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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 뒤에 숨어 있는 가슴 아픈 역사, 제주 4·3 사건 유적

<제주 4·3 평화공원(제주 제주시)>   

“이웃 마을이 불타고 있소. 우리도 얼른 한라산으로 피신합시다.”

“토벌대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면, 우리도 목숨을 잃게 됩니다.”

1947년 3월 1일 발포 사건으로부터 시작해,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약 7년여 동안 제주도는 붉은 피로 물들었어요. 제주 4·3 사건이 일어난 거예요. 여기저기서 총성이 들려오고 평화로운 마을은 불길에 휩싸였지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지만 장례식도 제대로 치룰 수 없었지요. 도대체 제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제주에서 일어난 비극, 제주 4·3 사건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우리 국민들은 새로운 정부를 세우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어요. 하지만 그 희망은 오래 가지 못했어요. 미국과 소련이 대립하는 가운데에 38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통치하기 시작했거든요. 또 미국과 소련 정부 수립을 놓고 생각이 나뉘었지요.

한반도 남쪽을 미군이 통치하는 미군정이 실시되자 제주도민들은 이제 세상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미군정은 조선 총독부의 경찰 기구를 그대로 두고 친일파 경찰들을 통치에 이용했어요. 그러자 제주도민들의 실망감은 커졌지요. 게다가 극심한 가뭄으로 식량이 부족하고, 전염병까지 돌아 제주도민들은 힘겨운 생활을 해야 했어요.

1947년 3월 1일, 제주의 북초등학교에서 3·1절을 기념하는 집회가 열렸어요. 제주도민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어요.

“3·1 정신을 이어받아 통일 국가를 세우자!”

“친일 경찰 물러가라! 식량 문제는 우리 손으로!”

평화롭게 진행된 거리 행진이 끝나갈 무렵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어요. 어린 아이가 경찰의 말발굽에 치여 넘어졌거든요. 그런데 경찰은 사과조차 하지 않고 가버렸어요. 화가 난 제주도민들은 경찰서로 몰려가 거세가 항의했어요. 경찰은 이를 폭동으로 간주했고, 제주 중심지에 있는 관덕정 부근에서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아댔어요. 이때 6명이 죽고, 8명이 다쳤어요.(3·1절 발포 사건)

제주도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어요. 3월 10일, 제주도 직장인들 약 4만여 명이 참여한 총파업이 벌어졌어요.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육지 경찰과 북에서 내려온 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가 제주도로 들어왔어요.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이 모두 공산주의자들이 선동한 일이라며 이들을 찾아낸다는 이유에서였지요.

<불타고 있는 제주 마을>   

그러던 중 유엔(UN)에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면서,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가 결정되었어요. 그러자 1948년 4월 3일, 한라산 오름에서 봉화불이 타올랐어요. 남한만의 총선거를 반대하는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무장 봉기를 일으켰어요.

이들 무장대는 경찰서를 습격하고 서북청년회를 공격했지요. 이에 맞서 미군정은 경찰과 서북청년회를 이용해 진압하기 시작했어요. 육지의 군인들도 제주도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무장대와 미군정 사이에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지요.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었어요. 많은 수의 제주도민들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어요. 한반도를 분단된 나라로 만들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지요. 제주도 두 곳 투표구에서 투표자가 과반수를 넘지 못해 무효 처리되었어요.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남한만의 총선거를 반대한 제주도민들을 사회주의 세력으로 간주하고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어요. 더 많은 경찰과 군인들이 투입되었고, 무장대를 무조건 토벌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1948년 11월, 정부는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어요. 그리고 사람들을 한꺼번에 죽이는 집단 학살이 시작되었지요.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중산간 마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모두 폭도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

위와 같은 내용을 담은 포고문을 발표했어요. 또한 한라산 중산간 마을 사람들에게 해안가로 내려오라는 명령(소개령)을 내렸지요. 그런 뒤 토벌대는 한라산 중산간 지역 마을을 불태우기 시작했어요. 중산간 지역 마을 대부분이 잿더미로 변했지요.

그뿐 아니에요. 한라산에 올라간 무장대를 도왔다며 제주도민들을 이유 없이 죽이기도 했어요. 한편 한라산에서 내려오면 살려주겠다는 토벌대의 말에 1만여 명이 내려왔어요. 하지만 그중 1,600여 명의 사람들이 총살당하고, 형무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어요. 어른들뿐만 아니라 많은 어린이들도 죽어갔어요. 토벌대뿐만 아니라 무장대들도 경찰 가족 등을 이유 없이 죽였어요.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용기 있게 저항한 사람이 있어요. 바로 문형순 전 성산포 경찰서장 등이지요. 당시 경찰들은 군인, 서북청년회와 함께 무장대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았지요. 하지만 문형순은 명령을 거부했어요.

“제주도민을 함부로 잡아들일 수 없소. 그들을 왜 함부로 죽인단 말이요. 부당한 명령을 따를 수 없소.”

문형순과 같이 정의를 지키려는 사람들 덕분에 제주도민들은 생명을 지켜낼 수 있었지요. 화북 어느 마을 사람들은 군인들에 의해 불타버린 서쪽 바닷가의 곤을동 마을 사람들에게 집을 짓고 살 땅을 나누어 주기도 했대요. 견디기 힘든 어려움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지켜내려는 사람들 덕분에 제주도 사람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지요.

제주 4·3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어요.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정도인 2만 5천 명~3만여 명이나 되었어요. 대부분이 민간인이었어요. 1954년 9월이 되어서야 7년여 만에 제주도 사람들은 한라산에 올라갈 수 있게 되었고, 제주도에서 총소리도 멈추었지요.

제주 4·3 사건은 오랫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어요. 제주도민들은 혹여 잘못 이야기했다간 자신들도 폭도나 폭도의 가족으로 몰려 피해를 입게 될까봐 꽁꽁 숨겨왔어요. 제주도민들은 그렇게 깊은 아픔을 가슴에 안고 50여 년의 세월을 살아야 했어요.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리기 위한 노력을 벌여왔지요. 그런 노력 덕에 2000년 김대중 정부 때에는 ‘4·3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 차원의 진상 조사가 시작되었어요.

2003년 노무현 정부 시기에는 대통령이 직접 제주도에 내려와 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사과를 했어요. 국가 폭력에 의해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음을 인정한 것이지요. 이후 제주 4·3 사건 당시 희생당한 분들의 넋을 달래고,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되새기기 위해 제주 4·3 평화공원이 만들어지고, 기념관도 세워졌어요.

<제주 4·3 평화공원>   

<제주 4·3 평화공원기념관>   

하지만 아직도 제주 4·3 사건은 그 진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부분이 있어요. 또 죄 없이 희생당한 분들에 대한 보상 및 명예 회복 등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도 남아 있지요.

지금부터 제주 4·3 사건의 유적지를 돌아보며 제주의 아픔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아픔을 넘어 무엇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지 생각해 볼까요? 또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도 살펴보아요.

  

3·1절 발포 사건이 일어난 관덕정

제주 4·3 사건은 3·1절 발포 사건에서 시작되었어요. 어린 아이가 경찰의 말발굽에 치였는데 사과도 하지 않자, 제주도민들이 경찰서로 몰려가 사과를 요구했지요. 그러자 경찰은 이를 폭동으로 여겨 관덕정 앞에서 총을 쏘아댔어요. 경찰이 쏜 총에 제주도민들이 죽거나 다쳤지요.

그것도 모자라 다음 날부터 3·1절 행사를 주관했던 사람들과 학생들을 잡아가 고문까지 했다고 해요.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제주도민들은 분노했고, 총파업을 결정했어요.

관덕정은 세종 때 만들어진 정자로 이곳에서는 잔치 등 여러 가지 행사가 열리기도 했었지요. 제주 4·3 사건 당시 무장대 사령관이었던 이덕구의 시신을 관덕정 앞 십자가 형틀에 걸어 며칠 동안 전시했다고 해요.

<관덕정>   

다랑쉬 마을 사람들이 숨어 지내던 다랑쉬 굴

제주 4·3 사건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끔찍하게 죽어간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어요. 다랑쉬 오름에 있는 다랑쉬 굴도 그 중 하나에요. 다랑쉬 오름 부근에 있던 다랑쉬 마을이 불태워지자, 마을 사람들은 다랑쉬 굴로 숨어들었어요. 굴 입구를 커다란 돌로 막고 흙으로 덮어 눈에 띄지 않게 만들었지요.

하지만 토벌대들에 의해 발각되면서 끔직한 일이 벌어졌어요. 토벌대들이 동굴 입구에서 불을 피우는 바람에 굴 안에 숨어있던 11명이 질식해 죽었다고 해요. 4·3 사건 진상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다랑쉬 굴에서 11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답니다.

<다랑쉬굴 모형(제주 4·3 평화공원기념관)>   

4·3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너븐숭이

제주 4·3 사건 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마을이 있어요. 바로 제주 서쪽 해안가에 위치한 조천읍의 북촌리 마을이에요. 당시 이 마을 남자들이 거의 죽음을 당해 ‘무남촌’으로 불리기도 했어요. 어려움 속에서도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알린 『순이 삼촌』이란 소설에서도 북촌리 마을의 비극을 다루고 있지요. 북촌리에는 당시의 비극을 알려주는 너븐숭이 기념관이 있어요. 너븐숭이는 ‘넓은 돌밭’을 뜻하는 말이에요.

도대체 이 마을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요? 1949년 1월 17일, 북촌리 너븐숭이 근방에서 행군하던 군인 2명이 무장대의 습격을 받아 죽는 일이 벌어졌어요. 그러자 군인과 경찰 토벌대가 북촌리로 들이닥쳤어요. 그리고는 마을 사람들을 모두 학교 운동장으로 모이게 한 뒤 마을에 불을 질렀어요. 운동장에 모인 마을 사람들을 향해 토벌대가 소리쳤어요.

“군인과 경찰 가족은 서쪽으로 나와!”

그런 뒤 나머지 사람들을 학교 주변의 당팟과 옴팡밭(오목하게 쏙 들어가 있는 밭)으로 끌고 가 총질을 해댔어요. 여기저기서 살려달라는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총소리는 끊이질 않았어요. 그날 하루 300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이 벌어졌어요. 밭은 온통 핏빛으로 물들고, 시체들이 널려 있는 모습이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모습과 같았다고 해요.

북촌리 마을은 제삿날이 거의 똑같아요.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같은 날 죽었거든요. 매년 1월 16일이 되면 합동 제사를 지내며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혼을 날래고 있어요.

너븐숭이 4·3 기념관 옆에는 마을 사람들의 혼을 달래는 위령탑이 서 있어요. 작은 애기무덤도 몇 기 남아있어요. 추모객들이 올려놓은 애기무덤의 장난감과 인형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더욱 뭉클해진답니다.

<①너븐숭이 4·3 기념관 ②북촌리 위령비
③학살의 현장인 북촌초등학교에 세워진 비석 ④너븐숭이의 애기무덤>   

참혹한 죽임을 당한 흔적, 섯알오름 학살 터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어요. 정부에서는 제주도의 4·3 사건 관련자들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지요. 그리고 210여 명의 제주도민들을 섯알오름에서 총살했어요.

섯알오름은 일제 강점기 때 폭탄 창고가 있던 곳이지요. 일제는 섯알오름 주변에 알뜨르 비행장을 만들었어요. 이 비행장은 모슬포 주민들을 동원해 만든 군용 비행장이었어요. 비행장을 만들면서 오름을 파내 폭탄을 보관하는 창고를 만들었어요. 광복 이후 미군에 의해 이 창고가 폭파되었는데, 그러면서 구덩이가 만들어졌지요.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웅덩이가 두 개예요. 그 이유는 두 차례에 걸쳐 학살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지요. 4·3 관련자들을 두 차례에 걸쳐 죽인 후, 웅덩이에 넣고 묻어버렸다고 해요.

< 알뜨르 비행장의 평화를 염원하는 소녀상>   

<섯알오름터>   

화해와 상생의 상징, 하귀리의 영모원

4·3 사건 당시 같은 마을 사람들끼리도 서로가 등을 돌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어요. 하귀리가 바로 그런 마을 중 하나에요. 마을 사람들은 밤에는 무장대를 도와주고 낮에는 토벌대에 협조했어요. 무장대에 의해 죽는 사람도 생기고, 많은 이들이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도 했지요.

이런 상황이 되니 마을 사람들끼리 서로 갈등이 생겼어요. 4·3 사건이 끝난 이후 이 마을은 무장대를 도운 사람이 많다며 ‘빨갱이 마을’로 불렸어요. 마을 사람들 중에는 자신도 빨갱이 가족으로 몰릴까봐 두려움에 떨었고, 무장대와 관련 있던 사람들을 멀리했어요.

결국 하귀리가 동귀리와 귀일리로 나뉘어졌어요. 그렇게 나뉘어져 서로를 멀리하며 꽤 오랜 시간을 보내왔어요.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이들은 모두 피해자잖아요. 서로를 멀리할 이유가 없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마을 사람들도 이를 깨달아 서로가 다시 하나 되려는 노력을 했어요. 마을에 영모원이라는 추모 공간도 만들었지요. 영모원에 있는 4·3 희생자 위령비에는 다음 내용이 적혀 있어요.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한다는 뜻으로 모두가 함께 이 빗돌을 세우나니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 이제야 비로소 지극한 슬픔의 땅에 지극한 눈물로 지극한 화해의 말을 새기나니, 지난 50여 년이 길고 한스러워도 앞으로 올 날들이 더 길고 밝을 것을 믿기로 하자. 그러니 이 돌 앞에서 더 이상 원도 한도 말하지 말자. 다만 섬나라 이 땅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 한번쯤 여기 와서 고개를 숙이라.
- 비문 내용 중 일부 -

이 비는 제주의 민간인뿐만 아니라, 무장대와 토벌대 모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지요. ‘모두 희생자이기에 모두 용서한다.’는 마음을 담아 비를 세우고, 화해하며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답니다.

<하귀리 영모원과 영모원의 4·3 희생자 위령비>   

역사 속 작은 이야기: 무명천 할머니

제주도 한림읍 월령리에는 진아영 할머니가 살고 있었어요. 그녀는 얼굴을 무명천으로 감싸고 50여 년을 살아왔기에 무명천 할머니로 불렸지요.

그녀는 왜 얼굴을 무명천으로 감싸고 살아야 했을까요? 그 이유는 제주 4·3 사건 때문이지요. 제주도의 평화로운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던 할머니는 총탄에 맞아 턱을 잃고 말았어요. 턱을 잃은 후 할머니는 말하기도 힘들었고 음식을 먹으면 모두 흘리기 일쑤였지요. 그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었던 할머니는 식사도 항상 혼자 했어요. 이웃에 놀러가 커피 대접을 받아도 밖에서 마시고 들어왔다고 해요.

무명천 할머니는 제대로 씹지 못하니 늘 소화불량에 시달렸어요. 총탄에 맞은 후유증으로 이곳저곳 아픈 곳도 많았어요. 링거를 맞지 않고는 제대로 생활하기 힘들었고, 진통제 없이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고 해요. 약값과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이웃 일을 도와주거나, 톳을 따 내다 팔았지요. 또 마당에 심어 놓은 선인장 열매를 팔아 수입을 마련하기도 했어요.

죽기보다 힘든 삶의 고통을 안고 외롭게 살아가던 할머니는 2004년 9월 8일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의 삶터를 찾아오고 있어요. 돌담 아래 쭈그리고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던 무명천 할머니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기억하기 위해서 말이에요.

아직도 평화의 섬으로 지정된 제주의 아픈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진실이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까요. 제주 4·3 사건 유적을 돌아보면 그 진실을 하나하나 알 수 있을 거예요. 어떤 위로와 사과로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을 텐데, 깊은 상처를 딛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손을 내밀어 화해한 제주도민들의 노력에 고개가 숙여질 거예요. 또한 진정한 평화와 인권의 가치도 되새겨 볼 수 있을 겁니다.

<진아영 할머니의 삶터와 할머니 집에 걸려있는 작품>   

[집필자] 황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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