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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제국의 역사를 간직한 정동

<덕수궁(서울 종로구)>   

“그 소식 들었나? 고종께서 드디어 러시아 공사관에서 나와 궁궐로 돌아오신다고 하네.”

“잘된 일이야. 그런데 경복궁으로 가시지 않는다고 하던데.”

“맞아! 러시아 공사관 옆에 있는 궁궐로 가신다고 하더군.”

고종이 돌아온 궁궐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이에요. 이어 고종은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하고 나라 이름을 대한 제국으로 바꾸었어요(1897). 대한 제국 시기 덕수궁과 그 주변인 정동은 대한 제국의 정치 중심지가 되어요. 정동이 이처럼 대한 제국의 정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서양 사람들이 많이 살던 곳 정동

고종은 왜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정동에 있는 경운궁으로 갔을까요? 정동 일대에는 러시아 공사관 이외에도 여러 나라의 공사관이 있었어요. 또 서양인들도 많이 살았구요. 그러니 일본의 간섭을 피하며 외교활동을 하기에 좋은 곳이라 생각했지요.

정동에서 서양인들이 처음 살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요? 미국 외교관이 처음 이곳에 오면서부터예요. 우리나라는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어 일본에게 부산 이외에도 인천항과 원산항을 열었어요.

그 후 청은 일본이 조선에서 세력을 넓히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과 수교할 것을 조언했어요. 조선은 이를 받아들여 1882년 미국과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맺어요. 이때 우리나라에 미국 외교관이 처음으로 오게 된 것이죠.

<정동에 오는 미국 외교관의 모습>   

그 후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공사관 등이 하나둘씩 만들어지면서 정동에 사는 서양인이 늘어났어요. 정동에는 서양의 외교관만 있었던 것이 아니에요. 외국인 선교사들도 많이 와서 살았답니다. 그들은 자신이 믿는 종교를 우리나라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 했어요.

선교사 중 가장 먼저 온 사람은 호러스 뉴턴 알렌이에요. 알렌은 원래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우리나라에 미국 공사관이 생기면서 미국인을 치료하는 의사로 오게 되었어요.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 명성 황후의 친척이었던 민영익이 칼을 맞아 부상당하자 치료를 해주었어요. 덕분에 알렌은 고종의 마음을 얻고 여러 가지 지원을 받을 수 있었어요.

알렌에 이어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의 선교사들이 들어왔어요. 그들은 각각 새문안교회와 정동제일교회를 세웠어요. 이 교회들은 지금도 정동에 가면 볼 수 있어요. 이외에도 영국 대사관 옆에는 성공회 성당이 만들어지고 구세군 사관학교도 세워졌어요.

대한 제국 시기 정동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어요. 황제가 머물던 궁궐인 덕수궁과 여러 외국 공사관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대한 제국 시기 고종은 덕수궁을 중심으로 하여 서울을 새롭게 만들려는 도시계획도 세웠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한 제국의 역사는 오래가지 못했어요. 1910년 일본이 대한 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거든요. 이에 따라 정동은 더 이상 정치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없었어요.

  

정동의 중심이 된 덕수궁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이었어요. 고종이 대한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면서 정동의 중심이 되었어요. 그러다가 1907년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되고, 순종이 즉위하면서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뀌었어요.

덕수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중화전이에요. 1902년에 지어진 중화전은 아래의 왼쪽 사진처럼 지붕을 2층으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지어진 지 2년 만에 덕수궁에 불이나 건물이 타버려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지어졌어요.

<1902년의 중화전 모습과 현재 중화전 모습>   
독립기념관, 문화재청

덕수궁은 조선 시대 여느 궁궐과 다른 점이 하나 있어요. 바로 서양식 건물이 있다는 것이죠. 그 건물은 석조전이에요. 석조전은 ‘돌로 만든 집’이란 뜻이에요. 덕수궁에 세워진 서양식 건물이죠. 큰 돌기둥 여러 개가 지붕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에요. 석조전은 현재 대한 제국 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어요.

<석조전과 서양식 정원>   
문화재청

을사늑약이 맺어진 중명전

중명전은 1901년에 지어진 서양식 도서관 건물이에요. 원래는 덕수궁 안에 있었는데 도로가 생기면서 현재처럼 덕수궁 밖으로 나오게 되었어요. 광무 황제(고종 황제)는 1904년 덕수궁의 건물이 불타자 중명전에 머물며 나라를 다스렸어요. 중명전은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진 곳이기도 해요.

<중명전의 현재 모습(문화재청)과 을사늑약이 맺어질 때를 재현한 모습>   

대한 제국의 외교 1번지, 정동

1883년 정동에 미국 공사관이 처음 생겼어요. 그 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등 여러 나라의 공사관들이 들어섰어요. 대부분의 외국 공사관이 서양식 건물이었던 것과 달리 미국 공사관은 앞에 있던 그림처럼 원래 있던 우리나라 한옥을 조금 고쳐서 사용했어요.

<영국 공사관과 러시아 공사관의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정동에 외국 공사관들이 들어서면서 외국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외국인에게 필요한 물건을 파는 가게가 하나둘씩 생겨냈어요. 또 서양 요리와 커피를 파는 곳이 생겨났는데 대표적인 곳이 손탁호텔이죠.

<손탁호텔>   
국립민속박물관

정동에는 근대적 학교도 있었어요

“선교사 아펜젤러가 학교를 세웠다고 하니 학교 이름과 간판을 내려야겠소.”

1886년 고종은 이 학교에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학교 간판을 내려주었어요. 배재학당은 학교 이름을 받기 1년 전인 1885년 외국인 선교사가 세운 학교에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남학생들을 위해 세워진 근대식 사립 학교이지요. 당시 선교사들은 우리나라에서 직접 종교를 알리는 활동을 하는데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학교를 많이 세워 교육도 하고 간접적인 선교 활동도 했어요.

<배재학당 초기 모습>   
한국학중앙연구원

1886년에는 여성을 위한 근대적 교육기관도 세워졌어요. 바로 이화학당이에요. 한 명의 여학생을 가르치면서 시작된 이화학당은 1893년 무렵에는 30명의 학생이 있는 학교로 발전했어요.

1886년에는 조선 정부도 ‘육영공원’이라는 근대적 학교를 세웠어요. 이 학교도 정동에 있었어요. 육영공원은 관리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나 고위 관리의 자제를 가르치는 학교였으나 1894년 정부의 재정이 부족하여 문을 닫았어요.

역사 속 작은 이야기: 정동의 역사

정동은 원래 정릉동이었어요. 조선 초 이곳에 왕비의 능(정릉)이 있어서 붙여진 것이죠. 그 왕비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 왕후에요. 그런데 이성계가 죽은 후 3대 왕인 태종이 정릉을 현재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기 때문에 지금은 정동에 없어요. 태종은 신덕 왕후를 좋지 않게 생각했거든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정동은 선조 임금이 머물던 곳이기도 했어요. 선조가 죽은 후 광해군은 창덕궁으로 처소를 옮겼어요. 이때 광해군이 정동에 있던 궁을 경운궁이라 이름 붙였어요.

정동에는 대한 제국의 역사를 알려주는 중심 궁궐인 덕수궁이 있지요. 또 대한 제국이 세워지기 전부터 외국 공사관, 학교, 교회 등 여러 근대적 시설도 있었어요. 이런 정동의 모습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찾아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임진왜란 후 선조가 머물던 석어당>   
문화재청

[집필자] 김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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