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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긴 6·25 전쟁

<임진각 평화누리공원(경기 파주시)>   

“38선에서 군인끼리 또 총을 쏘아댔다며?”

“휴가 나온 군인들에게 빨리 부대로 돌아가라는 지프차의 방송을 보면 이번은 작은 충돌이 아닌 것 같아.”

“작은 충돌이 아니면... 그럼 진짜 전쟁이라도 났단 말이야?”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이 38선을 넘어 전쟁을 일으켰어요. 이때 일어난 전쟁은 약 3년 넘게 계속되었어요. 3년의 전쟁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전쟁은 또 우리에게 어떤 과제를 남겼을까요?

6·25 전쟁이 일어나다

해방 이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38선이 만들어지고, 한반도에 서로 다른 이념을 따르는 두 개의 정부가 세워졌어요. 1948년 8월 남쪽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졌고, 다음달인 9월 북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세워졌어요. 남한과 북한은 서로 통일을 주장하였어요. 그리고 38선을 넘나들며 개성, 옹진반도 등에서 서로 작은 규모의 충돌을 계속했어요.

1949년에 남한에 있던 미군이 모두 철수하자 소련의 군사 지원을 받으며 은밀하게 전쟁을 준비하던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38선을 넘어 본격적으로 남침을 시작하였어요.

<숭례문을 지나는 북한군 전차>   
전쟁기념관

전쟁이 일어나자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쳐들어온 북한군에 국군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계속 밀려났어요. 전쟁이 나고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겼고, 한국 정부는 대전과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내려가야 했어요. 긴급하게 파병된 미군도 북한군을 막지 못했어요. 심지어 미군을 이끌던 사단장이 북한군에 붙잡혀 포로가 되기도 했어요.

전쟁이 나고 한 달 만에 남한 지역 대부분을 북한군이 차지하였어요.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에 맞서 낙동강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았어요.

<낙동강을 방어하는 미군(왼쪽)과 학도의용군(오른쪽)>   
전쟁기념관,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북한군은 대구, 포항 등 방어선 전 지역에서 총공격을 했어요. 낙동강 방어선을 두고 약 2개월 간 남한과 북한은 모든 힘을 다해 맞서 싸웠어요. 북한군이 방어선을 뚫고 들어오면 국군과 유엔군이 이를 공격해 되찾기를 반복했어요. 낙동강 전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고 있을 무렵 인천에서 함정 261척과 7만여 명이 참여한 상륙작전이 시작되었어요. 북한군의 허리를 끊어 고립시키기 위한 작전이었어요.

수많은 함정에서 함포를 쏘고, 상륙정에 병사들을 태워 육지로 상륙시켰죠. 제일 먼저 점령한 곳은 월미도였어요. 2천여 명의 북한군이 강하게 저항했지만 거센 공격으로 인천을 되찾을 수 있었어요.

<인천에 상륙하는 해병대>   
전쟁기념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국군과 유엔군은 바로 서울을 되찾기 위한 작전을 펼쳤어요. 그리고 9월 28일, 북한군에게 서울을 빼앗긴 지 석 달 만에 드디어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었어요. 서울을 되찾은 연합군은 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하였어요. 그리고 20여 일 만에 평양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일부 부대는 압록강에 도착하여 곧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한층 커져 갔어요.

유엔군이 평양에 들어갈 10월 무렵이었어요.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며 모든 부대에게 북진을 명령했어요. 이때 북한의 다급한 요청으로 중국군 38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고 있었어요. 낮에는 동굴 속에 숨어 비행기의 공습을 피하고, 밤에 몰래 이동하는 중국군을 알 수가 없었어요.

1950년 12월, 중국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모든 전선에서 유엔군이 후퇴하기 시작했어요. 유엔군은 비행기와 탱크, 대포 등 중국군에 비해 우수한 무기를 갖고 있었지만 10배가 넘는 수의 중국군을 막아낼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개마고원의 겨울은 너무 추웠고 영하 30도의 추위에 얼어 죽는 유엔군도 생겨났어요. 뿐만 아니라 장비도 얼어붙어 효과적인 작전을 펼치는 것이 더욱 힘들어졌어요. 혹독한 추위와 수많은 중국군에 포위된 국군과 유엔군은 흥남항을 통해 간신히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어요.

중국군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어요. 중국군이 남쪽으로 빠르게 내려오자 크게 놀란 서울 시민들은 앞을 다투어 다시 피난을 나섰어요. 급기야 중국군의 계속된 공격에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말았어요. 그러나 전열을 정비한 유엔군은 다시 총공세를 펼쳐 1951년 3월 다시 서울을 되찾고, 38선 이북으로 북한군과 중국군을 밀어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38선을 중심으로 밀고 밀리는 상황이 지속되었어요.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 계속되자 세계 여러 나라는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것을 우려했어요. 그래서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전쟁 이전의 상황으로 한반도를 되돌리려는 휴전 회담이 1951년 6월부터 시작되었어요.

휴전 회담이 진행되는 중에도 38선 주변에서는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매일매일 벌어졌어요. 산 하나를 놓고 뺏고 뺏기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된 것이죠. 그러나 미국이나 중국은 한반도의 통일보다는 38선을 중심으로 전쟁을 멈추는 것에만 관심이 컸어요. 고지쟁탈전이 계속되고, 큰 소득도 없이 수많은 군인들의 목숨이 희생되는 가운데 휴전 회담은 계속되었어요. 국민들은 매일 휴전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어요.

<판문점과 휴전 문서에 서명을 하는 대표들>   
국가기록원

오랜 시간 끝에 개성 근처에 있던 판문점에서 남한의 대표 없이 미국과 중국, 북한만이 참석한 가운데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어요. 1953년 7월 27일 전쟁은 끝나지 않은, 다만 멈춰있는 상태로 끝이 나고 만 것이에요.

6·25 전쟁으로 우리나라는 엄청난 물적, 인적 피해를 입었어요. 주택과 학교, 공공시설, 도로, 철도, 교량 등 대부분의 시설이 파괴되었어요. 남측 군인 78만 명, 북측 군인 203만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전투 중에 실종된 군인들도 많았어요.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의 인명피해도 매우 컸어요. 죽거나 부상을 입은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았고,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와 남편을 잃은 미망인 수십만 명이 생겨났어요. 이산가족은 무려 1천만 명에 달했고요.

전쟁이 멈추고 남한과 북한 모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어요. 1953년에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에 불과해 미국에서 보내주는 원조 물자 없이는 살아남기가 힘들었지요. 전쟁은 지독한 가난과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만 남기고 끝나고 말았어요.

  

전쟁의 잔인함을 간직한 한강 인도교

“국군이 적을 물리치고 의정부를 탈환했으니 서울 시민은 안심하라.”

소련제 T34 전차를 몰고 쳐들어온 북한군에 국군은 계속 밀리고 있었어요. 그러나 라디오에서는 용맹스런 우리 국군이 바로 반격을 해 적을 물리치고 있다는 거짓 방송을 내보냈어요. 많은 서울 시민들이 방송을 믿고 일상생활을 계속했어요.

그러나 전쟁이 나고 3일 만에 북한군이 서울 외곽 북쪽에 나타났어요. 북한군의 빠른 진격에 다급해진 시민들과 전선에서 후퇴하는 군인들이 한강인도교로 우르르 몰려들었어요. 한강인도교는 당시 서울 시내에서 한강을 건널 수 있는 유일한 다리였어요. 비가 내리는 깊은 어둠 속에 다리 위는 피난민과 군인들, 차들로 가득 찼어요.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북한군을 막기 위해 육군참모총장은 한강인도교 폭파를 명령했어요. 한강을 북한군을 막기 위한 방어선으로 만들고자 했던 거예요. 폭파 명령을 받은 군인들이 사람들을 막기 위해 신호탄을 쏘았으나 소용이 없었어요.

<한강철교를 파괴하고 한강을 방어하는 군인과 파괴된 한강 인도교의 모습>   
전쟁기념관

남산에 북한군의 탱크가 나타났다는 소리에 다급해진 군인들은 다리를 폭파했어요.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다리가 무너졌어요. 살기위해 다리를 건너던 수많은 시민과 군인들이 공중으로 날아갔고, 한강물에 빠져 목숨을 잃고 말았어요. 다리가 끊어지자 서울 방어에 참여했던 많은 국군과 대부분의 서울 시민들은 북한군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는 길이 막히고 말았어요.

낙동강 방어선 최대 전투지 다부동

<낙동강을 지키는 군인과 전투 후 파괴된 북한 탱크>   
국가기록원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다. 물러나면 바다뿐이다.”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북한군을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에 의지해 막아섰어요. 낙동강 방어선에서 가장 중요한 길목은 다부동이었어요. 다부동 지역을 빼앗기면 대구를 지키기가 어려운 상황이었거든요.

때문에 다부동에서의 전투는 매우 처참했어요. 산을 오르며 총을 쏘고, 참호에 수류탄을 던지고, 직접 몸으로 적과 부딪쳐 싸우는 백병전도 자주 벌어졌어요. 비 오는 날이나 어두운 밤에는 백병전이 더 심했어요. 고지 하나를 낮에는 국군이 빼앗고, 밤에는 다시 북한군에게 빼앗기기를 15번이나 반복한 곳까지 있을 정도였어요.

전투가 치열해질수록 죽거나 부상을 입는 군인의 수도 늘어갔어요. 사상자를 대신해 매일 600~700여 명의 신병을 보충해야만 했어요. 나중에는 신병도 모자라 학도병으로 대신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55일간 계속된 다부동 전투에서 양측 모두 합쳐 2만 7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투는 겨우 끝이 났어요.

국군과 유엔군은 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다부동 지역을 비롯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킬 수 있었어요. 낙동강을 지키는 사이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면서 다시 반격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어요.

<다부동전적기념관(경북 칠곡군)>   
칠곡군청

고지쟁탈전으로 벌거숭이가 된 백마고지

<백마고지(강원 철원군)>   

휴전회담이 한참이던 1952년 10월, 백마고지에서도 국군과 중국군 사이에 고지 하나를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벌어졌어요. 백마고지는 서울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에 있었고, 고지를 차지하면 넓은 철원평야도 얻을 수 있었어요.

국군과 중국군은 작은 산 하나를 점령하기 위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싸웠어요. 서로 10여 일 동안 12차례나 고지를 차지했다 물러나기를 반복했어요. 심지어 하루에도 많게는 5번 이상 고지의 주인이 바뀌기도 했어요. 고지를 공격하기 전에는 항상 대포를 먼저 쏘았는데, 국군은 약 22만 발, 중국군은 약 6만 발의 포탄을 고지에 퍼부었어요.

쏟아지는 수많은 포탄에 의해 산은 황폐화되었고, 벌거벗은 모양새가 마치 백마와 같다고 해서 백마고지란 이름이 붙었어요. 중국군은 1만 명, 국군은 3500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투는 멈췄어요.

<백마고지를 향한 전차와 고지를 향해 쏜 포탄피>   
국가기록원, 전쟁기념관

피난민의 고단한 삶을 안아준 부산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하면서 전쟁은 곧 끝날 것처럼 보였어요. 그러나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지요. 국군과 유엔군은 빠르게 후퇴를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군인들을 따라 남쪽으로 피난을 갔어요. 피난민들은 기차를 타기도 하고, 배를 타기도 했어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발로 몇 달을 걸어서 겨우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면서 부산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했어요. 그러자 정부는 급하게 피난민이 모여 살 수 있는 수용소를 마련하였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았어요. 수용소에 들어가지 못한 많은 피난민들은 직접 판잣집을 지어 생활했어요.

판잣집은 주로 미군 부대에서 나온 박스나 판자 부스러기를 주워 만들었어요. 바닥은 가마니를 깔아 겨우 땅의 냉기만 가렸지요. 겨울이면 판잣집의 벽 틈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과 힘겹게 싸워야만 했어요.

<기차로 피난 가는 사람들과 걸어서 피난을 가는 사람들>   
국가기록원, 전쟁기념관

피난민을 괴롭힌 것은 추위만이 아니었어요. 많은 사람이 모이면서 부산에는 먹을 수 있는 물이 턱없이 부족했어요. 특히 산비탈에 만들어진 판잣집에 수도시설이 있을 리가 없었어요. 사람들은 산 밑의 수도꼭지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렸어요. 그리고 물동이에 물을 받아 머리에 이고 산 위까지 날랐어요. 그러다 보니 하루 종일 산을 오르고 내려도 몇 동이밖에 나르지 못했어요.

피난민들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먹고사는 것이었어요. 많은 피난민들은 부산항의 부두 노동자가 되었어요. 부산항에는 원조 물자와 무역으로 들어오는 물건들이 많았거든요.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일을 할 수 있었고, 돈을 많이 벌지 못했지만 일자리는 많아 구하기도 쉬웠어요.

그리고 역이나 터미널, 시장에서 물건을 운반해 주는 지게꾼이 되어 하루하루 힘든 생계를 이어갔어요. 여자들은 주로 시장에서 일을 하였어요. 피난민이나 노동자, 지게꾼들을 상대로 꿀꿀이죽이나 국수를 팔기도 했고, 노점상이 되어 원조 물자를 팔기도 했어요.

피난민들은 매일매일 낯선 환경과 힘든 노동에 지쳐갔지만 부산에 정착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어요. 돈을 벌고 자식들을 키울 수만 있다면 허름한 판잣집도 부끄럽지 않았어요. 이때는 가족과 함께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했으니까요.

<피난민들의 삶>   
전쟁기념관

역사 속 작은 이야기: 크리스마스의 기적, 흥남 철수 작전

중국군에 고립된 10만여 명의 유엔군이 탈출하기 위해 35만 톤의 군수물자를 가지고 흥남 부두로 왔어요. 유엔군을 따라 동해안 지역의 피난민도 항구로 몰려들었어요.

“군함에 민간인을 태울 수는 없소! 병력과 물자를 옮기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오.”

“이대로 철수하면 저 사람들은 모두 다 죽습니다!”

“피난민을 배에 태울 수 없다면 우리 국군은 피난민과 함께 걸어서 38선을 넘을 것입니다.”

미군 군사고문이었던 현봉학은 알몬드 미 제10군단장에게 피난민들의 탈출을 도와줄 것을 간청했어요. 피난민 탈출에 김백일 제1군단장도 한목소리를 냈어요. 알몬드 장군은 여러 사람의 간청에 유엔군과 함께 피난민도 탈출시킨다는 결정을 했어요. 그리고는 주변의 모든 선박을 동원해 피난민들을 배에 태웠어요. 전함과 화물선, 상선 등 193척의 배가 철수 작전에 동원되었어요.

여러 함선 중 가장 많은 피난민을 태운 배는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였어요. 그런데 항공유를 싣던 화물선의 정원은 겨우 60명뿐이었어요. 부족한 자리를 넓히기 위해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라루 선장은 배에 실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을 최대한 많이 태우라는 명령을 내렸어요.

<흥남철수>   
국가기록원

화물 대신 피난민 1만 4천 명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부산을 향해 출발했어요. 많은 피난민들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에는 음식을 비롯해 모든 것이 부족했어요.

하지만 피난민들은 질서를 잘 지켜가며 한 사람도 다친 사람 없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어요. 오히려 3일 간의 항해 도중 배 안에서 5명의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기까지 했어요.

메리디스 빅토리호를 포함해 많은 선박이 동원된 철수 작전으로 10만 명의 피난민들이 무사히 흥남항을 떠났어요. 배에 싣지 못한 군수물자는 항구와 함께 폭파되었어요. 그리고 피난민이 떠난 바로 다음날인 12월 25일에 중공군이 흥남을 점령하였지요.

간발의 차로 피난민 10만 명의 목숨을 구한 흥남 철수 작전! 크리스마스에 기적이 일어난 것이에요.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은 전국토를 황폐화시켰고, 수많은 사상자와 이산가족, 그리고 깊은 마음의 상처만 남긴채 끝났어요.

6·25 전쟁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전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죠. 전쟁이 아닌 남한과 북한 모두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 보아요.

[집필자] 신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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