선전 포고를 했어요. 1943년에는 영국군과 인도, 미얀마 전선에서 일제에 맞서 싸웠어요. 미국전략정보국(OSS)과 함께 국내에 침투할 작전도 준비했답니다. 그러던 중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면서 우리는 마침내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어요.

사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은 임시 정부 사람들에게는 아쉬운 일이었어요. 당당하게 전쟁을 해 승리를 거두고 일본의 항복을 받아 낼 기회를 잃어버렸으니 말이에요. 그래서일까요? 임시 정부 사람들이 국내로 돌아오는 것도, 임시 정부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돌아와야 했답니다. 통합된 정부가 아니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우받지 못했던 거예요.

1945년 11월 3일, 고국으로 돌아오기 직전 임시 정부 사람들이 찍은 사진을 본적이 있나요? 청사 가운데 계단에 서서 찍은 사진 말이에요. 고국으로 돌아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그들의 바람이 느껴지지 않나요?

<임시 정부 요인 환국 기념 사진>   
백범기념관

역사 속 작은 이야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지킴이, 정정화 여사

총을 들고 일본군과 맞서거나, 앞장 서 만세 운동을 벌이는 것만이 독립운동일까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졌어요. 총을 드는 사람,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사람, 그리고 독립운동을 벌인 사람들을 말없이 도운 사람도 있었지요.

정성을 다해 독립운동을 벌인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가 있어요. 바로 정정화예요. 우리는 그녀를 임시 정부의 지킴이라고 부르지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사람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임시 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아 했거든요.

그녀는 1920년 남편 김의한과 시아버지 김가진을 따라 상하이로 갔어요. 그러면서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되지요. 여러 차례 압록강을 건너 몰래 국내로 숨어 들어와 독립운동자금을 모아오는 임시 정부의 밀사 역할을 하기도 했어요.

임시 정부 안에서 생각이 달라 세력들이 나뉘고, 임시 정부가 겨우 이름만 있던 시기에도 그녀는 큰 힘이 되었어요. 고단한 몸으로 찾아온 임시 정부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을 해 주며 그들이 버틸 힘을 주었지요.

임시 정부 사람들 중 그가 해준 밥을 먹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해요. 이동 생활에 지친 김구 선생이 찾아와도 늘 아무 말 없이 따뜻한 밥을 지어 주었어요. 이동녕 선생의 마지막 가는 길을 옆에서 지킨 사람도 바로 정정화였지요. 국내외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도록 이끌어 내기도 했어요.

그녀가 없었다면 임시 정부 사람들은 오랜 기간의 어려움을 견디기 힘들었을 거예요. 27년간 임시 정부 사람들의 하루하루를 책임졌던 정정화는 진정한 임시 정부의 지킴이라고 할 수 있지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를 돌아보며 임시 정부 사람들이 꿈꾸었던 세상에 대해 알게 되었나요? 그들이 머나먼 중국 땅에 27년간의 고된 이동 생활을 하며 이루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도 짐작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것은 바로 대한의 독립과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답니다.

<정정화와 그의 남편 김의한, 아들 자동>   
독립기념관

[집필자] 황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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