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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서대문 독립 공원

<서대문 형무소(서울 서대문구)>   

“여러분! 오늘이 바로 3·1 운동이 일어난 지 1년째 되는 날입니다. 우리가 비록 감옥에 갇혀 있지만 다 같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쳐 우리의 의지를 보여줍시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서울의 서대문구 현저동에 가면 서대문 독립 공원이 있어요. 이 공원에는 국민의 성금을 모아 독립 의지를 나타내기 위해 건립한 독립문도 있어요. 그리고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일제에 체포된 수많은 사람들이 갇혔던 옛 서대문 형무소도 있지요. 이곳 서대문 독립 공원에서는 어떤 역사를 만날 수 있을까요?

경성 감옥에서 서대문 독립 공원까지

서대문 형무소는 1908년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만들어졌어요. 당시에는 경성 감옥으로 불렸는데, 특히 일제 강점기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문을 받거나 감옥살이를 한 악명 높은 곳이었지요.

일제 강점기에 이곳은 서대문 감옥으로 불리다가 서대문 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어요. 광복 이후에는 서울 구치소가 되었다가 1987년에 서울 구치소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빈 곳이 되었어요. 그러나 이듬해 역사적 가치를 인정 받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지요. 이후 1992년 8월 광복절 제47주년을 맞아 ‘서대문 독립 공원’으로 문을 열었어요. 그리고 1998년 11월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으로 새롭게 단장하여, 학생과 시민들의 역사 학습 장소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어요.

“서대문 독립 공원에 가서 제일 먼저 살펴볼 곳이 어디일까요?”

“그곳에 가면 꼭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가봐야 해요.”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는 역사 전시관, 제 9~13 옥사, 추모비, 사형장, 지하 감옥 등이 있어요. 옥사는 1908년 설치 당시 약 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해요. 일제 강점기에 전국 8개 감옥이 수용할 수 있는 총인원이 300여 명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서대문 형무소가 정말 엄청 큰 규모였다고 할 수 있죠.

게다가 1919년 3·1 운동으로 수감자가 급격하게 늘어난 것을 계기로, 1923년까지 대대적인 증축을 통해 2,500명 수용 규모로 확대되었어요. 다른 지역의 감옥에 비해 이곳이 왜 이렇게 컸던 것일까요?

그만큼 서울 지역에서 독립운동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했기 때문이지요. 또한 지방에서 잡힌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주요 인물들이 이곳으로 보내지기도 했어요. 충청남도 천안에서 만세 운동을 펼치다 체포된 유관순 열사도 이곳 서대문 형무소의 지하 감옥에 갇혔어요.

서대문 독립 공원 안에는 감옥 외에도 순국 선열 추념탑이 있어요. 추념탑의 왼쪽에는 의병들이 일본에 맞서 무장 투쟁을 하던 모습, 유관순 열사의 만세 운동 모습 등이 새겨져 있어요. 그리고 추념탑의 오른쪽에는 우리의 국권을 빼앗기 위해 앞장섰던 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의 모습과 독립군의 승리 중에서 가장 큰 승리에 빛나는 청산리 대첩 등의 모습 등이 새겨져 있어요.

이처럼 서대문 독립 공원을 답사하다 보면 어려운 환경에서도 독립운동을 펼친 분들의 소중한 발자취를 느낄 수 있고, 또 나라 사랑의 의미를 다시 새겨볼 수 있어요.

  

자주 독립의 상징, 독립문과 독립관

서대문 독립 공원 입구에는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과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진 독립문이 세워져 있어요. 이 건물은 독립 협회라는 단체와 깊은 관련이 있어요. 1896년에 서재필은 개화 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독립 협회를 만들었어요. 개화 사상이란 외국의 선진 문물을 들여와 우리나라를 이전보다 더 발달된 근대 국가로 만들자는 생각을 말하지요.

<독립문>   

독립 협회는 우리나라가 강대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임을 널리 알리기 위해 독립문을 세우고자 했어요. 그래서 많은 국민들의 지지 속에 독립문 세우는 데 필요한 돈을 모으는 운동을 펼쳤어요. 이러한 독립 협회의 뜻에 공감한 각계각층의 많은 사람들이 성금을 냈어요.

당시 고종 임금도 독립문을 세우는 데 성금을 보탰지요. 당당한 독립 국가로 자리매김하겠다는 바람을 담아 1896년 시작된 독립문 공사는 1898년에 마무리되었어요. 이때부터 독립문은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죠.

그런데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와 독립문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독립문은 원래 영은문이라는 문이 있던 장소 근처에 세워졌어요. 영은문은 조선 시대에 큰 나라로 섬기던 청의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었어요. 당시 조선이 청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문이었지요. 따라서 영은문을 허물고 그 근처에 독립문을 세웠다는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어요.

지금도 독립문 앞에는 영은문으로 사용된 큰 돌 두 개가 세워져 있어요.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고 자주 독립 국가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또한 독립 협회는 청의 사신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어주던 모화관이란 건물도 독립관으로 이름을 바꾸었어요.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해주는 아래 사진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지요.

<복원된 현재의 독립관 건물>   

독립 협회는 독립관에서 정기적으로 토론회를 열어 강대국들의 횡포를 비판하고 국권을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논의했어요. 당시 러시아는 우리나라에 석탄 저장소를 설치하겠다며 땅을 빌려달라고 요구하였어요. 또한 좋은 나무들을 베어가는 등 무리한 요구를 했어요.

이후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빼앗은 뒤 독립관을 강제로 없애버렸어요. 그러나 우리 민족이 나라를 다시 찾은 뒤에는 옛 독립관 건물을 다시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마침내 1997년에 현재의 목조 건물로 복원되었답니다.

독립의지의 상징, 순국 선열 추념탑

<순국 선열 추념탑>   

순국 선열 추념탑은 국내 또는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돌아가신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92년 광복절에 세워졌어요. 이 탑의 중앙에는 높이 22.3m의 대형 태극기 조각상이 세워져 있어요. 이것은 전국 각지에서 솟구친 우리 민족의 드높은 독립의지와 기상을 상징하지요.

그리고 탑의 좌우에는 40m 길이로 독립운동가들 모습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어요. 좌측에는 일제에 맞서 싸운 의병, 윤봉길과 이봉창 의사의 모습, 독립운동가들이 처형되는 모습, 유관순 열사가 만세 운동을 하는 모습 등이 새겨져 있어요. 또한 우측에는 3·1 만세 운동,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모습, 청산리 대첩의 모습 등이 새겨져 있어요.

3·1 운동을 기억하게 하는 3·1 독립 선언 기념탑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손병희 등 민족 대표들은 서울 종로에 있는 태화관에 모였어요. 이들은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 만세를 삼창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전개된 3·1 운동의 불을 지폈지요.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 3·1 운동은 비록 일제의 가혹한 진압으로 실패하였지만 우리 민족의 강인한 독립 의지를 널리 알렸어요. 또한 이후 전개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지요.

3·1 독립 선언 기념탑은 이러한 3·1 운동의 숭고한 자주 독립 정신을 기리는 기념물이에요. 1963년 광복절에 국민의 성금을 모아 3·1운동의 현장이었던 탑골공원에 세워졌어요. 그러나 1979년에 탑골공원을 정비하면서 방치되던 것을 1992년에 서대문 독립 공원으로 옮겨 세워졌지요. 4.2m 높이의 탑 뒤에는 3·1 독립 선언문과 만세 시위를 주도한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답니다.

<3·1 독립 선언 기념탑>   

역사 속 작은 이야기: 옛 서대문 형무소에서 벌어진 갖가지 고문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의 지하로 내려가면 예전에 있던 고문실을 재현해 놓은 곳이 있어요. 독립운동을 펼쳤던 애국지사와 광복 이후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사람들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후 형무소 안에서 조사를 받았어요.

오늘날에는 경찰과 검찰에서 조사를 하고, 재판을 통해 형이 확정되면 교도소에 수감되어 형량대로 감옥살이 하는 것이 원칙이지요. 그러나 일제 강점기나 독재 정권 시절에는 형무소에 아예 조사실을 설치해 조사, 협박, 고문까지 자행했어요.

특히 일제의 고문은 상식과 상상을 초월했다고 해요. 당시 기록에는 ‘고문을 받은 독립운동가들은 신체가 부러지고 찢기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고, 허파에 물이 차는 흉막염, 머리가 아프고 일부 기억을 잃어버리는 뇌진탕이 걸리는 등 갖은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라고 씌어 있었어요.

또한 서대문 형무소에서 벌어졌던 물고문, 인두고문, 주리 틀기 고문, 벽관 고문(옴짝달싹 못하게 좁은 직육면체 나무 상자에 사람을 넣어 세워두는 고문) 등은 무어라 비판하기조차 끔찍한 비인간적 행위였지요.

더욱 기가 막힌 일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 경찰 하급 관리로 활동했던 친일파 한국인 경찰들 대부분이 광복된 이후에도 대한민국 경찰이 되었다는 사실이지요. 그들은 일본 경찰로부터 배운 고문 기술을 광복 이후에도 독립운동가 출신의 정치인, 사회운동가, 민주화운동가들을 대상으로 그대로, 아니, 더 강화된 기술로 괴롭혔어요.

이처럼 옛 서대문 형무소 건물은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민주화 운동을 펼치다 잡혀서 감옥에서 옥살이를 했던 많은 사람들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에요. 3·1절, 광복절 등 뜻깊은 날은 물론이고 휴일날에 시간을 내어 서대문 독립 공원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서대문 독립 공원을 둘러보며 그곳에서 고문받고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독립의 의지와 민주화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분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 보아요. 또 그들이 간절히 이루고자 했던 나라의 모습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해요.

[집필자] 방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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